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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經 | 가장 편.하.다.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5. 16. 19:42

 

 

왜 우리가 본래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냐 하면

하여튼 불교에서는 그걸 깨달은마음이라고 하는데

깨달은마음에 우리가 통해서

깨달은마음이 딱 한 번 자기 스스로 확인이 되고

여기에 있어 보면

이게 가장 편하거든.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게 편해요.

 

그러니까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

불편하고,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이런 거 있잖아요.

이건 자기 본래가 아니에요.

그건 자기 본래 삶이 아니라고.

부족하고, 불만족스럽고, 이건 자기 본래 삶이 아닙니다.

이걸로 확인이 되는 거야, 이걸로.

 

그냥 여기 딱 통해 보면은

이게 가장 편하고,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걸리적거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뭐가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여기에는.

 

이거를 자기가 직접 실감하고 느끼니까

그거를 '본래마음'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물론 다른 이름으로 그걸 참나

뭐 이런 식으로도 얘기를 하는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건

어떤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런 어떤, 뭐라고 참, 그런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떴다 가라앉았다

이거다 저거다

자기 생각, 느낌, 감정을 쫓아서

이렇다 저렇다, 옳다 그르다, 아프다 힘들다, 고통스럽다, 삶의 짐이 많다

이런 게 없는 거야, 그냥.

 

그러고 나 봐야 무원이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를 이제 조금씩 느낍니다.

실감을 해요.

 

자기가 부족함이 없고 불만족이 없으면

어떤 것도 바라는 게 없거든.

 

근데 우리는 늘 바라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 이 분별이라고 하는 건

이 무원이라는 얘기만 가지고 얘기를 해보자 그러면은

늘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요.

 

부모한테도, 자식한테도, 친구한테도, 세상한테도

심지어 이 무정물한테도 바라는 마음으로 살거든.

 

그러니까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겨요.

근데 알고 보면 그 바라는 마음 때문에

우리가 어떤 때는 분노하고, 화나고, 배신감 느끼고 이러거든.

 

근데 그게 뭐냐 하면

바라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스스로

뭔가 이렇게 부족하고, 불만족스럽고, 결핍돼 있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내가 부족하니까 바라는 거지.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하시면 안 된다니까.

상대가 내 뜻대로 안 해줘서 문제가 아닌 거예요, 실제로는.

 

상대한테 뭘 바란다는 것은

내가 뭔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거야.

근데 이 결핍이 한번 사라져 봐야 안다니까.

이 결핍이 사라지면

바랄 것도 없고, 원할 것도 없어요.

 

아마 그게 우리가 이 분별 망상하는 삶하고, 깨달은 삶의

하여튼 이 대표적인 차이 중에 하나일 겁니다.

저도 이 강을 건너기가 쉽지가 않았어요.

말씀드렸잖아요.

너무 당연한 거였으니까 우리는.

 

뭔가 이렇게 이 소소한 거라도

바라고, 원하고 사는 게 인생이다하고

그냥 딱 못이 박혀 있어요, 못이.

 

바라는 게 없으면

재미가 없고, 살 가치가 없는

이런 것처럼 딱 못이 박혀 있어.

 

바라는 거 없는 게

제일 자유롭고, 편하고, 즐거운 겁니다.

그게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하는 말이거든.

 

바라는 게 있으면 어떻게 홀로 갑니까?

홀로 갈 수가 없어요.

 

 

/, 무상, 무원을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물론 바라는 게 없다.

이 말도 분별심을 가지고 사는 삶은

늘 바라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그걸로부터 한번 벗어나 보라고

무원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

무원이라고 어떤 이게 깨달음이다, 이럴 수는 없어요.

 

바람이 있고, 없고, 이건 분별이거든

상이 있고, 없고도 분별이고

공이다, 색이다 하는 것도 분별이거든요.

망상이다, 깨달음이다 하는 것도 분별입니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에 맞는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

깨달음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자꾸 그런 말씀들 하시잖아요.

망상밖에 못 한다, 분별밖에 못 한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그게 분별이에요.

사실은 그게 분별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통해 보면은

여기에는 무슨 깨달음이 있고, 분별이 있고, 공이 있고, 색이 있고, 상이 있고 없고

원함이 있고 없고

이런 게 있는 게 아닙니다.

뭐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러는데

여기에는 색도 없고 공도 없어요.

그런 말은 전부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냥 어쩔 수 없이, 어거지로 하는 얘기예요.

이걸 한번 깨달아보라고.

여기 한번 통해보라고.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 스스로 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자기 마음이거든.

자기 마음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