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MBC1919-2019 기억-록

[기억록] 손정은, 여운형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Buddhastudy 2019. 8. 27. 20:30


1947719일 낮 12시경

서울 혜화동 교차로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들이 총격을 가했고

몽양 여운형은 암살당하고 맙니다.

현장에서 사라진 범인...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왜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허망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을까?

이 암살사건의 배후는 누구인가?

 

 

해방직후 한 잡지사에서 조사한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33%의 지지로

1위로 올랐던 민족지도자 목양 여운형

 

상하이에 독립운동 터전 마련

3.1운동과 임시정부 산파 역할

해방 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 전개

 

그러나 해방 후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여운형은

좌우 양측의 견제를 받습니다.

 

열한 차례 테러

그리고 열두 번째 테러.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시 경찰의 행동입니다.

총격 직후 여운형의 경호원들이 범인을 추격했는데

경찰이 오히려 그 경호원들을 체포해 버린 겁니다.

그러는 사이 범인을 놓치고 맙니다.

이 이상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건 나흘 후,

경찰이 체포한 범인은 19세 소년 한지근.

 

그런데 이름과 나이를 속였던 이필형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6.25당시 행방불명

 

여운형 암살사건의 담당 경찰은 노덕술

친일고문경찰로 악명 높았던 그 노덕술입니다.

그 상관은 노덕술을 채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해방전국의 핵심 중재자였던

미군정의 버치 중위가 남긴 기밀 보고서가 있습니다.

/암살자는 암살 장소로, 경찰서 앞을 선택했다.

그것은 암살자들이 경찰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여운형 암살과 무관할까?

아니면 또 다른 배후가 존재하는 것일까?

 

통일 정부를 주장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력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그의 친일논란과 사상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최종 보고서 내용

 

/여운형에 대한 모든 혐의는 상상의 것이며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미군 관계자들은 여운형에게 찬사를 보내게 됐다.

여운형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버치 중위보고서

 

잘 싸워라.

싸워서 꼭 이겨라.

역사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몽양 여운형

 

여운형

(1885.4.24~1947.7.19)

 

손정은,

여운형을 기억하여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