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有, 無, 空의 화두를 잡아라
1) 제1원인과 有, 無, 空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한가할 때면 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어지럽히던 문제가 있었다.
‘우주가 끝이 있으냐 없느냐’에 관한 의문인데
당시엔 그것이 그렇게 난해하고 혼란스러웠다.
물론 138억 광년에 이르는 우리 우주를 놓고 보면 끝이 있다.
하지만 공간을 기준으로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 우주 너머 펼쳐져 있는 공간을 무한대의 속도로 질주하면 끝이 나올까?
끝이 있다면 그다음의 공간은 또 무엇인가?
만일 공간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무슨 이유로 그럴 수 있는지 의아했다.
혹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공간을 맴돈다고 말하지만
그런 닫힌 공간을 포괄하는 열린 공간의 문제가 또 남는다.
결국 공간의 끝이 있어도 모순이고 없어도 모순이다.
당시 나는 공간의 끝이 양자 모순에 걸려 있다면
그건 공간이 아니라 ‘나’의 시각이 왜곡된 것으로 생각했다.
‘나’ 스스로 차원의 한계에 걸려 답을 풀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훗날의 숙제로 미루었다.
몇 해가 지나면서 공간의 끝을 따지는 문제가 有와 無라는 가장 근본적인 명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는 有와 無를 가지고 놀았다.
화두의 골자는 이렇다.
실존인 제1원인을 有와 無로 대치해서 성립되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다.
제1원인 = 有
실존이 有라면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有란 그 자체로 어느 무엇에 의해 생성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에 걸리고 만다.
有는 어떤 경우에도 자존성이 없어 제1원인이 될 수 없다.
가령 불교 철학 가운데 잘 알려진 것으로
인도의 논사 세친이 지은 유식론이 있다.
(초기불교의 무아론을 부정하고 대승불교의 진아론을 세우기 위해 쓰여진 불교식 심리학
대승불교는 자성(불성)을 내세움으로써 계속해서 힌두교의 아류라는 딱지가 따라붙게 된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철학은 일관되게 그 꼬리표를 떼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아론 역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식뿐이며, 삼라만상은 식의 현현이라는 얘기다.
일체유심조를 뒷받침하기 위한 불교식 심리 철학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식이 有이냐는 것이다.
有이면 어떻게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제1원인 = 無
실존이 無라면 자존의 문제는 어느 정도 풀리는 듯아다.
물론 완전히 해소되진 않지만, 그런대로 有보다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창조의 문제에 다시 걸리게 된다.
‘나’란 존재가 실제이든 가상이든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제1원인은 창조성을 만족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無는 적합하지 않다.
無에선 그 어떤 것도 만들어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유식론의 식을 여기에 대입해 보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식만 있다면 그 식은 有인가, 아니면 無인가?
앞서 식을 有라고 하면 자존성에 걸렸다.
그럼 無라고 하면 어떤가?
식이 無라면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有이든 無이든 양자 모순에 걸리고 만다.
이런 식으로 有와 無를 잣대로 실존을 따져 보면
영원히 그 답을 차지 못하게 된다.
왜 답이 없는 것일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사고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무언가의 길이를 잴 때 그 값이 계속해서 틀리게 나오면 측정 도구를 의심해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실존을 有와 無로써 풀 수 없다면
有와 無 자체에 무슨 문제가 없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有와 無가
실상은 우리 의식이 꾸며낸 착각이며 환상이 아닐까?
불교 사상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有와 無는 상호 모순된 개념이며, 그렇기에 한 존재에 有와 無가 동시에 적용될 수 없다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튼 제1원인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혹자는 ‘잠재적인 無’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무언가가 미세하게라도 있으면 그건 有가 된다.
그래서 잠재적 無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잠재적 無’에 깜빡 속는 사례가 있다.
흔히 ‘질량과 에너지가 같다’는 과학적 명제를 가지고
질량인 유형과 에너지의 무형이 같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형태가 있든 없든 무언가가 있으면 무조건 有이다.
그러니 에너지도 有이다.
색성향미촉에 감지되지 않는다고 無나 무형이라 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E=MC2]은 有가 에너지와 질량의 형태로 왔다갔다 하는 속성을 일러주는 것이다.
有와 無가 답이 아니라면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제3의 존재 형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수학의 X로 놓는 것보다는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 주는 게 좋겠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谷, 불교에서는 空이라 부른다.
곡이란
글자 그대로 텅 빈 구멍에서 샘이 솟듯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형상이다.
그리고 공은 텅 빈 구멍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둘 모두 無에서 有가 생성된다는 뜻을 취한다.
그래서 곡과 공은 有而無이다.
有이면서 동시에 無이다.
수학으로는 간단히 有와 無가 같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가령 1÷0=A라고 하면 1=A×0이 된다.
결국 1=0이 되어 有와 無는 같은 것이 된다.
그런데 有=無가 말이 안 된다고 본 수학자들은 ‘0의 나눗셈’을 금지했다.
(인류의 지혜가 차곡차곡 쌓여 이룩한 수학
만일 무수한 수학 이론 가운데 단 하나만을 취하고 나머지를 모두 버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0의 나눗셈’이 돼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이론들은 모두 차원의 한계에 걸려 있지만
유독 ‘0의 나눗셈’만은 일체무애하여 차원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 나온 지 근 100년에 이르지만
‘0의 나눗셈’을 외면함으로써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학자가 전무하게 되었다.
양자역학을 현실에 유용하게 쓰면서도 그 원리는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데
빠진 고리를 채워 넣지 않으면 그 사항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0의 나눗셈’에서 보여주는 0=1의 공식엔 경이로운 창조의 비밀이 담겨 있다.)
칸트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은 어떤 모순점이 나오면 이율배반이라 하여
무조건 배제하는 경향이 짙다.
3차원 현상계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도학에선 그 이상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다면 有와 無를 동시에 만족하는 것을 찾아보자.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제3의 존재 형태라고 가정하고 넘어가자.
제1원인 =空(谷)
위와 같이 등식을 놓으면 성립될까?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첫 번째로 有而無한 空 역시 有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1+0=1인 것처럼 有無가 공존하는 空을 有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점이다.
이것을 푸는 것이 화두이다.
또한 그렇게 해서 답을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자존하며 만물을 창조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답을 찾아야 한다.
일찍이 용수는 <중론-관유무품>에서 有와 無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有와 無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그의 지론은 매우 탁월했다.
다만 그것의 풀이 과정에서 다소 복잡하고 모호해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승의제와 세속제로 공을 재단하고
人無我 法無我로 空을 해석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단초를 제공했다.
그래서 훗날 유식학파가 중관파의 空을 무상하고 공허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유식론을 주창하게 된다.
만일 용수의 공이 분명하게 잘 전달됐다면
유식론과 같은 군더더기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有와 無와 공은 존재의 세 가지 형태이다.
여기서 제1원인(실존) 추론하지 못하면
생각이 만들어내는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有無空 화두는 반야의 근간이며
훗날 올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충실한 내공이 된다.
그러니 필이 有無空 화두를 잡아
실존의 존재 원리에 대한 납득할 만한 견식을 갖추어야 한다.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뇌의 텅 빈 상태와 불교의 공 (0) | 2023.05.30 |
---|---|
[현덕마음공부] 현대인은 머리를 너무 많이 쓴다 (0) | 2023.05.29 |
중도론18.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 수학적 증명 (0) | 2023.05.24 |
[현덕마음공부] 양자역학과 무아 (0) | 2023.05.23 |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의 융회관통 (0) | 2023.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