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1743. 300배 절, 신체적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요?

Buddhastudy 2021. 9. 30. 19:09

 

 

 

300배 절을 한다고 다리가 망가지는 것은 아니에요.

하루에 3천 배를 해도 다리가 괜찮은 사람이 있고

하루에 108배만 해도 다리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연골의 상태가 어떠냐? 거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다.

이런 얘기에요.

그냥 하루에 300배를 사람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연골이 다 닳은 사람이라면 108배도 하면 안 된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하루에 매일 1천 배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노인들이 도저히 절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연골이 없다 하더라도

그럼 우리가 재활할 때는 가만히 아프다고 놔두는 것보다는 그래도 움직이는 게 나은 것처럼 운동을 해줘야 한다.

 

그러면 절을 빨리하면 안 되고, 천천히 해야 합니다.

300배라도 천천히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면 천배를 해도 괜찮고

108배를 하더라도 10분 만에 빨리한다고 급히 서둘러서 하면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나쁘다.

300배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리가 아프면 관절을 조사해보고

이게 관절에 무슨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의사가 객관적으로, 그냥 절한다니까 그러면 다리에 무리가 간다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절을 많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면 절을 안 해야죠.

절을 안하는데 천천히 108배를 하는 건 안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일체 휠체어 타고 다니는 사람은 아예 못하죠.

 

그러니까 그냥 300배를 하면 좋다, 정신적으로 이겨내느냐?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의사가 이것은 하면 안 됩니다. 다리에 무리가 갑니다 하면

첫째 안 해야 하거나, 그래도 운동 삼아 한다면 속도를 줄여서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전 같으면 15분에 할 거를 30분 만에 한다든지, 40분 만에 한다든지

천천히 움직여주는 게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육체적인 것은 통증이라고 그래요. 정확하게는. 통증.

그러니까 감각이죠. 감각.

육체적 감각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통각이라는 게 있다.

다리가 아프든 어디가 아프든 하는 것은 통증에 속한다.

그러면 통증은 없는 것보다 못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통증을 싫어하는 거예요.

통증을 싫어하기 때문에 통증이 생기면 우리는 괴로운 거예요.

 

통증이 있다고 괴로운게 아니라

통증을 싫어해.

싫어하면 안해야 하는데, 싫어하는데 자꾸 나타나니까 괴로운 거예요.

 

내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자꾸 나타나면 어때요?

내가 괴롭잖아, 그죠?

그러면 이때는 육체적으로는 아무 통증이 없습니다.

 

내가 싫은 일을 누가 시켰다, 어떤 싫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면

내가 괴롭다 할 때는, 그땐 육체적 통증은 없습니다.

그때는 순수한 정신적인

싫어하는 것을 하게 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하면

정신적으로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거는 육체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육체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러면 다리에 통증만 있고,

아야, 다리 아프다이러면서 괴롭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통증만 있기 때문에.

 

그런데 통증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하는 원이 강하면

그런데도 통증이 생기면 어때요?

통증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뭐까지 있다?

괴로움이 있는 거요.

 

그래서 보통 사람은 육체적 통증이 있으면 그거로 인해서 뭐가 생겨난다?

마음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그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행하면 육체적 통증이 없어진다, 하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그건 의사가 해야 할 일이고

/육체적 통증은 있지만

정신적 괴로움은 없다.

이게 수행자가 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육체적 통증이 없어도 정신적 괴로움이 있다.

또 육체적 통증 때문에 정신적 괴로움이 있다.

육체적 통증 없이 정신적인 괴로움이 있는 것은

괴로움 없이 살 수 있고

육체적 통증이 있을 때 정신적 괴로움이 있는 것은

육체적 통증과 정신적 괴로움을 분리해서

육체적 통증은 그냥 남지만, 정신적으로 괴로움은 없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우냐? 안 괴로우냐? 하는 정신적인 문제이지

육체적 통증을 없애냐? 안 없애냐 하는 것은 수행의 영역이 아니에요.

이것은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영역이다.

 

만약 고장이 났으면 고쳐서 통증이 없어야 하고

안 그러면 진통제를 먹어서 통증을 완화해야 될 일이지.

 

 

그러면 수행자하고 수행자 아닌 사람이

육체적 통증이 있으면 차이는 뭘까?

수행자 아닌 사람은 육체적 통증도 있고 정신적으로 내 죽겠다 그러고

불평불만을 하고

수행자는 육체적 통증은 있지만, 정신적인 괴로움은 없다.

누굴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한탄하거나 이런 것은 없다, 이거야.

그냥 통증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그 문제도 좀 다른 문제이고.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리에 통증이 없어진다,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거 아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300배를 해도 다리에 이상이 없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그거는 전혀 일체유심조를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어떤, 몸에서 오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다.

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다 어디서 일어나는 거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다.

관점을 잘 잡으면 이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게 일체유심조에요./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저 사람 좋은 사람이다 할 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저 사람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을 보는 나의 인식,

그걸 좋게 보고 나쁘게 보는 것은 내 마음에 있는 거지

그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저 사람이 좋다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쁘다 하면 나쁜 사람이 된다, 이런 뜻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 좋은 사람이다,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할 때

그거는 저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좋고 나쁘고, 새것이고 헌것이고,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하는

일체시비 분별은 다 어디서 일어나는 거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다.

이게 일체유심조에요.

 

/이때 일체라는 게 뭐냐?

시비분별을 말하는 거예요.

모든 시비분별은 다 어디에서 일어난다?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걸 자꾸 여러분들이 잘못 보고,

여기 컵이 있는데 이걸 금이다 하면 금이 되고

이게 은이다 하면 은이 된다.

칼이라면 칼이 된다,

이게 일체유심조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얘기에요.

 

아픈데 안 아프다라고 생각하면 안 아파지고

그런 것은 엉뚱한 생각입니다.

전혀 일체유심조에 관계가 없는 거요.

 

일체의 시비분별은

또는 대승적으로 말하면 일체의 상은

일체 형상지어진 것은

다 어디서 일어나는 거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허망한 거다.

실체가 없는 거다.

이게 일체 유심조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