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옛날 사람들도
이 세상에 생기고 사라지는 일의 어떤 이치나 도리를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잖아.
막 계절도 바뀌고 눈도 오고 비도 오고
별도 어떤 때는 이쪽에서 떴다가 저쪽에서 떴다가
계절별로 조금씩 자리를 바꾸고 이러니까
이 세상에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날까?
무슨 이치나 도리 때문에 일어날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겠죠.
그래서 제가 이런 불법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동서양의 어떤 사상 이런 걸 보면은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해서 만들어 낸 이런 표현들이구나
이런 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
그게 예를 들면 음양오행이라든지 이런 건데.
불교에서도 이걸 깨닫고 보니까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조차도 없어.
어떤 형체도 없고
물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어떤 정신적인 것도 아니니까.
왜냐하면 정신적인 건 느낌이거나 감정이거나 뭐 이런 거거든.
근데 그게 아니야.
이거는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이걸 ‘텅 비어 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거든.
동양사상에서도 도를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무’라고 보통 표현해요.
동양사상에서도 무.
그래서 동양사상은 유라고 하는
있는 것은 다 무에서 나왔다고 그러죠.
도에서 나왔다 이 말이에요.
무에서 나왔다라고 하는 말은.
근데 구마라집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중국으로 잡혀 왔잖아요.
잡혀 와서 불경 번역을 시키니까 번역을 했는데
그러면 이거를 한자로 뭐라고 표현할까?
이거를 이거를, 말할 수 없는 이거를.
근데 이 동양의 중국 사람들은
그때도 이걸 ‘무’라고 표현했거든
뭐가 없다라고 표현을 했어요.
근데 그 ‘무’자 가지고는 이걸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제가 구라마집을 만나서가 아니고, 공부를 해보니까
그래서 구마라집이 찾아낸 게 공이에요. 공.
‘공’하고 ‘무’는 좀 느낌이 어감이 다르시죠?
그래서 그 말하지만 공을 찾아낸 거예요.
‘무’라고 해놓으면 이 동양에서 이미 쓰고 있는 ‘무’라고 하는
동양에서 이 ‘무’라고 할 때는
‘무’라고 하는 게 있는 거거든.
‘무’라고 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동양사상을 보면
이 무에서 유가 생길 때
아직 이 모습을, 유라고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무가 유로 그냥 생기는 게 아니지.
뭐가 생기려면 뭐가 꼬물꼬물해야 될 거 아니야?
생기려면.
이 꼬물꼬물하는 이 상태를 뭐라고 그러냐?
음양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 태극기.
태극기 보면 꼬물꼬물하고 있잖아.
둘이 이렇게 붙어서.
그래서 이 꼬물꼬물한 거는
모습은 아직 없는데
이거를, 모습으로 형상화한 걸 음양이라고 그러는 거야.
근데 불교에서는 이 음양 빼버리지
필요 없어. 그거는.
꼬물꼬물한 이거 설명 안 해도 돼.
그래서 이 꼬물꼬물함이 생겨나기 위해서
이 모습 없이 꼬물꼬물한
두 개의 어떤 기운이라고 해도 좋고, 음양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게 꼬물꼬물 생겨나기 전에 이렇게 하고 있는 거를
한자로는 곤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곤.
그리고 장자에 보면
바다에 큰, 어마어마한 큰 뭐가 살고 있는데
그놈이 바다 위로 올라와서 하늘을 날 때는 봉황이 된다고 그러잖아요, 봉황새가.
바닷속에 있을 때 그놈 이름이 ‘곤’이에요.
그래서 이 ‘곤’이라고 하는 말은
아직 이 모습이 봉황으로 딱 드러나기 전에
이 꼬물꼬물하고 있는
이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불법에서 그거 빼버려요.
그거 필요 없어. 그거는.
알 수는 없는데, 이걸 체험해 놓고 보면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그냥 여기에서 다 생기고 사라진다라고 하는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감이 좀 있어요.
근데 알 수는 없어, 이거는.
그래서 이걸 교리적으로 뭐라고 하냐?
우리 마음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이 문은 없는 문이지.
모습이 지어진 문이 아니에요.
첫 번째가 진여문이고
두 번째가 생멸문이다.
이 생멸문은 뭐냐?
분별, 우리 분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분별도 사실은 일이에요.
알 수 없고, 모습 없는 이게 모습을 드러낼 때
분별로도 드러내는 거고
분별없음으로도 드러나는 거지.
그래서 대승불교는
이 분별 망상 그대로가 해탈 열반이다 하고
그냥 탁! 하고 가르쳐 버리는 겁니다.
분별 망상을 어찌해서
해탈이 되고, 깨닫는 게 아니고
그전까지는,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까지 이 불교도 그랬고
다른 어떤 수행도
선정을 통해서 해탈한다고 그랬죠.
뭔가를 갈고 닦아서 해탈한다고 그랬어요.
근데 이게 다 아니야.
깨달아 본 입장에서는 그건 다 틀린 거거든.
아니야, 그 길이 아니야.
그냥 분별 그대로가 해탈 열반임을
우리가 조견
비추어 보는 거를 깨달음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첫 구절에 딱 써놔 버린 거예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조견 오온이 개공이면
도 일체고액이다하고 딱 써놔버린 거예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그게 생각, 느낌, 감정이
이 생각이냐? 저 생각이냐?
이 생각은 깨끗하고, 이 생각은 더럽고
이 생각은 옳고, 이 생각은 그르고
이걸 따지는 게 아니고
옳은 생각이든 그른 생각이든
두려운 느낌이든, 감정이든, 기쁜 느낌이든, 감정이든
다 그냥 이거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이렇게 다 천명을 해놨고 다 가르쳐 놨는데
더 뭐가 필요하냐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하나하나가
그냥 이 일이다 라고 딱 가르쳐 놨는데 뭐가 필요합니까?
뭘 이해할 게 더 있어야 됩니까?
그냥 이 일임을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필요한 건 그거밖에 없어요.
이 일임을 아는 게 아니고
이 일임이 한번 확인이 돼야 돼. 통해야 돼.
그것만 필요한 거지.
그러니까 불교 공부는 다른 거 없어.
경전을 읽고, 무슨 수행을 하는 게 아니고
이미 다 가르쳐 놨다니까.
조금도 부족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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