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1장 수행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Buddhastudy 2022. 10. 6. 19:26

 

 

 

修始下心分

수행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숲에 있는 급고독원에서

수행승 12,000명과 함께 머무르셨다.

 

그 당시 세존께서는 식사 때가 되면 으레 가사를 거친 후 바루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셨는데

그곳에서 차례를 지켜 공양을 받으셨다.

 

그리고 본처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남김없이 잡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좌정하셨다.

 

 

 

-단예선사 解義-

본장에서는 세존의 평상시 공양하는 모습을 하루에 걸쳐 무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언뜻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모습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이면에 담긴 뜻은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세존이라는 말은 세상에 둘도 없는 존귀라는 뜻이다.

그렇게 위대하고 특별한 존재인 그가

여느 승려들과 평등하게 공양을 취하는 모습은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걸식을 하고 차례를 지켜 공양받는 모습은

세존의 거룩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이 시점에서 한번 우리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자.

나는 여러 면에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식사를 하거나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여기서 더 나아가 최대한 낮은 위치에 임해

걸식을 하며 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세상은 사회적 지위에 의해 계층이 나눠지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 규범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타인을 만날 때면 부지불식중 서로의 위치를 비교하고, 서열을 정하여

그에 맞게 움직인다.

분별에 잔뜩 길들여져 있는 모습

이것이 소위 중생이라 불리는 일체 대중에게 드리워진 서글픈 자화상이다.

 

불교는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부터 가볍게 해야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는 결코 영적 성장을 기할 수 없고

더군다나 일체의 분별을 초월하여 해탈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거운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아집을 말한다.

아집이란 마치 힉스입자가 질량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것의 세기에 비례하여 마음을 무겁게 한다.

 

중생이 짊어진 고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집의 무게 때문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런 짐을 과감히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아집을 등에 메고 수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맨몸으로 정상에 오르기가 버겁고 요원한 데 짐을 잔뜩 져서야 쓰겠는가.

 

세존은 바로 이 점을, 몸소 탁발을 통해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 나라의 태자였고, 이제는 만인이 우러러 받드는 부처가 된 그가

비렁뱅이처럼 걸식하고

그것도 모자라 차례를 지켜 순서대로 공양을 받는 모습은

얼마나 그가 낮아져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 낮음은 삼라만상을 다 담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낮음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낮음을 일러 해인이라 한다.

 

이것은 바다가 하늘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처럼

삼라만상 모든 것을 제 모습 그대로 왜곡 없이 담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해인은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어 만물의 바탕을 이룬다.

부처의 마음이 꼭 이와 같다.

세존이 몸소 보여주는 하심의 경지

그것을 잊지 않고 본받으려는 데서 뭇 수행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