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의 수행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을 꼽자면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있습니다.
이는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는 여섯 가지의 수행인데
이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보시(布施)입니다.
보시란 쉽게 말해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물질 혹은 재능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를 바쳐야 제대로 된 보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재물을 100억 정도를 가지고 있다고 치면
이 가운데 몇 프로를 떼어서 보시해야 공덕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걸까요?
재산의 규모를 최대로 확장해서 재벌 회장쯤 된다면
또 얼마만큼의 불사를 해야 부처님이 보시기에 흡족해하실까요?
부자가 아니어도 불제자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이런 의문을 품곤 합니다.
보시의 정확한 기준과 잣대가 뭐냐는 것이지요.
조계종에서 교과서로 삼는 경전인 [금강경]에 봐도
보시에 대한 강조는 그치질 않습니다.
어떤 단체나 조직이 성장하는 데에 있어서
재물은 다다익선이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현재 보시를 하고 계시나요?
혹시 보시하지 않거나 조금 해서 마음에 짐을 지고 있지는 않나요?
부처님이 원하는 만큼의 보시는 과연 어느 정도여야 타당한 것일까요?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보면 참고할 만한 내용이 나옵니다.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는 세계 2차 대전 때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유대인 1200여 명을 살려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도망자 신세가 된 쉰들러 앞에 여러 명의 유대인이 나타나 고마움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때 쉰들러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기가 보시에 소홀했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지요.
자신의 고급 자동차와 다이아가 박힌 반지마저 팔았더라면
몇 사람의 생명을 더 건졌을 거라는 후회와 반성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깟 자동차와 반지가 뭐라고.
저들의 고귀한 생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지 않은가!’
이 장면에서 무한보시가 등장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다 바쳤다는 것은 어찌 보면 我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자체가 수행과 직결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아낌없이 보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나’를 돌보지 않고 利他만을 바라보았으니
我相과 탐진치가 없다고 봐야 하고,
이쯤 되면 깨달음에 거의 도달한 것이 아닐까요?
혹시 깨달음에 못 미쳤더라도 불보살님으로부터의 가피는 확실히 보장될 텐데
정말 그럴까요?
보시에 대한 관점은 종교마다 각기 다릅니다.
유일신 신앙의 관점에서의 보시는 다다익선입니다.
많은 재물을 바칠수록 천국으로 가는 문은 그만큼 활짝 열립니다.
하지만 불교의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불교는 시종일관 깨달음의 종교이니까요.
불교는 삼라만상 모든 것을 實存 그 자체로 봅니다.
이미 깨달아 있다는 뜻입니다.
단지 자기 자신이 붓다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을 뿐이지요.
이 얘기는 구원이나 구제 같은 개념이 온당치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나 극락에 이르는 매표 행위가 필요 없게 됩니다.
이 말은 보시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 나옵니다.
남에게 베푼다는 생각을 잊고 보시를 수행의 연장으로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시를 하지 말아야 할까요?
여러분이 휴가를 얻어 하와이에 놀러 갔다고 칩시다.
하와이에서 무얼 해야 할까요?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관광입니다.
실컷 즐기는 것이지요.
만일 하와이에 놀러 가서 봉사활동만 하고 온다면 관광의 목적에 위배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나’라는 옷을 입고 태어난 것은 붓다가 세상 구경을 하러 잠시 온 것입니다.
창조주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상 세계를 관광하러 온 것이지요.
그러니 인생을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즐겁게
보내시면 됩니다.
이것을 ‘實存의 창조성’이라 합니다.
조물주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자, 인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여기서 권력욕심, 이성욕심, 재물욕심이라는 3대 착심(着心)이 생겨납니다.
이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재물(돈)이 됩니다.
재물만 있으면 어느 정도의 권력과 이성에 대한 만족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여러분들은 열심히 땀 흘려 번 돈으로
자신의 형편에 맞는 삶을 최대한 즐겁게 영위하시면 됩니다.
그러다 어느 때에 자신의 돈을 절약해서 보시하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쉰들러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쓰면
유대인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불우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절에 보시하면 부처님 사업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私利’와 ‘利他’가 충돌합니다.
갈등 양상이 벌어지고
양심상 어느 정도만 보시하고 나머지는 ‘나’에게 써야지
하는 결론을 얻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타협점이 좀 많이 보시하는 축과
찔끔 흉내만 내고 마는 쪽으로 나뉘겠지요.
물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분들도 있을 테고요.
이때 보시에 대한 정당한 기준은 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 그건 창조성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기부의 액수는 공덕과 죄업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일신 종교의 교리에서는
부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재물을 움켜쥐고 있는 만큼 그 재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날렸기 때문입니다.
축적한 재물의 크기에 비례해서 죄업이 쌓이는 구조인 것이지요.
하지만 불교는 창조성의 원리에 따르기에 보시에서 자유롭습니다.
당신이 벌은 재물을 당신만을 위해 쓴다고 해서 죄업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지요.
다만 이웃을 바라보고 사회를 직시하고
나라와 인류를 앙망하는 시야의 차이에 의해
당신의 삶에 대한 가치 평가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죄업은 아니지만
창조성의 가치에서 퇴색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행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요
그냥 한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몸뚱이만 영화롭게 지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게이츠는 악덕 사업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오로지 돈 버는 것밖에 몰라
경쟁업체를 짓밟으며 세계적 부호 1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빌게이츠는 이것이 자신의 창조적 삶이라 확신하며 만족했지만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워런 버핏은 늘 측은히 여겼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산다고 본 것이지요.
워런 버핏은 빌게이츠와 만날 때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설교하듯 했고
결국 빌게이츠는 그의 영향을 받아 마인드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사회에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복지재단을 만들어 그 약속을 하나씩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런 버핏이나 빌게이츠는 기부라는 연결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가치 있게 창조하고 영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불교에서의 보시는
전적으로 개인의 창조적 삶에 의지합니다.
절을 비롯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보시를 하면
그 액수에 관계없이 연결이 이루어지고
그만큼 삶의 무대는 확장되면서 인생의 가치가 증대될 것입니다.
보시에는 공덕도 없고 죄업도 없지만
저마다의 삶에 따른 가치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보시는 그 자체로 삶이며 수행이며 가치입니다.
요컨대 보시는 대상과의 연결이고 공명(共鳴)입니다.
당신의 삶의 무대를 더 크게 확장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시는 작든 크든 그 자체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것이 되었든
가치 있는 일에 조그마한 연결이라도 하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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