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현스님_불설아미타경

정현스님 _ 제39회 수락무염원 (19_38)

Buddhastudy 2012. 10. 21. 22:48

  방송 보기: 불교TV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 법문은 49쪽에 보면, 39번째 受樂無染願수락무염원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역시 말씀드린 것처럼 법장비구 스님의 원력으로 받아가진 것 중에 가장 큰 내용이 수락한 것입니다. 즐거움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그 발원이고, 수행이고, 염원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거든요. ‘~ 자기는 왜 이럴까?’ 이렇게 생각을 해요. ‘왜 나는 모자랄까?’ 이럴 수 있거든요. ‘나는 왜 이렇게 시원찮을까?’ 이런 생각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 80% 이상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산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다른 말로 불교식으로 표현할 때는 무명이다. 이렇게 말해요. 밝음이 없기 때문에 어둠이거든요.

 

그러니까 본래 밝은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고, 깨우치게 되고, 느끼게 되고, 받아들일 줄 알게 되면은 거기에는 무한광명이, 저 아미타불의 세계의 광명이. 그래서 불설아미타경에는 무량수 무량광 이렇게 표현했잖아요. 한량없는 빛과 한량없는 생명을 거기 얘기하시는 거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한테 어둠이라는 것이 자꾸 생겨요. 어둠이라는 것은 곧 생활 속에는 생활고잖아요. 먹고 사는 문제, 인과의 문제, 또 살아가면서 편안하지 않은 것.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거를 무명이라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밝지 않기 때문에. 밝은 게 없기 때문에 어둠이 있다는 거에요. 너무 쉽죠. 좀 쉬우니까 움직여야 돼.

 

수많은 사람들이 _이거를 받아들인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이거를 뭐라고 그러냐 하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받아들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명료한 정리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잣대라고 그럴까요? 평가라고 그럴까? 자기의 삶에 대한 측도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행복이다라고 하는 측도라고 하는 것이 있겠죠. 그런데 어른들의 중심으로는, 또는 어린아이를 전부 조사를 해보면은 거의 80% 이상이 행복하다. 이래야 되는데, 행복하지 않다.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에 우리나라에만. 으음. 이것을 살펴보면은 행복하지 않다라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이것은 없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이거는 이렇게 붙이면은 無明_밝음이 없다. 이런 뜻이거든요. 밝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밝음이 없기 때문에 이게 뭐죠? 어둠이라는 것이 생기고, 이걸 장애.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요걸 장애라고 말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어두운 인생이다. 이렇게 어둠이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어둡다. 이렇게 표현하시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밝은 것인데, 본래 행복한 것인데, 밝은 것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뭐라고 표현해야 되요? 무명한 거에요. 장애가 있어. 그러면 여기 뭐가 쫓아 다니냐 하면 사람한테 실패가 쫓아다니고, 그러고 또 뭐가 쫓아다니느냐 하면 사람한테는 뭐가 생겨요? 불안이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쫓아다니면서 나타나는 것이 전부 뭐냐 하면 편안한 것을 어디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술을 마셔도 안 편하고요. 차를 마셔도 안 편하고, 극장에 가서 봐도 안 편하고. 드라마를 봐도 한쪽에 걱정이 되고. 우리가 삶이 다 그렇게 밝음이 없는 곳에 매달려서 밝은 것을 보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단 1%라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 1%라도 긍정을 가지면 마음에 대긍정을 갖는 거에요. 부정하지 않는 거에요. ‘~ 이래도 다행한 거구나’. ‘이래도 감사한 거구나.’ ‘~ 이래서 내가 행복한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출발해 갈 때 비로소.

 

그러니까 , 감사합니다.’ ‘, 그렇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한테는 뭐가 있어요? 밝음이 있죠. 밝음이 있는 사람한테는 무조건 뭐가 깃들어요? 행복이 빛이 거기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건 그냥 법칙이에요. 그래서 뭐를 받아 들이냐 하면, 풍요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되요. 어려운 일들에 봉착한 것들도 전부 자기가 받아들인 거거든요. 어디선가 자기가 받아들였어요. 끌어왔어요. 자기 마음 자체 세계가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인생이 사는 것이 늘 불행하고, 늘 슬프고, 늘 외롭고. 늘 고역스럽고, 또 뭐가 쫓아다녀요? 늘 우울한 상태에서 그런 것들을 전부 뭐라고 그래요? 어둠이에요. 어둠을 뭐라고 표현했냐하면 밝음이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밝기만 하면 무명이 어둠이 없어져 버리겠네요. 그죠?

