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 자신을 아끼는 방법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본인만을 위해서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스님도 스스로에게 해 주시는 일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어떻게 스스로와 대화를 해야 하나요?//
저는 저를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고집할수록 번뇌가 많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일이 필연인지 우연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100년 전의 사람들과 현대인을 비교해 봅시다.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대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이
옛날 사람들이 더 많았을까요, 아니면 요즘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만약 옛날 사람들이 우연이라 여기는 일이 더 많았다면, 왜 그럴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면 필연이라고 부르고,
원인을 모르면 우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을 안다면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원인을 모른다면 모든 것이 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연한 사건도 생기고 필연적인 사건도 생기는 것입니다.
우연이나 필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을 모르면 우연이 되고, 원인을 알면 필연이 됩니다.
인생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면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짧게 보고 범위를 좁히면
대부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범위를 넓히고 시간을 길게 보면
내가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봐야
결국 이렇게 오도록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지나 놓고 보면 인생은 모두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닥치는 미래는 어떨까요?
전부 내가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을 길게 보느냐 짧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인 것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일어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좁게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다 전체를 보면 어떨까요?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질까요? 아니면 그냥 물이 출렁거릴 뿐일까요?
바다 전체를 보면 단지 물이 출렁거릴 뿐입니다.
그와 같이 크게 보면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그냥 출렁일 뿐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인식을 너무 움켜쥐면 번뇌가 자꾸 생깁니다.
‘자기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질문은
질문자가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여
자기라는 것을 자꾸 움켜쥐기 때문에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자기라는 인식을 갖게 되니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모르게 구분을 짓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없다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남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는 생각이 줄어들게 됩니다.
요즘 빅데이터가 등장하면서
개인의 자유 의지가 개인의 인생에 어느 정도 작용하는지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선택, 믿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것을 보고
반응하는 느낌과 감정도
핸드폰에 설치된 어플처럼,
이미 형성된 카르마에 따라 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핸드폰에 어떤 어플이 깔려 있는지를 미리 알게 되면
즉 어떤 사람의 카르마가 무엇인지 미리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좋아하는 업식을 가진 사람을 유혹하려면
뇌물을 쓰면 됩니다.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력 있는 이성을 앞세워 매혹하면 됩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칭찬을 해주고 치켜세워 주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옛날에는 이런 것을 독심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미리 알아내어 조정을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부하를 조정할 때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를 협박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도 사기를 당했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기를 친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가 던진 미끼를 보고 나 자신도 유혹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익을 많이 얻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기꾼은 이익을 많이 준다고 할까요, 적게 준다고 할까요?
당연히 많이 준다고 하겠죠.
하지만 이익이 높으면 그만큼 사기를 당할 확률도 높아지는 법입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결국 나에게도 원인이 있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사기를 쳤다면,
사기를 치는 사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기꾼은 말을 잘할까요, 못할까요?
말을 아주 잘합니다.
인물이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까요?
인물이 훤칠합니다.
옷도 잘 입을까요, 못 입을까요?
옷을 아주 잘 입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사무실도 잘 꾸며 놓고, 서비스도 굉장히 좋습니다.
낚시를 할 때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쓰겠습니까, 싫어하는 것을 쓰겠습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삼겠죠.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의 성질이 더러워 보인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할 일은 없습니다.
성질이 더러운 사람에게는 사기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어떤 사람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수록
여러분들은 조정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옛날에는 물건을 구입할 때
호미가 필요하면 호미를 사러 가고
선풍기가 필요하면 선풍기를 사러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광고가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을 사고 싶도록 만듭니다.
그중에는 내가 필요한 것도 있지만
광고가 그 물건을 사고 싶어 지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일단 구입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구입한 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이는 실제 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광고를 보고 ‘저 물건 괜찮다’ 하고 생각해서 사놓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상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사기를 당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필요에 의해서 구입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어릴 때 형성된
카르마의 반응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개가 목줄에 끌려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두 물질 사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어서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내 인생에서도
누가 목줄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데도
어딘가에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운명론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는 형성된 카르마에 의해
여러분이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이렇게 끌려다니는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옛 선사들은 ‘우리는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뜻합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굴린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한다고 하면
이혼의 주체는 누가 됩니까?
남편이 됩니다.
내가 이혼을 선택한 것이 아닌 게 되는 거죠.
이렇게 책임을 남편에게 전가하면
나의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그러면 나는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르게 행동했다고 하지만
상황은 늘 변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돌릴 일이 아닙니다.
‘변화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종속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된 상황에서 내가 선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자기중심을 잡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자꾸 고집하면
계속 외부 경계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한탄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주어진 환경을 그저 관찰하면서
‘내가 상대의 행동에 이렇게 반응하고 있구나’ 하고
내가 지금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가 화를 내면
나도 따라 화내는 것이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자동적인 반응을 멈추려면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가 화를 낼 때,
나는 화를 낼 수도 있고,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상대가 화내는 것을 보고
‘너 왜 화내니?’ 하고 반응합니다.
상대방이 화내는 것을 보고 내가 벌컥 화를 내고,
그러고 나서 상대가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물으면
‘네가 화를 내니까 내가 화를 내지!’ 하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화내는 것은 정당하고
상대방이 화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 자신의 반응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처럼
의도를 가지려 하지 말고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내가 화가 나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내가 기분이 좋네’
이렇게 알아차리면
상대의 말에 내가 덜 휘둘릴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카르마가 그 말에 희로애락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나라는 사람의 업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업식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상대가 그렇게 말하면 화가 자동으로 일어났지만
나 자신의 반응을 먼저 알아차리게 되면
상대가 같은 말을 하더라도 내
가 거기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느냐 안 내느냐가 핵심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신을 사랑한다’ 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거나, 타인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은 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눈을 밖으로만 돌리지 말고,
자기를 살피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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