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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독일문화 완벽정리 & 메르켈 총리, 슈테피 그라프

Buddhastudy 2022. 5. 25. 19:14

 

 

 

7. 문화

독일의 문화는 특정한 도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있습니다.

각각 독특한 지방색을 보이면서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 예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독일문화의 특색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1년 내내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나라입니다.

전통 민속축제부터 뛰어난 음악가를 기념하는 음악제,

종교적 축의를 기념하는 종교축제 등 풍부한 행사들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가 바로 매년 9월 세 번째 토요일 정오부터

10월 첫 번째 일요일까지 뮌헨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입니다.

 

독일국민은 물론 전 세계에서 7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독일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181010월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1세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에서 시작된 옥토버페스트는

1883년 뮌헨의 맥주 회사들이 축제를 후원하면서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축제로 발전되었습니다.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가 옥토버페스트라면

쾰른에서는 매년 11월에 열리는 쾰른카니발 축제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쾰른카니발은 세계 3대 카니발의 하나로

수십 개의 카니발 단체가 참여해 3개월 동안 다채로운 행사를 펼칩니다.

 

또한 매년 10월에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세계최대규모의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이 열립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 발전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도서전은

매년 가을 5일 동안 펼쳐지는 세계적인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습니다.

 

축구는 독일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 종목입니다.

1900년 독일축구협회가 설립되었고

20세기 초 바이에른뮌헨, FC샬케04와 같은 축구 명문 클럽들이 잇따라 창단되면서

독일축구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축구의 인기는 잠시 주춤했지만,

전쟁 이후에는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고

2차대전 이후 축구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독일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1954년 처음으로 스위스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치를 때까지 단 3번을 제외하고

모두 16강 진출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독일 축구대표팀은 이른바 '전차군단'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요.

뛰어난 조직력과 팀워크, 빈틈없는 수비력과 힘 있는 경기를 펼치는

강력한 독일축구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독일의 프로축구리그인 분데스리가는

1964년에 16개의 클럽으로 시작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수준 높은 리그로 명성이 대단합니다.

 

전 세계의 축구리그 중 평균 관중 수가 가장 많아

재정자립도가 높기로 유명한 분데스리가는

매 시즌마다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팬들이

가장 열광하는 높은 수준의 축구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실용성을 중시하고 각 지방의 특색이 강한 독일의 국민성은

독일의 식문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각 지방마다 즐기는 음식은 물론, 조리법과 먹는 방법도 각각 다르며

맛의 차이도 뚜렷하다고 하는데요.

 

겨울이 길고 농사가 어려운 자연환경 탓에 독일에서는 겨울 보존 식량으로

돼지고기를 활용한 저장식품들이 발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독일 소시지였습니다.

 

소시지는 부위별로 자른 뒤 남은 돼지고기를 갈아서

돼지 창자 등에 넣어 만든 식품으로

독일인의 절약 정신을 볼 수 있는 전통음식입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조리법과 재료로 소시지를 만들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도 맛이 뛰어나고 다양한 종류의 소시지를 맛볼 수 있습니다.

 

독일은 '맥주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맥주와 뗄 수 없는 나라인데요.

세계 1위의 맥주 소비국일 뿐 아니라,

5,000종 이상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식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에게는

맥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에 가까웠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년에 독일인 한 명이 마시는 맥주는 평균 127.4L,

하루 평균으로는 약 350ml 정도라고 합니다.

 

독일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 맥주 양조장이 있어서

각 지역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맥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1615년 빌헬름 4세가 독일 맥주순수법을 제정해

맥주 양조를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했는데요.

이는 국민들이 식음료로 마시는 맥주에

해로운 성분이 첨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는데

지금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철학은 음악, 문학과 함께 독일의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너무 이론적이라는 박한 평가를 받을 때도 있지만

사색과 철학은 독일인들에게 오랜 역사적 전통 중 하나였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 바탕을 두고 발전된 독일철학은

18세기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거쳐, 19세기 관념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후로 격동의 역사를 겪으면서 니체,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는 전 세계 철학에 큰 업적을 남긴 유명한 철학자들을 다수 배출했습니다.

