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도 저렇게 불법 공부에만 집중을 하시기 때문에 거기 무슨 결함이 있겠어요. 아무 결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도냐? 이건 쉽게 말 못하겠네요. 어떤 사람이 산을 보고 내 절을 해요. 거 왜 그러냐 그러니까 산이 너무 좋아서 그렇다. 그게 나쁜 짓은 아니죠. 산을 좋아하는데 뭐 나쁜 일이 있어요? 그런데 산을 보고 아이고 산아이야 고맙다. 산이야 너무 좋다고 절한다고 해서 아무 결함이 없어요. 손해는 없어요. 이익만 있지. 그렇다고 이것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냐? 이런 얘기요.
그럼 불교에서 정도라고 하는 건 뭘 기준으로 해서 정도라고 하느냐가 있을 거 아니오. 그죠? 그것은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목표로 해 갈 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하는 것이 해탈의 길로 가느냐? 그냥 내가 좋아서 한다. 이것만 가지고는 해탈이 안된다는거요. 그런 데서 거사님께서 하시는 것은 흠은 없다. 이익은 있다. 그러나 해탈의 길이다라고 단정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거사님이 해탈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탈의 길이다. 아~ 그렇게 하면 해탈이 되겠다. 이렇게 말하기는 제가 좀 곤란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도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그럼 정도의 기준은, 불법에서 말하는 정법, 정도는 그러한 결과로 해탈하는가? 그러한 결과로 열반이 증득이 되는가? 이게 기준이오. 천하 돈을 다 벌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인기가 높다 하더라도.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걸 해탈의 길은 아니에요.
이걸 갖고 우리가 이익을 봤다. 이렇게 말 할 수는 있죠. 그러나 이것을 해탈의 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해탈이라는 것은 뭐냐?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그러고. 열반이라는 말은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는 거요. 부처님 당시의 예를 한가지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재가신자 가운데 배삿카라고 불리는 여자 신도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재가여자 신자 가운데는 부처님 당시에는 아마 제일 유명하신 분일 거에요.
이 분은 아주 부잣집 딸이고 또 결혼을 했어도. 아주 부유하게 살았고. 그래서 부처님께 보시도 많이 했고. 또 말년에는 절을 지어서 부처님께 기증도 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 분이 불법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높았다 하는 얘기요. 이 분이 어느 날 비가 오는데 옷도 다 젖었고, 눈물 줄줄줄줄 흘리면서 기원정사로 찾아왔어요. 부처님을. 그래서 부처님께서 우리로 말하면 이런 참 점잖은 노보살님이 찾아 오셨단 말이오.
아이~ 부인 어쩐 일이오./ 부처님 저는 너무 슬픔니다/ 그래. 수행을 참 열심히 하신 분인데. 그래서 /왜 그렇소/ 하니까 /제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손자가 오늘 아침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이랬어.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부인/ 이래요. 그러니까 부인이 /예. / 이러니까.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좋소, 두 명이면 좋소 이래./ 아 그야 두 명이면 좋죠./ 두 명이면 좋소, 세 명이면 좋소/. 그러니까. /아 그야 세 명이면 더 좋죠./ 이렇게 몇 번 문답을 하시다가 /너무너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사위성에 성민들 수 만큼 많다면 어떻겠소?/ 그랬어. 즉, 서울 시민만 하다면 어떻겠냐? 이거야.
부처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다시 물었어요. 부인. 예. 사위성에는 하루에 몇 명이나 죽겠소? / 그랬어요. 서울 시에 하루에 몇 명 죽겠냐?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부인이 /하루에 한 명은 죽을 거요. 아니오. 두 명 죽을 거요. 아니오. 그 보다 훨 씬 더 많이 죽을 겁니다. 아마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하루에 열명은 죽을 거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부인 /예./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 매일 울겠구려/ 그랬어.
눈치가 깨달은 거 같지가 않다. 그 이 분이 이때 딱 깨쳤어요. 그래서 눈물이 아직도 줄줄줄줄 흐르고 있는데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그러면서 부처님께 환한 얼굴로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하고 아주 밝은 얼굴로 돌아갔어요. 손자가 죽어서 슬프다고 왔는데. 손자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아주 밝아 져서 돌아갔어. 이것을 깨달음이라 그래요. 이렇게 될 때 이거를 우리가 열반을 증득하는 해탈로 가는 거요. 이게.
그러니 거사님께서 공부하시는 거는 전철간에 앉아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시비 안하고 딱 앉아서 사구게만 외우니까. 경계에 끄달려요 안 끄달려요? 안끄달리니까 좋은 일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경계를 무시하고 내가 구애를 안받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건 내가 염불을 놓치면 경계에 금방 끌려든단 말이오. 그러니까 온갖 사람의 행동을 보고도 안 끄달려야 된단 말이오. 그걸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하면 안끄달려 든단 말이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해 오셔서 이건 잘 하신 거에요.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셔서 내가 뭐 나이 들어서 이런 생각 하지 마시고. 연세 드시면 너무 욕심내지 마시고 염불만 하는 게 제일 나아요. 그러나 이렇게 정법을 물었으니까. 요즘 손자들이나 뭐 아들이나 이런 생활에 간섭합니까? 안 합니까? 그건 잘 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염불만 하지. 그러니까 염불한다고 못 깨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경계에 구애 받지 않는 거나, 내가 염불에 집중해서 경계를 상관하지 않는 거나 심리현상은 다 똑같아요.
그래서 거사님께서 하시는 게 이익이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은 아침에 일어나서 온갖 망상을 피우거나 경계 상관을 해서 늘 번뇌가 일어나는데. 아침에 딱~ 일어나면, 라디오 틀어놓고 설법 듣고, 또 전철간에 오시면서도 딱 염불하시고, 천수경 외우시고 하니까 번뇌가 없어서 참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그렇게 하면 깨친다 이렇게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정도냐 이리 물으니까 제가 선뜻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거사님을 격려하려면은 정도입니다. 이리 말해야 되는데. 그지? 그래도 당장 듣기 좋은 거 보다 불법에 그 우리가 불법이 너무 높다고 막연히 생각해서는 안되지만은 그냥 우리가 하는 이 수준으로 갖고 불법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우리의 그 불교를 불교라고 이름을 붙이는 근본 이유가 있잖아. 그죠? 깨달음의 가르침이잖습니까? 그죠? 그리고 모든 해탈, 해방의 길은 바로 그 무지를 깨치는 데 있다라고 하는 이 근본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어야 된다는거요.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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