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요? (2025.02.09.)

Buddhastudy 2025. 2. 13. 20:22

 

 

저는 최근에 행복해지려면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의 정확한 의미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 범위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상사한테 심하게 잔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저 사람이 뭐라고 해도 아무 문제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건가요?

제 주변에는 큰 실수를 했다거나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남들이 비난하든 말든 괜찮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존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자존감인지 궁금합니다//

 

 

보통 진정한이런 말이 붙으면 대부분 거짓말이에요.

진정한이런 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사실을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착각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컵이 있고, 컵받침이 있고, 시계가 있습니다.

이 컵과 비교했을 때 이 컵받침은 컵보다 커요, 작아요?

 

(작습니다.)

 

그럼 이 시계하고 비교할 때 이 컵받침은 시계보다 커요, 작아요?

 

(큽니다.)

 

질문자는 이 컵받침은 한 번은 크다고 했고,

한 번은 작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 컵받침은 큰 거예요, 작은 거예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이게 큰지 작은지 몰라요?

 

(작은 것 같습니다.)

 

이게 크냐 작으냐 하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합니다.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크다는 것을 내가 인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게 객관적으로 작아서 내가 작다고 인지했다고 생각해요.

둘 다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작은 걸 크다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저 사람은 큰 걸 작다고 말해?’

이렇게 서로 싸우듯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맞으니 틀리니, 크니 작으니 하면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관찰하면

이 컵받침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크다, 작다는 것은 이 컵받침에서 오는 게 아니고,

인식 기관이 인식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컵받침이 컵과 같이 있을 때는 작다고 인식하고,

시계와 비교할 때는 크다고 인식을 하는 겁니다.

인식을 할 때 이게 크기 때문에 크다’, ‘이게 작기 때문에 작다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크다’, ‘작다하고 말할 때는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맞으니 틀리니, 싸니 비싸니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인식 상에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크다고 하고, 한 사람은 작다고 한다면,

누가 맞느냐가 아니고 두 사람의 인식이 다른 거예요.

한 사람은 신이 있다고 하고,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할 때,

누구 말이 맞느냐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믿음이 다를 뿐이에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걸 두고도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싸다고 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물건은 새것이네하는 사람도 있고,

이 물건은 헌것이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그럼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존재는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존재는 아름답거나 추한 것도 없고, 크거나 작은 것도 없고,

잘하고 못 하는 것도 없어요.

존재는 존재일 뿐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공하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공하다는 말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그 존재에 크거나 작거나 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러움과 깨끗함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존재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인식할 때는

이것을 크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작다고 인식할 때도 있어요.

값이 비싸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값이 싸다고 인식할 때도 있어요.

깨끗하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더럽다고 인식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수만 가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입니다.

 

내가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열등하다는 것은 인식 상의 문제예요.

누구와 비교해서 그렇게 인식이 된 것입니다.

반에서 5등 하는 아이가 나는 공부 잘한다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10등 하는 아이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부 못 한다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1등 하는 아이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만나는 친구는

좀 잘 산다 해도 1억 정도를 가진 수준이에요.

그때 내 꿈은 나도 1억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겠죠.

그런데 1억의 돈을 갖게 된다고 끝이 날까요?

안 끝나요.

 

1억쯤 가지게 되면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 10억 가진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럼 그 사람이 다시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럼 나도 10억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1억이 있을 때는 100억 가진 사람이나 1000억 가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아예 만날 생각조차 못 했는데,

10억을 가지게 되면 100억 가진 사람을 소개받거나 우연히 만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나이가 60이 되면

이제 뭘 새로 시작하기에는 늙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이나 80이 넘는 사람을 만나면,

저보고 아직 한창이네하고 말합니다.

 

제가 교류하는 사회 원로들은 나이가 저보다 많아도

늘 친구처럼 지내요.

그러다가 가끔 법륜스님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하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70입니다하고 대답하면

아이고, 아직 한창이네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본래 나이가 많다 적다 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동남아시아에서는 엄청나게 신비화되어 있어요.

동남아시아 스님들은 옛날 우리들처럼

나이 60만 되어도 노장 대우를 받고

옆에서 행자들이 부축을 하고 다니는데

나이 70이 된 제가 막 뛰어다니니 대단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전부 비교에서 나온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인식 상의 문제로 인해 우리는

내가 열등하다’, ‘내가 우월하다’, ‘내가 잘났다’, ‘내가 못났다하는

허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겁니다.

열등하다는 허상만이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났다고 하는 우월감도 굉장한 고통을 가지고 옵니다.

