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님은 늘 매사에 적극적이라서 아주 좋습니다. 첫 번째 받은 기도문은 거사님이 불법을 만나서 한참 재미를 내어가지고 소위 말해서 죽기 살기로 할 때, 그때 상태인데. 그렇게 본인이 기쁜 건 좋지마는 그러나 본인의 기쁨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본인이 좋다고 아~ 신심이 나가지고 막~ 아침저녁으로 절에 다니고 이럴 때, 아내가 그것을 이해 못 하면 어떻겠어요? 아내는 오히려 더 괴로워질 수도 있죠. 그죠? 그러니까 그 기쁨이 자기한테만 머무르지 말아야 된다. 그래서 아내와 나누어 가져야 된다. 아내와 나누어 갖는 게 ‘아내여, 절에 가자.’ 이게 나누어 갖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면 하나 미쳐도 집안이 될까 말까? 인데. 둘이 미치면 큰일 난다. 이래 생각하기 때문에 더 거부한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아내에게 숙이고, 아내를 잘 이해하고 받드는 마음을 내는 게 바로 아내와 이 기쁨을 나누어 갖는 거다. 그렇게 볼 수가 있죠. 그래 이제 가장 크게 맺힌 게 아내의 문제인데. 그게 조금 수그러드니까 두 번째 본인에게 큰 과제가 결국은 자신 문제 아니겠어요? 그죠? 그래서 다시 자식,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는 뭐에요? 기대가 늘 크잖아. 그죠? 그러니까 특히 거사님이 크니까, 자식에 대한 기대가 도리어 큰 병이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기대를 갖지 마라. 이렇게 주어지셨고요. 그대로 해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진을 해 나가시면 되는데. 우리 거사님이 앞으로 뛰어넘어야 할 공부는 어떤 거냐 하면, 불교공부는 즐거움이라도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고, 괴로움이 있어도 괴로움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게 불법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은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많아. 그래서 늘 우리는 이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기를 원해. 그래서 공부를 좀 하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즐거움이 많아져. 그럼 환희심이 생겨. 그런데 이것이 수행의 공덕이기는 하지마는 이것을 참수행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참 수행은 그 즐거움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거요. 그래서 이 외도냐? 아니냐? 가장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어지간하게 공부를 가르치면 수행을 지도하면 다 괴로움이 없어지고 뭐가 생긴다? 즐거움이 늘어나.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믿고 따르고 찬송가 불러도 괴로움이 없어지고 즐거움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이게 외도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그 즐거움에 집착하도록 하느냐? 즐거움에 맛 들이게 하느냐? 그 즐거움에도 집착하지 않게 하느냐? 여기에 해탈의 길이 있는 거요. 그러니까 즐거움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돼. 즐거움과 괴로움을. 더 돌아가면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동격으로 봐야 돼.
좋다고 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지 않는 경지로. 그 경지로 이제 왔으면 지난번에 늘 그게 심한데. 그 경지에 왔으면 공부가 다 돼가는 거요. 실험을 한번 해 봐야지. 나중에. 이 즐거움에는 약간의 마음이 뭐합니까? 괴로우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즐거우면 마음이 어떻게요? 들뜨죠? 그죠? 들뜨는데. 즐거움에 집착을 놔야 돼. 그래서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아야 돼. 그런데 우리 마음은 자연적 즐거우면 마음이 이렇게 들떠요. 그래서 거기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 그래서 이 비파사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쾌와 불쾌. 쾌와 불쾌에 끄달리지 말아야 돼.
우리는 쾌하면 좋다. 좋으면 잡아야 돼. 불쾌하면 싫다. 싫으면 버려야 돼. 그런데 그것이 쾌도 그냥 하나의 감각이고 불쾌도 하나의 감각이다. 쾌도 그냥 하나의 필링이고, 불쾌도 하나의 필링이다. 비 오는 날도 그냥 하나의 날이고 날 맑은 날도 그냥 하나의 날이다. 앉아 가지고 명상을 떡~ 할 때, 한 시간 번뇌가 들끓어도 그것도 번뇌가 많구나. 하는 하나의 수행이고, 그냥 다리가 아파가지고 한 시간 내내 신경을 써도 그것도 한 시간의 수행이고. 죽비소리가 금방 친 거 같은데 바로 한 시간이 지나가서 또 쳐. 금방 깨. 너무 아쉬워.
그건 아쉽다는 건 뭐요? 그 적정에도 지금 집착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 거를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가야 돼. 그러면 이제 마음이 어떠냐? 여여해진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어요. 그걸 좀 한 번 살펴보세요. 마음이 그런지. 안 그런지. 그럴 때 스님도 그럽니까? 이래 묻지 말고. 스님도 안 그러면 스님이 자기 해탈을 못 하는 거고. 그러니까 자기가 그러냐? 안 그러냐? 그렇게 한 단계 나아가야 돼. 옛날에는 괴로움이 많았다면 요즘은 거사님은 기쁨과 즐거움이 많아.
그런데 즐거움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런 단계로 나아가면, 괴로움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하지 않는, 그런 걸로 가면 이제 경계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경계에 있는 대로 대응하게 된다. 그렇게 조금 한번 나가 보시죠. 참회의 눈물은 내가 옳다 하는 것이 남아 있을 때, 내가 옳다 하는 것이 떨어질 때 참회의 눈물이 흐르거든요. 거사님이 내가 옳다 하는 것은 벗어났다니까 지나갔나 봐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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