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들은 경계성 장애였습니다.
작업 중 사고로 40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히 보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들이 경계성 장애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하면
이해가 되는데
그건 과거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이제 지금은 아들도 어쨌든 아쉽지만은 돌아가시고
지금은 문제가 아무것도 없잖아요.
근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지금 괴롭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 내면의 문제일까요? 바깥의 문제일까요?
그러면 과거의 어떤 상처가
지금 나에게 계속 영향을 준다, 그러면
이거는 질환에 속하는 거예요.
정신 질환에 속한다.
이걸 갖다가 트라우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간단한 거예요.
트라우마를 치료하면 돼요.
혼자서 자가 치료하는 게 수행이에요.
그다음에 혼자서 안 되면 병원에 가서
전문의의 도움을 얻어서 치료를 하면 되기 때문에
이건 아무런 큰 걱정거리도 아니다, 이런 얘기예요.
근본적인 치료법은
이거는 어젯밤에 내가 악몽을 꾼 것과 똑같다, 이거야.
지나간 일이라는 것은
어젯밤에 악문과 똑같다는 거예요.
꿈을 깨면 그건 없잖아요.
근데 꿈을 깨고 나서
저녁에 악몽을 계속 생각하는 거와 같다는 거야.
지금 자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어떤 옛날 일을 가지고 계속 괴로워한다면
악몽을 꾸고 일어난 사람이
계속 그 악몽을 갖고 문제를 삼는다면
이 사람은 아직 꿈에서 덜 깬 사람이다, 이거야.
잠에서 깼으면
그게 무슨 악몽이었던
“아, 꿈이었네” 이러고 끝나야 된단 말이야.
그냥 지나가 버린 일이야.
지나가 버린 일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아이가 그런 장애를 입은 거는
자기가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그럴 수도 있고
어떤 유전적인 요소가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많은 요인 중에
자기가 아기를 밴 엄마가 심리적 불안도 그 요인 중에 하나일 수 있지.
“내가 그 요인을 제공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첫째.
두 번째 그런 요인이 있었든 없었든 아이가 태어났으면
그런 장애를 갖고 있으면
그것이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도
장애가 없는 사람처럼 똑같이 살기를 바라는 건
자기 욕심이라는 거예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부모가 보기에 안타깝지만은
40까지 살았다면
평균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때는 잘 살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떻게 기도를 해줘야 되나
“아이고 다음 생이 있는지, 저 세상에 있는지, 그건 모르지만은
병을 안고 어렵게 살았는데
이제 모든 걸 다 놓고 편안히 지내라.
저 세상이 있다면 저 세상에 가서는 그런 병 없이 잘 살아라.”
이렇게 마음에서 집착을 놓는 게 떠나보내는 거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에 집착을 놓으면
죽은 아들에게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일인데
이걸 잡고 있으면 둘 다 나쁜 상황이 된다.
그럼 이건 뭐냐?
애정도 아니고, 어리석음이다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런 얘기예요.
자기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자기가 부처님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기 때문에
아들의 마음을 다 헤아린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보통 사람은.
아들의 마음이 좀 되어 줬다가
성질나면 성질 좀 냈다가
이게 보통 사람이야.
그리고 남편도 이런 정신질환은
겉에 육신이 멀쩡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엄마니까 조금 더 이해를 많이 하는 편이지
자기도 완전히 이해 못 한 거고
남편은 더더욱 더 이해를 못 한다.
그냥 그저 “저게 왜 저러냐? 정신만 좀 차리면 되는데
저 자식 저거 말이야 문제다”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남편이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남편이 무슨 수행하는 스님도 아니고
남편이 보이지 않는 정신 질환을 어떻게 알겠어요?
겉이 멀쩡하면
“자꾸 문제아다, 정신 차려라” 이렇게밖에 얘기 안 한다.
지금 오늘 우리 사회 전체가 그래요.
그러니까 이거는 남편의 잘못도 아니에요.
남편은 잘못했다기보다
남편이 좀 어리석지, 무지하지.
진실을 모르니까.
그럼 모르는 그 사람을 탓하면 뭐 하겠어요, 모르는 거를.
그러니까 이것은 남편을 탓할 일도 아니다.
“아이는 장애가 있지만은
사는 데까지 살다가 잘 갔다.
이제 편안히 있어라” 이렇게 하고
자기도 그런 아이 키운다고 힘들었는데
이제 남은 인생을, 자기 인생을 위해서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법문을 듣고
“아, 내가 지나간 일, 그 꿈속의 일을 갖고 시비를 했구나.
꿈에서 깨자”
이렇게 탁 깨나지면
치유가 오늘 당장 되는 거고
그게 법문 들어도 안 되고
내일 또 자고 일어나면 또 그 생각이 나고, 이러면
어디로 가야 된다고?
병원으로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고, 진료를 받고, 상담 치료도 받고, 약물 치료도 받고
이러면 훨씬 좋아집니다.
어떻게, 단박에 탁 깨났나? 안 깨어났나?
...
근데 공부라는 거는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건 공부가 아니에요.
지금 대화 중에
“아, 스님 내가 꿈속을 찾아 헤맸습니다.
네 꿈 깼습니다.”
이렇게 딱 이 자리에서 끝이 나버려야지.
“아 알았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건 수행이 아니에요.
그건 세상일을 열심히 해야지
수행은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수행은 딱 그냥 불을 탁 비추면 보이는 거지
“불을 열심히 비추겠습니다.”
이런 말은 필요가 없어.
불은 딱 켜든지 끄든지 이렇지.
“제가 불을 열심히 켤게요.”
열심히 켜겠다는 말은
아직 안 켰다는 얘기예요.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탁
“아, 꿈이었구나” 이러고
탁 이 자리에서 켜지면 다행이고
안 켜지면 병원에 가야 된다, 이 말이야.
알았죠?
“앞으로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열심히 해요.
‘열심히’는 수행이 아니에요.
그건 세상 일이지.
열심히 하는 거는.
다만 바로 탁 안 깨어나고 또 놓치고, 또 놓치고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꾸준히 해라, 지속적으로 해라”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은
“열심히 해라” 이런 말은 안 해요.
열심히 하면 힘이 들어요? 안 들어요?
힘이 들어 힘드는 거는 수행이 아니에요.
수행은 모든 스트레스, 힘듦으로부터 놓여나는 게 수행이에요.
근데 여러분들은
명상도 막 이를 악다물고 힘들게 하고
수행도 막 이를 악다물고 힘들게 하고
참고 견디고.
그거 안 참는 것보단 나아요.
근데 그거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지는
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길이 아니다.
각오하고 결심하고 막 애쓰고 노력하고
그러면 자꾸 인생이 힘들어져요.
돈 벌 때는 그렇게 좀 하면 돈이 좀 벌릴지 몰라요.
그런데 수행은 그런 게 아니다.
수행은 바로 껌껌한 밤에 불을 탁 켜듯이
자기 마음에 불을 딱 비춰보니
“아, 내가 지나간 일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즉시 그냥
“아, 내가 지나간 일에 사람 잡혀 있네”
스님하고 얘기하다 보니까
“알았습니다.”
이러면 탁 끝나버리는 이런 공부를 해야 돼.
...
맨날 살아가겠다 가겠다 가겠다
결심, 각오.
결심, 각오하면 인생이 무거운데
얼마나 살 거라고
그렇게 결심하고, 각오하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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