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반갑습니다.
오늘은 지난 명상 강좌 때인가, 어느 분이
있는 그대로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가 진리다’
뭐 이런 말들을 하니까
‘있는 그대로에 대해서’ 특강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지금 마스터 7강째인데
마스터에서도 ‘있는 그대로’가 제일 마지막에 하는 거예요, 7강 8강 때.
왜 그러냐면 ‘있는 그대로’를 중생은 보질 못해요.
자기가 보는 식대로 보지, 있는 그대로 못 본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러니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그 진리의 모습은
부처의 눈만이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라는 말을 잘못 알고 있어요.
“그냥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이게 ‘그냥 이렇게’가 벌써 자기 분별이거든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앞에는
주어가 있는 거예요.
‘진리가 있는 그대로’
‘진리가’가 빠졌어요.
근데 ‘진리가’를 빼고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내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 이렇게 분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보는 거예요.
근데 ‘있는 그대로’를 직빵으로 들어가려면 사실 어려워요.
여러분들이 마스터 과정에서도 제일 마지막인데
아직 식스존밖에 안 하신 분들도 와서 제대로 알아듣겠어요?
그래서 물론 알기 쉽게 제가 얘기하려고 애쓰겠지만.
오늘은 있는 그대로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 꼭 필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뿐’하고 ‘즉’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그걸 먼저 하는 거예요.
오늘 ‘뿐’하고 ‘즉’을 알면
다음 달에 있는 그대로 해도
여러분들이 쉽게 넘어갈 수가 있는데
‘뿐’하고 ‘즉’을 모르면
그냥 또 생각으로만 받아들이고 정보로만 받아들이지
그 자리에 계합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오늘은 ‘뿐과 즉 사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여서
일단 특강을 해보고
남는 시간에는 여러분 자원자를 또 이 앞에다가 불러서
왜 모르겠는지, 제가 좀 한번 심문을 해보겠습니다.
자꾸 모른다고 그러는데 왜 모르겠는지
그 모른다는 걸 아는 놈은 누군지
제가 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제가 보면 그중에 하나인데
자꾸 자기는 그걸 몰라요, 자기가 거기에 빠져 있다는 걸.
그걸 지적해줘야
“그런가?” 하고 겨우 알 정도로.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가장 중요한 실수가
/자기 몸을 자기라고 여기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이 꿈속에도 여러분 몸이 나타나죠.
근데 그때 꿈속에서도 자기 몸을 자기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꿈 깨면 그게 자기 몸이었어요?
그냥 환영이었잖아요. 그죠?
꿈속에 꿈을 깨서 보면
꿈속에 있었던 내 몸이라는 이미지는
생각+이미지, 느낌 뭐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정보라고요.
그냥 마음이 만든 정보였어요.
근데 여러분들이 지금도 이 몸을 자기라고 여기지만
이 몸도 아주 여러분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정보예요.
생각+이미지
매일 아침에 여러분,
자기 이미지를 보는 거지, 자기를 보는 게 아니에요.
거울 보면 거기 자기 얼굴이 비치지, 자기의 모든 것이 비춰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이미지를 보고 자기라고 여기는 거예요.
근데 이 이미지는 자꾸 변하잖아요.
점점 늙어가잖아. 그죠?
그 자기를 보는 게 아니야.
자기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죠.
자기에 관한 정보를 보면서
자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 몸이 여기 이렇게 있다는 느낌을 갖죠?
그 느낌도 정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짜 만에 하나 유체이탈을 했다던가
무슨 나중에 저 죽어서 귀신이 돼 갖고
몸을 가지고 살던 때를 돌아와 봐봐요.
그럼 꿈 깬 사람하고 똑같잖아.
그냥 그때 정보, 상념, 이미지밖에 더 있냐고
“그때 내가 이런 몸 가지고 이렇게 살았지”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가장 큰 착각이에요.
개체 몸을 자기라고 여긴다./
송장도 조금 전에 죽은 사람이 몸은 그대로에 있는데
그걸 자기라고 여기나? 아니잖아요.
두 번째로는
생각으로 이해해서 알려고 만들어야지
실제로 이 자리에 계합을...
*!
이렇게 종을 치면
자꾸 종소리만 따라가지
이걸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아보질 않아요.
여러분이 지금 만에 하나
밖에서 대포 소리가 나거나
불났다고 사이렌 소리 나거나 불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난다면
이게 귀에 들어오겠어요?
이거 들어오겠어요?
안 들어오죠.
지금 왜 들어올까요?
딴 데 정신을 안 팔고 있으니까. 그죠?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생각을 쫓아다니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진리를 못 보거든요.
그래서 생각으로 이해하면 다 알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지금 마스터 과정에도 절반이 넘어요.
답안이 다 뽀록이 나는데
자꾸 아닌 척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참 답답한 게
우리가 평생, 척하고 살았잖아요. 솔직히.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우린 척하고 살았어요.
아니면서도 그런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없으면서도 있는 척
화났으면서도 안 난 척, 억울하면서도 담담한 척
이러고 살았잖아요.
그게 쌓여서 나중에 스트레스 되고, 울화병 되는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니까 그런 척을 하지 말고
그냥 우리가 진짜 그런 거를 객관적으로 그대로
왜 자꾸 이렇게 조작을 하고, 이렇게 꼬고, 숨기고, 이러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정견을 안 하는 거예요.
자기한테 일어나는 일을 감추고 정직하지 못한 거예요.
뭔가 더 착하게 보이려고 그러고, 멋있게 보이려고 그러고,
좀 큰 사람으로 보이려는 거예요.
근데 기독교는 선한 것을 강조하지만
불교는 선과 악을 초월하는 걸 강조합니다.
여러분이 선과 악의 틀을 벗으셔야 돼.
그러니까 육조 혜능이 자기 따라온 해명인가 그 한 사람을 가르칠 때
그 말을 했잖아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닐 때, 너는 어떤 자리에 있냐?”고.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이런 틀을 다 벗으셔야 돼.
그래야 해탈이지
왜 자꾸 선하고, 멋있고, 깨달은 도인 같고
무슨 이런 흉내를 내고 있으면 안 돼.
이거 다 틀이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그 체험이나 느낌으로 자꾸 붙잡으려고 들어요.
생각, 체험, 느낌 이런 거 가지고
“이런 체험이 왔으니까 이게 깨달음 아닙니까?”
“뭐 이게 깨어난 거 아닙니까?”
자꾸 이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
근데 진리라는 건
왔다 가는 게 아니잖아요. 없다가 생기는 게 아니잖아.
그냥 계속 여기 있는 거잖아요. 그죠?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도 있었던 거예요.
그럼, 갓난아기가 무슨 생각이 있어요?
아니면 누구한테 대한 무슨 선악의 개념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
갓난아기한테도 있는 것.
갓난아기는 할 수 있는 게 뭐야?
그냥 꼬물거리는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기분 좋다고 자고
뭐 이것밖에 더 있나? 그죠?
그런 애한테도 있는 거, 그게 진리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식스존 가지고 뭔가를 헤아리고 붙잡고 만지려고 하는
어떻게 정보화시키려고 하는
이런 문제가 또 큰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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