 

나는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이것을 자각하면 남이 크다고 하든, 작다고 하든,

깨끗하다고 하든, 더럽다고 하든,

그냥 저 사람의 인식이 그렇구나하게 됩니다.

과거의 습관으로 인해 처음에는 약간 기분이 나쁠 수가 있지만

지나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이렇게 자기 존재에 대해 긍정성을 갖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모든 존재에 대해서 서로 다르다고 하는 관점으로 봐야지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보면 안 돼요.

이것을 두고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서로 다르고,

생각이 서로 다르고,

가치관이 서로 다르고,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겁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만이 사실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식하면 화날 일이 없어요.

서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지 조율을 하면 됩니다.

조율하는 방법 중에 제일 쉬운 방법이

상대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하고

내가 입장을 정리하면 끝입니다.

 

예를 들어,

방 안의 온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아내는 춥다고 하고, 남편은 덥다고 합니다.

이때 내가 상대에게 맞추는 게 제일 쉽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와 의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하고 말한 후

나는 더우면 옷을 벗으면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이 방법이 가장 어렵습니다.

상대가 쉽게 동의를 안 해줘요.

제일 쉬운 것이 내가 맞추는 것이고,

제일 어려운 것이 상대가 나에게 맞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통 힘이 있거나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야

상대가 나에게 강제로 맞추도록 할 수가 있죠.

 

세 번째 방법이 합의하는 겁니다.

방 안의 온도를 중간으로 맞추자고 서로 합의를 하는 거예요.

보통은 이렇게 합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요.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두 사람이 조율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안 되면,

각자 따로 자는 방법도 있어요.

이렇게 하나의 해결책이 아니라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신을 믿지만 상대는 신을 믿지 않는다면

상대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을 믿지 않을 뿐이에요.

신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신을 안 믿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라는 말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의미예요.

 

둘째,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상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그것을 안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에요.

내가 좋다고 상대를 껴안으면 성추행이 되잖아요.

물론 본인은 변명거리가 있어요.

내가 너를 때렸니?’, ‘내가 너의 물건을 훔쳤니?’,

난 너를 좋아한 죄밖에 더 있니?’

이런 태도는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은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야라며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내버려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를 이해하게 되면

아이에게 내 생각에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하고

얘기해 줄 수가 있게 됩니다.

평화의 바탕은 인정과 이해입니다.

인정과 이해 없는 사랑은 다 허구입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먼저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자신에게

인물이 잘생겼다고 하면 우월감을 갖게 되고,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하면 어깨에 힘을 주게 됩니다.

그러다가 돈을 잃어버리거나 지위가 떨어지면 한풀 꺾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나를 삼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에요.

이것이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법입니다.

 

만약 내가 돈이 100만 원이 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나 이 100만 원으로 배고픈 아이들 100명에게 밥을 사주게 되면

아이들이 먹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훌륭할까?’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둘 다 자기 선택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어떤 선택이 자기 존재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게 해 줄까요?

후자가 더 뿌듯합니다.

세상의 필요한 일에

내가 쓰일 때 나의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내가 누구에게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하고 구걸해서 뭔가를 얻으면,

그때 잠깐은 기쁘지만

나에게 준 사람 앞에서는 항상 기를 펴지 못해요.

여러분들은 늘 이해받고 사랑받으며 도움 받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항상 심리가 비굴해집니다.

여러분들이 늘 누구를 만나든

조금씩이라도 베풀고, 상대를 이해하고 도와주면,

육체적으로는 약간 힘들지 몰라도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우리가 방을 빗자루로 쓸다가

더 이상 빗자루로 방이 잘 쓸리지 않으면

빗자루의 명이 다 됐다하고 버리잖아요.

 

사람은 쓸모가 있어야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쓸모가 있어야 해요.

아내가 남편이 필요해서 쓰려고 하는데 안 쓰이면 어떻게 해요?

빗자루를 버리듯이 버려야 해요.

남편이 아내를 쓰려고 하는데

아내가 안 쓰이면 버리게 됩니다.

 

육체적 생명은 육체가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회적 생명은

쓸모가 있을 때 생명이 있다고 하고

쓸모가 없으면 생명이 다 됐다고 합니다.

 

쓸모가 있을 때 자존감이 생기고,

쓸모가 없으면 자존감이 없어지는 거예요.

자존감이 높아지려면

구걸하는 인생을 살지 마세요.

받을 때는 약간 기분이 좋지만,

구걸하면 늘 심리가 위축이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