 

밝아지기만 하면 좋아지겠네요.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39번째 받아들여서 공부하실 내용이 뭐냐 하면 너무 쉬운 게 이게 이걸 락이라고 표현하잖아요. 이걸 락이라고 그러잖아요. 受諾수락이에요. 즐거움을 받아들여라. 이런 뜻입니다. 아니 이게 수락이라고 그래요.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이런 뜻입니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아주 주저해요. 그러니까 내가 즐거워하면 안 되지. 이렇게 생각해요. 부처님 앞에서 기뻐하면 안 되지.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이러면 안 돼요. 기뻐해야 돼. 기뻐해야 돼. 우리 쉬운 말로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이분 만나가지고. 내가 이 인간이라는 말은 빼기로 했어요.

 

그래서 만나가지고 즐거운 것을 많이 받아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게 뭐가 있느냐고 물어요. 해준 게 뭐냐 이러고. 으음. 그런데 그렇게 계속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은 가지고 있는 표현양식이 밝음이 없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자꾸 어두워진 말을 하게 되고, 어두운 표정을 하게 되고, 어두운 의식을 갖게 되고, 어두운 생각이나 어두운 감정이나 어두운 느낌을 자기 안에 계속 가지를 채워가고 있는 동안 저놈의 밝음이라는 게 있을 리가 있겠어요밝기만 하면 우리가 뭘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즐거움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수락이니까. 이건 제가 다시 할 뿐이지, 실제로는 다 석가세존께서 2,500전에 이미 해 놓으신 말씀이에요. 다 자기가 밝아지는데 굉장히 초점을 가지셔야 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뭘요?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이때 불설아미타경에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것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해요? 현실, 이게 뭐죠? 이걸 보고 뭐라고 그래요? 현재. 그렇죠. 그죠. 현재고 현실이에요. 그다음에 이런 말을 다시 뭐라고 말해요? 현상이라고 그래요. 현실을 어떻게 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금 현실. 현실은요, 이게 지금 현재에 무한한 공덕의 터입니다. 현실, 이 자체가 살아있는 자체가 공덕세계에 사는 거에요. 안 그러면 지금 여기서 공부 못 들어요. 그나마도 TV라고 하는 위대한 매체가 있어가지고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거에요. 하찮게 생각하지 말고 잘 들여다보면, 자기 현실이 전부 뭐라고요?

 

공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매개를 갖고 있는데 그런데 그게 왜 자기 현실에서 생기지 않는가? 즐겁지 않은 거에요.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즐겁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 현실의 공덕이 현실에 건너오지 못하는 거에요. 되시죠? 그죠? 현실을 이거를 즐거운 세계라고 말해야 되겠죠. 즐겁게. 이게 맞죠. 그죠? 이게 뭐죠? 우리가 다함께 뭐죠? 기쁘게. 그렇죠. 그죠. 마음속에서 느껴져야 돼요. 그죠. 이게 뭐냐 그러면, 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랑스럽게,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그죠? 기가 막힌 것들을 우리들의 마음작용은 어디서 찾아오는지를 보지 못하는 거에요. 요렇게 말해야 돼요.

 

현재에 큰 복을 짓는 거에요. 이걸 보고 뭐라고 그러냐 하면, 현재에 착복의 세계에요. 엄청난 복을 지을 수 있어요. 현재, 현상에 나타나는, 보이는 것을 뭐든지 뭐죠? 현상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복락으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너무나 중요한 것이. 공덕과 복을 지어야 되. 작복이에요. 이것은 짓지 않는 일은 생기지 않아요. 지워졌어. 복을 짓는 거거든요. 이것은 짓는 복이라고 그러거든요. 복을 지어야 되요. 현재에 복을 짓지 않으면 현상에 보이는 것은요, 전부 누리는 복이에요. 누리는 복. 사용하고 있는 복인 줄 알아야 되요. 그런데 이게 건너오려면 작복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에서 뭐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현상은 다 뭐죠? 나를 위하고 나를 보살펴주는 부처님의 위신력의 현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게 잘 안 보이시거든요.

 

그래서 다른 데서 보면 이게 뭐냐 하면 오늘 귀인을 만난다. 이러잖아요. 귀인의 세계. 법연의 세계라.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이거를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법연의 세계다. 이렇게. 진리의 인연이 넘치는 것이 현상이다. 이렇게 봐요. 절대 나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자기 현실을 절대적으로 나쁘게 보지 않아야 되요. 그러니까 절대 요걸 밖으로 가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시면 어떻게 돼요? 가족을 절대 나쁘게 보시면 안 됩니다. 가정 안에서 가족들끼리 미움도 생기고, 행복도 생기고, 편안해지니까 울고불고 싸우고 난리지. 지나가는 아저씨랑 싸울 일이 있어요? 없어요. 절대 없어요.

