1947년 7월 19일 낮 12시경
서울 혜화동 교차로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들이 총격을 가했고
몽양 여운형은 암살당하고 맙니다.
현장에서 사라진 범인...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왜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허망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을까?
이 암살사건의 배후는 누구인가?
해방직후 한 잡지사에서 조사한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33%의 지지로
1위로 올랐던 민족지도자 목양 여운형
상하이에 독립운동 터전 마련
3.1운동과 임시정부 산파 역할
해방 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 전개
그러나 해방 후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여운형은
좌우 양측의 견제를 받습니다.
열한 차례 테러
그리고 열두 번째 테러.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시 경찰의 행동입니다.
총격 직후 여운형의 경호원들이 범인을 추격했는데
경찰이 오히려 그 경호원들을 체포해 버린 겁니다.
그러는 사이 범인을 놓치고 맙니다.
이 이상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건 나흘 후,
경찰이 체포한 범인은 19세 소년 한지근.
그런데 이름과 나이를 속였던 이필형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6.25당시 행방불명
여운형 암살사건의 담당 경찰은 노덕술
친일고문경찰로 악명 높았던 그 노덕술입니다.
그 상관은 노덕술을 채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해방전국의 핵심 중재자였던
미군정의 버치 중위가 남긴 기밀 보고서가 있습니다.
/암살자는 암살 장소로, 경찰서 앞을 선택했다.
그것은 암살자들이 경찰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여운형 암살과 무관할까?
아니면 또 다른 배후가 존재하는 것일까?
통일 정부를 주장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력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그의 친일논란과 사상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최종 보고서 내용
/여운형에 대한 모든 혐의는 상상의 것이며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미군 관계자들은 여운형에게 찬사를 보내게 됐다.
여운형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버치 중위보고서 中
잘 싸워라.
싸워서 꼭 이겨라.
역사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몽양 여운형
여운형
(1885.4.24~1947.7.19)
손정은,
여운형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시사 - 역사 > MBC1919-2019 기억-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록] 이소연, 박경식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0) | 2019.08.30 |
---|---|
[기억록] 안현모, 김순애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Memory book] Ahn-Hyunmo, Memorizing and Recording about Kim-Soonae.) (0) | 2019.08.29 |
[기억록] 손병호, 이상룡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0) | 2019.08.21 |
[기억록] 유해진, 홍범도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0) | 2019.08.15 |
[기억록] 김슬기, 양우조, 최선화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0) | 2019.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