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정토불교대학 수업에서 ‘무아(無我)’는 인연에 따른 역할일 뿐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역할이 나 자신은 아니지만,
알아차리는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고 배웠는데
뉴스를 보면 사실이기에 슬픈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사실을 외면하고 싶기도 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조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 무아(無我)는 역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작용은 있지만 그 작용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떠올려 봅시다.
차가 움직이기도 하고, 빵빵 소리를 내기도 하고, 불도 반짝입니다.
그런데 자동차에 ‘바로 이것이 자동차다’ 하는 실체가 있느냐고 생각해 보면
그러한 작용들만 있을 뿐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
같은 종류의 자동차 두 대가 있고,
이 두 대의 차를 각각 A, B라고 합시다.
만약 A 자동차에 A라고 할만한 어떤 실체가 있고,
B 자동차에 B라고 할만한 어떤 실체가 있다면
A 자동차는 영원히 A여야 하고,
B 자동차는 영원히 B여야 합니다.
그런데 A 자동차에서 문을 떼서 B 자동차와 교체하고
바퀴를 떼서 B 자동차와 교체를 하고
이렇게 부품을 하나씩 교체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부품을 다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A 자동차와 B 자동차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A 자동차가 A이고, B 자동차가 B라고 인식합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는 매일 바뀝니다.
한 달이 지나면 지금 내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전부 새로운 세포로 바뀐 상태가 됩니다.
기존의 세포는
피부의 때가 되어 떨어지든, 용변을 통해 나오든 해서
몸에서 빠져나가고,
그동안 우리가 먹은 음식이 그 세포들을 대체해서 다시 몸을 유지하게 됩니다.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는데도
그 모양이 예전과 같으니까 몸이 그대로인 것처럼 인식하지만
육신의 세포만 따지면
한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바뀐 상태인데도
각 세포의 역할이나 작용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작용을 보고
우리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어떤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저를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스스로를 스님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쉽지만
만약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는 나를 스님이라고 할까요, 아들이라고 할까요?
아들이라고 하겠죠.
만약 결혼을 했다면 아내는 저를 스님이라고 할까요, 남편이라고 할까요?”
남편이라고 하겠죠.
여러분도 학교에 가면 학부모라고 불리고, 집
에 가면 아내라고 불리고
아이를 만나면 엄마라고 불리고
엄마를 만나면 딸이라고 불립니다.
택시를 타면 승객이라고 불리고
절에 가면 신도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이 중 어떤 게 나인가 하면,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닙니다.
동시에 상황에 따라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연에 따라 그 무엇도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무아(無我)의 관점입니다.
즉 무아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아(無我)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이다’ 하고 정해져 있는 건 없지만
인연을 따라서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생명의 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토마토라고 하면 늘 토마토였습니다.
즉, 토마토를 심으면 토마토가 나오고
그 토마토를 심으면 또 토마토가 나왔습니다.
토마토를 심을 때 거기서 감자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자(種子)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죠.
여기서 종자라는 말이 곧 실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유전자라는 게 결국 설계도입니다.
설계도에 따라 물질이 조합을 이뤄서 토마토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설계도를 변형하면 품종이 바뀝니다.
이걸 변이(變異)라고 합니다.
이처럼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면
줄기에서는 토마토가 열리게 하고
뿌리에서는 감자가 열리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토마토는 영원히 토마토여야 하고
감자는 영원히 감자여야 하는데
이러한 종은 토마토도 아니고 감자도 아닌 새로운 종입니다.
동시에 토마토이기도 하고 감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토감’이나 ‘감토’로 지을 수도 있겠죠.
이처럼 생명 현상을 봐도
토마토라는 작용은 있지만
이것이 토마토라고 할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현상에서 작용하는 것만 보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작용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 현상을 분석해서 들어가 보면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정신 작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지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인지하는 것입니다.
인지하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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