 

 

 

8. 인물

독일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앙겔라 메르켈과 슈테피 그라프가 있습니다.

우선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독일 총리인 메르켈 총리는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4년 연속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이기도 하였으며

2015년에는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메르켈은 1954년 통일 전 서독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교회목사였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성장기 시절은 동독에서 보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동독 출신이라고 합니다.

 

당시 동독에서는 공산당이 국가를 통치하고 있어 종교에 인색했던 탓에

메르켈 가족은 그다지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없었지만

메르켈은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동독 정부에서 거듭 메르켈에게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입당을 요구하는 등

그녀를 정치계에 끌어들이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메르켈은 정부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물리학에 매진하여 양자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렇게 한눈팔지 않고 학업에 매진했던 메르켈은

독일이 통일된 뒤에도 자신의 커리어에 전혀 손상을 받지 않고

매끄럽게 독일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

 

메르켈의 정치입문은 1989

동독 민주화 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 그녀는

1990년 동독 과도정부 대변인으로 임명되었고

통일 후 치른 첫 번째 총선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37살의 나이에 여성 청소년부 장관을 거쳐, 환경부 장관,

기독민주당 최초의 여성당수 겸 원내총무에 오르는 등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나가다가

2005년 총선에 승리하며 독일 최초의 여성 연방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계 경제 대국인 독일의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근검절약하는 정신과

물리학자 출신다운 냉철하고 실용적인 리더십을 겸비하여

국내외에서 끈기있게 주요협상을 이끌어내며

중요한 순간에는 과감한 결단력을 보이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 출신이면서도 폭넓은 정치적 판단으로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을 통해

보수와 진보 균형을 맞추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평소 열혈 축구팬을 자처했던 메르켈 총리는

페이스북에 독일의 축구 패배를 아쉬워하며 올린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18FIFA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독일축구국가대표팀이

조현우, 손흥민 선수가 맹활약한 대한민국에 2:0으로 패하여

월드컵 탈락이 확정된 날이었습니다.

 

 

독일의 또 다른 유명한 인물로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여자선수라는 슈테피 그라프가 있습니다.

슈테피 그라프는 남녀 테니스 선수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한 해에 4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캘린더 그랜드슬래머'이기도 합니다.

 

1969년 태생의 슈테피 그라프는

어린 시절 자동차보험 판매자이자 테니스코치였던 아버지

페터 그라프로부터 처음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슈테피 그라프는 3살 때부터 나무라켓으로 스윙하는 법을 배웠고,

4살 때부터는 코트에 나가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5살이 되어 첫 대회에 참가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을 한 후

테니스 유망주로 떠오르며

12, 18세부에서도 우승을 하게 됩니다.

 

슈테피 그라프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프로테니스 선수 랭킹 100위 안에 들게 되고

16세 때는 세계 랭킹 6위가 되었으며

다음 해 LA 올림픽에 서독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인 페터 그라프는 슈테피 그라프가 유명해지면서

초청받은 대회행사나 모임 요청 등을 모두 거절하며

그녀가 오로지 훈련에만 매진하도록 도왔습니다.

 

청소년 시절 꾸준히 실력이 성장하던 그녀는

17세 때 당시 여자 테니스계를 양분하고 있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와 크리스 에버트에게 패배하며 슬럼프를 겪기도 하였으나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그해 4월 생애 첫 WTA 대회 우승컵을 안게 됩니다.

 

이후로 슈테피 그라프는 테니스 여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됩니다.

슈테피 그라프는 1988년과 1989, 2년 동안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요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 20세로 매우 어린 나이였지만

출전했던 대회에서 96%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며

그랜드슬램을 싹쓸이하고 올림픽 금메달도 거머쥐었습니다.

 

특히 1988년에 테니스의 4대 그랜드 슬램 대회인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을 모두 우승하면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캘린더 골든 슬램을 달성하게 됩니다.

 

프로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 총 337주 동안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하며

남녀선수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지킨 그라프는

은퇴하던 해인 1999년에도 프랑스 오픈 우승을 거머쥐며

세계 랭킹 3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년 동안

그랜드 슬램 대회의 절반 이상의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그라프는

지금까지도 테니스의 전설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