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34] 정견에 대한 Q&A / 피올라 현대선 6강 "깨달음을 가로막는 실수들" 8회

Buddhastudy 2024. 9. 24. 19:39

 

 

어떤 법상을 세우고

그에 맞춰 공부하거나

그런 방법으로 스승도 평가하고, 무슨 공부법도 평가하고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근데 그런 거는 다

자기 아상을 만드는 길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법상마저도 내려놓을 때

이 자리가 빨리 드러나는 건데

법상을 자꾸 붙들고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다음에 분별에 휘말리는 과거 습관을

자꾸 정화하고 비워내는 방향이 옳은 방향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걷혀야 보름달이 더 밝게 드러날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마지막 하나로

이 동그라미 자리를

생각이나 자기가 감각으로 이렇게 만들었고

이런 거겠지 저런 거겠지하면 안 돼요.

그러면 또 아상이 생기고, 법상이 또 생깁니다.

 

끝까지 자기는 완전히 비워놓고

완전한 내어맡김이 있을 때 비로소

본래 있던 본래면목하고 자기가 계합을 하게 돼요.

아시겠죠?

그래야만 자기가 생사일여 한 줄 알게 되고

실제로 그런 경지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앎에 집중하면

여러분 지금 이 앎은 감을 잡았죠.

이거에 집중하면

이거는 달의 일부분이지, 이게 달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면 서서히 이 자리가

여러분이 원래 이 3차원 쪽에 이런 개체의 몸으로써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이 모든 거를 일으키는 4차원적인 생명, 절대 생명 그 자체라는 거를

자기가 보고, 체험하고, 거듭나는 때가 와요.

자기가 진짜 이 우주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돼.

내가 하나님 그 자체고, 무시무종 그 자체고, 절대 진리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될 때가 옵니다.

 

모든 것은 이 자리가 일으키는

그야말로 바다로 치면 파도 현상일 뿐이에요.

그 파도를 가지고 자꾸 바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파도는

뭐든지 다 바다는 수용하지

이런 파도는 되는데 저런 파도는 안 돼하는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분별들을 다 내려놓으시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이 오온이

진리를 체험하고, 진리로 즐기는

놀라운 수단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그걸 유희삼매라고 그래요.

그래서 삶을 즐기는 유희삼매를 여러분이 누릴 수 있게 돼요.

그게 상락아정이고, 열반이고, 해탈이고, 천국입니다.

 

 

질의하실 거 있나요?

없어요.

그러면 뭐

여기는 없어요?

저 오늘 줌으로 참가하신 분들, 질문 사항 없으신가요?

 

(그 선생님 이거 한 가지 더

감정에 대해서 얘기 나눴었잖아요.

제가 예를 들어서 서운한 감정이 이렇게 들어왔어요.

서운한 감정이 들어왔는데

그 감정을 그대로 제가 경험을 하는 거잖아요.

이거를 지구를 그냥 경험하게 되면은

사실 경험했다는 나도 없는 거잖아요.

전체의 자리에서 보면은

하나의 다른 현장일 뿐이잖아요.

그러면은 거기는 뭐 남는 것도 없는 거네요.

그냥 지나가는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

그걸 남는 거를 만드는 것도 나고

만든 게 없다라고 하는 것도 나예요.

내가 그 모든 걸 결정하는 거예요. 사실은.

일체유심조거든.

 

그러니까 어떤 법을 이런 건가요 저런 건가요?”

앞으로 하실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런 건가요? 저런 건가요?”는 다 내가 만들고 있어요.

 

그다음에 또 하나 내가 노파심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어떤 감정이 상한다거나

또는 모욕감을 느낀다거나

아니면 징그럽거나 무섭거나 한 것도 있을 수 있잖아

살다 보면.

 

그런데 그럴 때

내가 분명히 이게 허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 당장 견뎌내기가 힘들 때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는 뭐냐 하면

우리가 가장 두렵거나 무서운 거 할 때

여러분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는 게

눈 감는 거예요.

 

기독교인들은 그때 하나님 부르고, 아버지 엄마 부르고

또 일반인들은 보통 사람은 눈을 감습니다.

날 잡아 잡수하고.

그런데 그때 마음의 눈으로 그걸 정견하세요.

끝까지.

그러면 그것이 오온개공이에요.

 

그것이 그렇게 두렵게 되고 무섭게 되고 징그럽게 된 것은

내 안에 있는 잠재의식이 그렇게 만든 것뿐이에요.

그래서 그거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그걸 끝까지 지켜보는 것뿐이에요.

그게 진리입니다.

오온개공.

근데 공한 것을 자꾸 색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거야.

 

그러니까 어떤 걸 이렇게 우리가 이거를 수용하고 이걸 그냥 통과시키려고 하는데

이렇게 걸리거나 너무 이렇게 힘든 게 있잖아요.

그때 그거를 자꾸

마치 2천 번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나는 도전정신으로

끝까지 정견하시라고

어제는 실패했어도 오늘은 성공하겠다.

 

그리고 끝까지 지켜보는 게 한 번만 되면

그다음부터 그거는 힘을 잃어요.

다시는 나를 어쩌지 못합니다.

그거를 끝까지 못 보기 때문에 그거한테 지는 거예요.

아시겠죠?

눈 감지 마세요.

 

(계속 그러면 에고한테 끌려다닐 수도 있는데

끌려다니는 걸 알면서도

계속 이 정견을 끝까지 한다 하더라도

그게 매 순간 성공할 수는 없잖아요.

계속 끌려다닐 정도로 에고 힘...)

 

점차 끌려다니는 빈도수가 줄어드는 거죠.

정견을 통해서

구름이 한 번에 다 거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점차 점차 물러납니다.

