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02:46]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며, 집착을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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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에 대한 법문을 여러 차례 들으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특히 죽음도 삶의 한 과정으로 보라는 스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상황과 마주하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아픈 사람이 낫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고 스스로 괴로움에 빠집니다.
수행적 관점에서 제가 무엇을 놓쳤는지 궁금합니다.
또 얼마나 수행해야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지도 궁금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요?//
작은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섭섭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분석해 보면
꼭 물건을 잃어버려서 섭섭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물건에 집착하던 마음에서 반작용이 일어난 거예요.
예를 들어
여기에 물이 있어요.
이쪽에 있는 물을 저쪽으로 옮기면 원래 물이 있던 자리가 비겠죠?
시간이 지나면서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물이 다시 빈자리를 채웁니다.
물이 다시 채워지기까지는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지만
채워지고 나면 허전함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집착하는 마음이 클수록
빈자리가 더 넓게 느껴지고
다시 채우는데도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 시간 동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이게 심해지면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마치 병의 양상이 처음에 가벼운 감기 증상으로 시작했다가
폐렴으로 발전해 중병이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허전한 마음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사라집니다.
빈자리에 물이 다시 채워지듯이 자연스럽게 해결돼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섭섭한 감정이 그대로 이거나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사람과 이별하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표면적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에요.
내가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서 고통의 크기와 길이가 달라지는 거예요.
만약에 긴 시간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렵다면
이것은 정신질환에 속합니다.
또 정신적으로 약한 고리가 있으면
작은 충격에도 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열녀나 효자로 표현했지만
현대 의학에서는 정신질환으로 봅니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마음이 치우치면 [편집적 증상]이 일어납니다.
수행적인 용어로는 [사로잡혔다]라고 표현합니다.
사로잡힘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게 바로 [자살]입니다.
물건 하나를 잃어버려도 섭섭한 게 사람의 마음인데 하물며
부모, 자식, 배우자와 같이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그 고통이 큰 것은 당연합니다.
많이 사랑했던 관계일수록 고통이 더 큽니다.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의 강도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
원수를 만나는 고통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만나서 앙갚음을 당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생. 로. 병. 사 4가지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더해서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팔고 중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 다음으로 등장하는 고통이
애별리고(愛別離苦)입니다.
원수와 함께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도 크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그만큼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전생(前生), 내생(來生), 윤회(輪廻)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괴로운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전생에 원수였던 두 사람이
서로 죽이는 것만으로는 원수를 다 못 갚을 만큼 원한이 깊다고 가정해 봅시다.
다음 생에 두 사람이 부모와 자식 관계로 다시 만났어요.
함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죽어버렸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귀한 자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면 부모는 어떨까요?
평생을 고통 속에서 헤매겠죠.
이것이 전생에 사무친 원수를 갚는 방법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만큼 애별리고(愛別離苦)로 인한 고통이 커서
어떤 위로로도 소용이 없기에 나온
마지막 처방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또, 돈을 떼여서 괴로운 사람에게
‘전생에 그 사람한테 돈을 빌렸기 때문에
현생에서 그 빚을 갚는 거다’라고 생각하게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고요.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점입니다.
쓸데없는 말이라고 부정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이라고 곧이곧대로 믿어서도 안 됩니다.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소위 [사이비]라고 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들에서
이런 위로의 언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왜곡됩니다.
그래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혹세무민 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생(來生)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생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끔 고안해 낸
아이디어입니다.
이번 생이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이 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슬프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갔다는 위로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말하는 윤회(輪廻)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죽어서 아무리 좋은 곳에 가더라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과
다시 돌아와 만날 수 있다는 것에는
위로의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회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좋은 위로가 되어서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에게 퍼져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내생이나 윤회의 개념을 곧잘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 생에 만나자’라든지
‘다음 생에 갚겠다’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헤어짐은 어쩔 수 없지만
다시 만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위안으로 삼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진짜라고 하면 부작용이 발생하고
가짜라고 하면 위로가 되는 좋은 방법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중요하게 논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불교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죽은 뒤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생, 내생, 윤회와 같은 이야기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지는 괴로움, 슬픔, 두려움에서 비롯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괴로움이 사라지고 열반에 이르면
삶과 죽음을 그저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수행하고
또 얼마나 힘을 쏟을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즉시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수행에 많은 힘을 쏟아도
괴로움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괴로움이 결국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의식에서는
괴로움이 집착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생각으로 집착임을 알아도
현실에서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집착을 놓아야 합니다.
...
어떤 수행이 더 도움이 되는지를 찾는 이유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결과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적은 노력으로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을 찾는 것과도 같아요.
마치 주식 투자를 할지, 금을 살지, 코인을 살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장보살을 부를지, 관세음보살을 부를지, 절에 다닐지, 교회에 다닐지를 고민하는 것도 똑같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수행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사로잡혀서 붙잡고 있는 집착을 놓아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염불 하든, 참선하든, 문득 깨닫고 그냥 놓아버리든
그저 집착을 놓으면 해결되는 일이에요.
그러나 무엇을 하더라도 집착을 놓지 못한다면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어떤 특정한 수행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행을 기술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1+1= 2라는 논리로 바라보는 데서 생긴 착오입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명상하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우주의 티끌 한 개의 수명보다도 적은 인간의 수명이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우주적인 시각에서
100년 남짓 하는 인간의 수명은 찰나와 같습니다.
찰나의 4분의 1이나, 찰나의 2분의 1이나
똑같은 찰나일 뿐입니다.
하루살이가 오후 4시에 죽든, 밤 10시에 죽든
사람의 시간에서 보면
결국 하루일 뿐인 것과 같습니다.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지구에 사람이 한 명 태어난다고 해서
지구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 한 명이 죽는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의 총량은 그대로입니다.
유전자의 조립으로 생명이 되었다가 해체되었다가 하는 과정이
반복될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파도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보면,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고, 크게 일어나고 작게 일어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즉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이
그저 물결이 출렁일 뿐입니다.
시야를 넓혀 크게 보고,
한 가지에 사로잡힌 마음을 알아차리고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죽었다’ 하며
집착하는 마음을 붙들고 있으면
어떤 수행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조차도 해결해 줄 수가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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