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6년 전에 근무한 중학교에서
학생 한 명이 왕따를 당해
가방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살한 학생의 학우였던 아이들을 제가 계속 가르치면서
졸업까지 시켰는데
졸업식을 할 때도 그 학생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제가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금강경도 꾸준하게 읽고, 등산도 자주 다니며, 마음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닦아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고, 잊을만하면 자살한 학생이 생각나곤 합니다.
앞으로 교직 생활을 계속 이어가려면
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질문자는 좋게 말하면 연민이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트라우마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이 상처가 되어서 그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고 가슴이 아파지는 겁니다.
슬픈 마음을 연민이나 자비심으로 볼 게 아니라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차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죽은 학생을 기억하거나 마음을 아파한다고 해서
죽은 학생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에게 고통만 따르게 됩니다.
이 트라우마를 치료하려면
이 경험을 한 차원 높게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아이들을 항상 잘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정신적 어려움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하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아이들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살펴도
사고는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최대한 적게 나오기 위해서는
항상 아이들의 심리가 어떠한지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질문자가 그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가르치게 될 아이들이 친구들과 학교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리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면
한 아이의 죽음이
여러 아이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잠깐의 실수와 방심으로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혼자 아픔을 삭이는 것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실수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는 길은
괴로워만 하거나, 절이나 기도를 해서 반성하는 게 아니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낙태를 하고 나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어떤 스님이 ‘당신의 아이가 지금 울고 있으니
천도재를 지내서 달래주어야 합니다’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저는
‘낙태한 것을 정말 참회한다면
이 세상에 아이를 낳고도 못 키우는 수많은 부모들을 돕는 관점을 가지세요’ 하고 얘기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갖게 되면 내가 한순간의 실수로 한 아이를 잃었지만
열 명의 아이를 살리는 것이 됩니다.
한 아이를 잃어 지옥에 갈 죄를 지었다면
열 명의 아이를 살려서 천국에 갈 복을 짓는 것이
자신의 죄책감과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거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죽은 내 아이를 위한 천도재에 천만 원을 쓰는 것보다는
열 명의 아이를 살리는데
매달 일정 금액을 보시해서 10년 동안 천만 원을 쓰는 것이
괴로움을 승화시키는데 훨씬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잘못을 하는 게 꼭 잘못된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잘못을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잘못을 통해 부족한 줄 알고 겸손해져야
어려운 사람들과 소통도 하게 되고
그들을 돕는 마음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읽는 것보다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을 더 살피고 자주 상담해 주는 것이
트라우마를 치료하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땅에서 넘어지면 땅을 딛고 일어나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넘어지면 앉아서 울지 말고 일어나서
다시 길을 가는 자세가 필요해요.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모든 인류 문명의 발전은
실패와 실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냥 버섯을 보자마자
'독버섯이구나' 하고 바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독버섯을 먹고 누군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독버섯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실패와 실수를 딛고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해 온 거예요.
수많은 교통사고를 통해 얻은 사례와 자료를 통해
신호등은 어떻게 만들고, 교통 체계는 어떻게 세우고
도로는 어떻게 만들어야 안전한지 알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죄악시하거나 처벌 위주로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잘못하여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 딛고 일어나서 실수를 교훈으로 삼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한 교사의 죽음이 많은 교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 아픔은 슬픔과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현직으로 일하는 교사들 중에도
심리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학부형들이 와서 행패를 피우면 엄청난 상처를 입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미연에 발견하고 치료해서
또 다른 사고를 방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생을 먼저 마감한 교사를 위해 애도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분노하기보다는
이런 아픈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좋고 교사에게도 좋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과거에 수없이 많은 교사들이 죽음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다 개인 문제라고 여기고 어영부영 지나갔는데,
이제는 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제도적으로도 보완이 필요한 문제로 밝혀지게 된 겁니다.
정치인들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맞지만
자칫 정파적으로 흘러가 버리면
다시 논쟁이 될 여지가 높습니다.
세월호 사고를 통해
대한민국의 안전 불감증 문제가 대두되었고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정치적 쟁점이 되어 찬반 문제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안전 불감증은
변화의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잖아요.
그것처럼 지금 일어난 교권 문제가
지나치게 정치 쟁점화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문제는 항상 이 방향 또는 저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지나치게 정치 쟁점화가 되면
도덕성이 희석됩니다.
단죄는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단죄보다는 그것을 승화시켜서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점을 두면 좋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내 주장은 옳고, 상대 주장은 틀리다’
이렇게만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진보가 아니에요.
진보란 과거의 역사를 토대로
현재의 조건에 맞게끔 과제들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보수는 가능하면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진보는 변화에 더 초점을 두는 것이에요.
진보와 보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도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종교에 의지하면 심리적 위로는 되지만
대부분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폐단이 있습니다.
개인이 잘못한 것은 반성해서 개선하면 되지만
사회는 승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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