 

(정견이라는 교장 선생님 말씀하신 건 정확히 이해는 했는데

디테일하게 좀 제가 여쭤보자면

예를 들어서

제가 단거를 많이 먹으면 살이 찌니까 먹지를 말아야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빵가게 지나가거나 초콜렛을 볼 경우에 알아차리긴 했어요.

먹지 마라

근데 벌써 손은 벌써 거기 가서 입고 뜯고 있고 먹고 있거든요.

그게 정견인가요? 아니면은

보고서 난 먹지 말아야지

먹고 싶은 마음을 계속 이렇게 쳐다보고 있어야 되는 건가요?)

 

정견이 아니죠.

그러니까 그거는 생각이 감정이나 감각의 힘을 못 느낀 거기 때문에

정견이 아니에요.

정견은 이게 정견이에요.

이거가 돼 있는 게 정견이에요.

 

그 정견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요.

사실은 조금 해보면 알겠지만

정견은 이미 저절로 되고 있어요.

이미 저절로 되고 있는 상태가 돼야 돼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양심의 눈이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하거나

솔직히 말해서 너무 탐나서 슬쩍 했다.

그러면 어렸을 때는 그런 거 다 해봤잖아요. 저도 해봤어요.

 

그런데 그랬을 때

그걸 아는 앎이 있어요.

내 안에.

이거는 내가 그거를 맘대로 한 게 아니고 저절로 그런 게 있어요.

 

그걸 이름을 양심이라고 붙인 거지

그게 이거예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내가 하는 짓을.

 

그러면 내가 점점 더 이거를 밝게 하고

이거를 가리는 생각, 감정, 감각, 느낌의 구름을 나로부터 걷어내면

그러면 이것이 모든 거를 인도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평화스러워지고

나도 모르게 내가 기뻐지고

매사가 너무나 경이롭고

사는 게 신나고, 즐겁고,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하지 말아야 될 걸 안 하게 되고

내가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저절로 안 하게 돼요.

그거 신기해.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하겠다라는 걸 지금 얘기하시는 거거든.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거는 잘못된 공부라고 그랬잖아요.

 

그냥 자기라는 안에 이미 이 앎이 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걸 바라보고 있어요.

지금 저하고 대화하시는 것도 아는 앎이 있어요.

그걸 더 강화시키고 그거에 더 집중하세요.

그거로 족해요.

 

 

관찰자 아니에요.

관찰자라는 게 왜 잘못됐냐면

자가 있기 때문에 잘못됐어요.

그게 에고거든.

주시자. 관찰자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게 에고가 장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앎이 있을 때

에고가 행사하는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라고 말씀인 거잖아요.

그거를 에고가 어떤 힘을 행사하고 있는지 바라보는 그 점에서 봤을 때)

 

에고라는 것도 사실은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세진 거예요.

에고라는 게 뭐냐 하면

오온의 집합일 뿐이에요. 안 그래요?

생각, 감정, 감각들이 탐진치로 묶인 게 에고예요.

근데 실상은 허깨비라고요.

그러니까 그걸 자꾸 없는 걸 있다고 하면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없는 거를 있다고 하기 때문에

자기가 힘들어지는 거예요.

내가 수고하는 거예요.

 

없는 거를 없다고 보기 시작하면

그걸 한 번이라도 정말 끝까지

눈 감지 않고 끝까지 철저히 본다면

바로 해방됩니다.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린다.

알아차리는 것도 앎에서 알아차리는 거 아닙니까?)

근데 관찰자, 앎에서 관찰하는 거 아닙니까?)

 

하는 게 아니고 된다니까요.

자꾸 왜 누가 한다고 그래요?

하는 게 아니고 자연 현상으로 되고 있다니까.

 

이걸 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정견해 보시고 나서.

 

앎이 알고 나서

거기다 이름 붙인 생각, 감정, 감각의 움직임을

알아차림이라고 우리가 또 이름 붙이는 거예요.

 

...

 

<알아차림을 알아차림> 이런 책도 있어요.

요새 내가 읽어보고 있는데 아주 좋은 책이더라고

알아차림을 알아차림인가?

그 책 한번 읽어보세요.

 

그런데 어쨌든 중요한 거는

알아차림이라고 하면 이미 분별이란 말이에요.

이거는 자기가 알아차렸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있어요.

자기 아버지 엄마 보는데

내가 아버지 엄마를 알아차리고 있구나 하고

그다음에 아버지구나하고 엄마.

그거 분별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절로 알잖아. 그죠

 

배고프면 저절로 알지

내가 지금 배 꼬르륵 하는 신호가 왔고

뭔가 느낌이 이상해. 그러니까 배가 고픈 거지이거 생각해야 돼.

저절로 알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이 직관 통찰적인 거는

말 이전에 있단 말이에요.

찬물 마시면 차갑고, 뜨거운 물 마시면 뜨거운 거는

그냥 아는 거지, 여기에 무슨 알아차림의 과정이 필요해요?

 

이 앎의 자리에서는

앎이 알고 나면 그다음에 생각, 감정, 느낌들이 또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이걸 알았구나이것도 생각이고

이 앎은 느낌이 좋다 어떻다하는 느낌도 또 작동하고

또 감정적으로는

참 평화스럽고 좋다라는 것도 작동해요.

그런 거는 작동하든 말든 아이돈케어

그냥 이것 자체로 순수하게 있어 보는 게 여러분들은 지금 매우 어려워요.

왜냐하면 하도 이 번뇌망상이 심해서.

 

하지만 아무리 먹장구름이라도

결국은 거칩니다.

안 그래요?

 

항상 그게 껴 있을 수는 없어.

지금부터 시작해 보시라고요.

자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