 

그러니까 깊이 잘 보셔야 돼. 그래서 지금 현상이 지금 현상이 나타나 있는 우리 현상을 요거를 뭐죠? 진리의 인연이라고 봐야 되요. 그럼 진리의 인연은 어떻게 봐야 되요? 즐겁게 받아들이는 거에요. 즐겁게. 기쁘게 받아들여야 돼. 그다음에 사랑스럽게 봐야 돼. 그 끄트머리에 하나 더 +하면 뭐죠? 뭐든지 , 감사합니다.’ 단호하게 정리가 딱 되요.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냐 하면 이건 수락이잖아요. 받아들여야 돼. 뭘 받아들여요? 석가세존이 이렇게 말했어요. ‘아무리 고난이 있고 아무리 장애가 있고 칼산 같은 앞날에 산이 있어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서 행하는 거에요. 걸어나가는 겁니다. 하나하나씩.’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도 빗 사이로 싹~ 가야 돼. 뛰어야 돼.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많아요.

 

그런데 이것이 이 짓는 복의 현상은 전부 뭐라고요? 다 불성 세계라는 거에요. 이게 얼른 접근이 잘 안 되시는데, 이게 모든 복을 짓는 것이 이것을 뭐라고 표현 하느냐 하면 우리가 아는 것에 뭐라고 표현해요? 불성의 세계라는 거에요. 전부 불성의 세계. 이거를 우리가 표현하는 것을 전부 불성세계라고 표현하거든요. 전부 불성세계에요. 다 복을 짓는 거에요. 그러면 이게 어디 있어요? 현전이에요. 현실에서 복은 저절로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현실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현실. 지금부터 풍요로워지고 지금부터 예뻐지는 거에요. 실제로 그리된다니까. 제가 요거를 다 무슨 간증이니 앙증이니 이런 거 있잖아요. 수험기도 공덕문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거 될 거 없이 이미 벌써 우리 삶 속에 그대로 그 힘을 자기가 스스로 알아야 되요. 이렇게 법문을 듣고도 좋은 짓을 안 하고 좋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좋게 사랑스럽게 안목을 뜨지 못하고 쫓아다니지 못한다면은 후퇴에요. 후퇴. 후퇴하거나 말거나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처님 법을 일체 모든 중생을 위해서 석가세존이 성불하시고 깨우친 분이시거든요. 그러니까 저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도움을 주고 있고, 나를 지켜주시는 원동력이라는 거에요. 요렇게 하나씩 정돈이 되시면 기쁘게 즐겁게 받아들이면 무염원이라는 거에요. 무염. 뭐가 생겨요? 무염이라고 그랬죠. 거기 있습니다. 보세요. 그죠.

 

참 재미있는 말인데,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 글자는 뭐냐 하면 염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생겼죠. 이건 염이라는 거에요. 물들지 않는다는 거에요. _요건 물든다는 뜻이고 無染_요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럼 뭐냐 그러면요, 지금 받아가진 이 락은 절대 물들지 않는다는 거에요. 소멸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안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른 복은 바른 공덕을 지은 것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염. 물들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뜻은 여러 뜻이 많은데, 시간상 다 설명드릴 수 없고, 물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뭘 가져야 된다고 그랬다고 그랬죠? 원이 있으셔야 돼. 지금 거꾸로 써서 정신이 없거든요. 이게 원이에요. 원력이에요.

 

이렇게 원력을 갖는데 물들지 않는 원을 세우셔야 돼. . 원력을 딱 세우고 물들지 아니하는 것. 물들지 않는다는 건 뭐에요. 잘못되는 일이 좀 있어도 거기에 탐착하고 매달려서 너무 시름 고통하지 말고, 대충 그냥 망한 재스추어를 하고 나서, 오랫동안 물들어 있으면 안 되거든요. 탈탈 털고 ~ 내가 부처님 제자인데. 부처님의 가호지력이 나한테 작동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원을 딱 세우고 돌아서서 일어서는 거에요. 무염이에요. 절대 물들지 않는 거에요. 그 얘기는 연꽃 얘기죠. 그죠. 연꽃은 전혀 물들지 않잖아요. 잎에 물 올려놓으면 또르륵 떨어지잖아요. 물에 살되 물에 물들지 않잖아요.

 

우리 여기 살되 극락에 살되, 지옥에 물들지 않는 거에요. 이게 한 번만 갖추어지고 한 번만 이해되고 한 번만 깨우침이 자기 마음속에서 쉬운 말로 헷가닥~ 한 번하고, 어려운 말로 하면 아주 깨우침을 얻어서. 이렇게 무염이에요. 물들지 않아요. 그런데 어디서 온다고요? 원을 세우는 사람한테 절대적으로 물러나지 않는 원동력이 생기시는 거에요. 너무 좋다. 좋은 얘기에요. 이 글을 며칠 전부터 들여다보거든요. 앉아서 관하고, 앉아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물들지 않는 걸 봤어요. 내가 잘못할 수도 있어요. 내가 실패할 수도 있어요. 악한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남을 가슴 아프게도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거기에 매달려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