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5)

[법륜스님 즉문즉설 1147회] 욕망은 욕망인줄 알아차리면 된다

Buddhastudy 2015. 12. 28. 19:59

 

 

 

우리가 이러잖아. ‘남편이 잘못하고 나는 바르다하는 것이 잘못되었어. ‘내가 잘못되었고, 남편이 잘했다.’ 이런 건 이거나 그거나 사실은 50보 백보야. 현상에서 보면 정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정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똑같은 원리야. 결국은 잘하고 잘못한 게 있다. 이 얘기란 말이야. 으흠.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이 중도를 발견하실 때, 욕망에 따라가는 걸 쾌락이라고 그러잖아. 그지? 그래서 욕망이 따라가면 안 된다 해서 부처님이 욕망을 억압했잖아.

 

욕망을 억압하는 걸, 억제하는 걸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에 따라가면 흥분이 되지. 욕망을 억제하면 뭐가 된다? 마음이 긴장이 되지. 그러잖아. 그럴 때 부처님이 6년간 하시다가 , 이게 아니구나.”하고 발견한 거는 욕망이라는 게 있고, 욕망에 대응하는 방식이 하나는 따라가는 거고, 하나는 억제하는 거잖아. 그러면 둘 다 욕망에 매어 있잖아. 욕망에 대한 작용이잖아. 욕망에 대한 작용이 따라가느냐? 억제하느냐?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의 문제 아니야.

 

아까 저기 이 편들까? 저 편들까?’ 아니야. 그러니까 욕망에 대해서 반응을 안 하는 거야. 안한다는 건 뭐야? 따라간다는 거야? 안 따라 간다는 거야? 안 따라간다는 거야. 억제 한다는 거야? 안한다는 거야? 그것도 안한다는 거야.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리고, 알아차린다. 즉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린다는 걸 다른 말로 하면 지켜본다. 이거야. 으흠. 그러니까 이런 것도 문제요. 공부를 잘못하면, 불교 공부를 많이 해서 온갖 지식을 쌓은 거 같은데, 몇 가지 얘기를 해보면 관점을 잘못잡고 있는 거요.

 

그래서 늘 이렇게 불교 아닌 걸 불교라고 주장을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거요. 관점을 잘못 잡으면 공부를 해도 진척이 별로 안 일어나. 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으흠. 그래서 우리가 명상 수련을 할 때 마다 다만 호흡을 뭐한다? 알아차린다. 들숨을 알아차리고 날숨을 알아차린다. 다리에 통증이 있을 때 펴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 따라서 펴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이를 악다물고 참지도 않는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펴든지 참든지 둘 밖에 없잖아. 펴야 되나? 참아야 되나? 이건 욕망의 반응을 일으킨 거야. 다만 통증을 통증인 줄 알아차린다. 통증이구나. 통증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지 말고, 그런데 그게 현실에선 안 돼. 말은 이렇게 되지만, 현실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연습을 하는 거요. 자꾸 우리는 이쪽으로 갔다. 이쪽으로 갔다. 이쪽으로 갔다. 이쪽으로 갔다. 둘 중에 하나 밖에 안 되니까. 그래서 연습을 칼날에 서면 이쪽을 넘어지고, 이쪽으로 하면 이쪽으로 넘어지고 균형을 못 잡다가 일정하게 연습을 하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칼날 위에 서듯이 균형을 잡을 수가 있다. 이게 중도란 말이야.

 

그러니까 잘잘못이 없는 가운데, 우리는 잘잘못을 만들어서 미워하는 이 허상에서 벗어나자는 거요. 내가 무슨 죄인이다. 이런 얘기가 아니야. 다만 그런 과보로, 어리석어서 해도 이미 그렇게 내가 상대를 미워하고, 또 상대도 그것 때문에 반응이 왔으니까, 과보는 남아. 내가 모르고 밟아도 개미가 죽으면 과보는 남는다 이런 얘기야. 과보가 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보마저도 달게 받아줘야 돼. 돈을 빌렸으면 갚을 생각을 해야지, ‘부처님한테 싹싹 빌어서 안 갚고 넘어가는 길이 없을까?’ 이런 생각하면 어리석어.

 

복은 안 지어놓고 싹싹 빌면 복 좀 줄까? 이건 인과법에 어긋나. 그러니까 복을 지어야 복을 받는다는 인과법을 알면 그 다음엔 내 선택이야. 복 짓기 싫으면 받을 생각을 안 하면 되고, 복 받고 싶으면 뭐하면 된다? 복을 지으면 돼. 돈을 빌렸으면 돈을 갚아야 돼. 그런데 갚기 싫으면 돈을 안 빌리면 되고, 빌렸으면 뭐해야 된다? 기꺼이 갚아야 돼. 이게 내 선택이야. 불법은 내 선택이 탁 주어지는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돈은 빌려놓고 안 갚겠다. 복도 안 지어놓고 복은 받겠다. 이러면 빌어야 돼. 부처님께. 이렇게 해달라고. 그러면 자꾸 매이는 거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과거에 어리석어서 저질렀던 거는 앞으로 기꺼이 받아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안 받으려고 그래. 안 받으려고 그래도 와. 그러니 괴롭지. “, 내가 이렇게 살아놓으니 애들이 이렇게 인연이, 내가 이렇게 지어놓으니 애들이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반응하구나.”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내가 지어놓은 과보보다는 덜해. 요즘 수행하다보니. 거기에는 공부는 못하지만 학교 안가는 거는 아니잖아. 학교 가는 것만 해도 고맙다. , 공부 못하는 거 갖고 시비하는 거는 딴 집 애는 내가 지은 거로 따지면 학교 안가는 땡깡을 피워야 이게 맞는데, 학교라도 가주니 고맙다. 이러니까 어차피 공부 못하는 내 아이인데, 인과를 딱 알면 아이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자기 아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이 일어나고, 자기 인과를 모르면 인연을 모르면 과보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니까, 딴 애는 조금만 잘하면 아까 저 집에 얘기하듯이 조금만 잘하면 10등 할 텐데.” 어느 엄마가 그러고 싶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 학교 다녀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 준 것만 해줘도 고맙다. 내가 고맙다 그런다고 공부 안하고, 조금만 더 잘하면 그러면 할까? 그렇지 않아. 술 먹으란다고 남편이 먹고, 먹지 마란다고 남편이 안 먹고 그럴까? 그 인간은 먹어라 하나 안 먹어라 하나 먹는 양은 비슷한데, 여러분이 시댁에도 마찬가지요. 남편이 시댁에서 50만원 주겠다면 내가 막 싸워봐야, 그 인간이 안주나, 겨우 내가 싸워서 깎아봐야 10만원 깎기가 쉽지가 않아. 몰래줘도 나 모르게 줘.

 

그런데 100만원 주자, 50만원주자, 내가 100만원 주자고 서둘러도 그 인간 100만원 안 줘. 내가 주자하면 10만원 더 줄 수도 있고, 주지 말자하면 10만 덜 줄 수는 있지만, 크게 차이가 없어. 그럴 바에 이왕지 인심 쓰는 게 낫잖아. 그래서 시댁문제는 항상 남편의 주장보다 더 주자고 주장하는 게 유리해. 지혜로운 여자란 말이야. 어리석은 여자라면 그걸 10만원 갖고 싸우다 깎지도 못하고, 결국 싸움만 일어나고 나쁜 며느리 되고 그래.

 

그런데 더 주자고 자꾸 주장하면 이 인간이 줄 인간도, 더 줄 인간도 아니고, 결국은 시댁에서 좋은 며느리 소리 듣고, 남편도 지 부모 마누라가 좋게 생각해주니 기분 좋고, 그래서 결국은 부 수입은 나한테 생기는 거요. 예를 든다면. 어느 쪽이든 그래. 인생은 너무 그렇게 계산한다고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야. 내가 조금 크게 보고, 길게 보고, 인생을 살아야지, 너무 하루하루 보고 살면 피곤해. 그러니까 조금 그렇게 정진을 해봅니다.

 

여러분들 하루하루 보면 어때요? 봄이 지금 오고 있으니까 나날이 따뜻해져야 되는데 현실은 나날이 따뜻하나? 아니지. 추웠다 더웠다 이러는데, 예를 들면 한 달 뒤만 보면 확실히 따뜻한 건 확신할 수 있죠. 그럼 수행을 하면 좋아져. 그런데 나날이 좋아지는 거는 아니야. 백일 후를 보거나, 천일 후를 보면 분명히 좋아져. 그러나 하루하루를 보면 기도하고 나서 더 화가 더 나고, 더 일이 안되고, 더 우환이 더 생기고. 사업이 망하고 이런 일도 생겨.

 

그 기도해서 생기냐? 아니오. 그건 지난해 어리석었던 과보가 이제 닥쳐서 그래. 그러니까 지금 짓는 인연하고 관계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꾸준히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