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 6. 깨달음의 6가지 함정(3)

Buddhastudy 2023. 4. 12. 20:18

 

 

 

4. 위빠사나를 통해 알아차림만 남다.

 

적잖은 수행자들이 불법을 위빠사나로 알고 있다.

싯다르타가 중도의 상태에서 위빠사나를 가지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위빠사나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알아차림’, ‘마음챙김’, ‘바로 보기정도가 된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니

마음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을 무엇이 온통 메우고 있는가?

바로 생각이다.

그러니 생각에 대한 관찰은 수행의 태동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각의 집착력은 너무나 강하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으로 표현한다.

생각의 에 대항해 봤자 백전백패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로 떼려는 대신 그것을 살피는 관찰함으로써

생각의 이 느슨하게 하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대상과 분리되면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상태가 된다.

이때 새롭게 발견되는 자아를 일러 참나라 하고

일종의 깨달음으로 취급한다.

이렇게 생각을 관찰하여 대상과 분리하고

이로써 드러나는 생각의 바탕 자리인 참나를 깨닫는 수행이 위빠사나이다.

 

 

그런데 실제로 위빠사나에 매진하다 보면

앞서 말한 공식대로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탐진치 삼독이 약화되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는 어렵지 않게 얻지만

생각이 끊어진 자리까지 찾아 들어가기엔 그리 녹록지가 않다.

여기서 새로운 접근법을 찾은 게 苦行이다.

 

육신을 괴롭게 하면 마음은 저절로 그 고통으로부터 떨어지려 한다.

고통을 외계의 대상으로 놓음으로써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빠사나에서 추구하는 생각과의 분리가 일어난다.

일리는 있지만 오늘날엔 사람들의 관계망이 복잡하게 얽히게 됨으로써

구태여 고생을 위빠사나에 접목시킬 필요가 없다.

번뇌망상이 들끓는 인생살이 자체가 고생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를 흔히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세존의 깨달음 이전부터 있었고

이런 점을 떠나서 수행이 있는 곳엔 으레 생겨나는 기본적인 수행법이다.

싯다르타가 첫 번째 스승으로부터 배운 고행에도 위빠사나가 담겨 있지 않았던가.

위빠사나의 유래가 어떻든 간에 깨달음에 효과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소승불교에서는 참선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으로 위빠사나의 우수성을 대변한다.

참선을 통해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머물던 수행자가 깨어나면서

다시금 번뇌를 지피게 되는 사례가 그것이다.

 

마음이란 것이 아무리 적멸의 상태가 되어도

바람이 불면 잔잔했던 수면에 파도가 이는 것처럼

외계의 정보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면

번뇌의 물보라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세 명의 스승에게 의지해서 수행할 때 실패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위빠사나는 수면과 바람, 그리고 파도로부터 떨어져 실상을 관찰하기에

대상이 꾸며내는 허상에 휩쓸리지 않는다.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의 이합집산을 살핌으로써 반야를 키우고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거를 들어 위빠사나가 참선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지만 생각이 일으킨 대상과 분리되면서 찾게 된 새로운 자아(참나)4차원적 존재이다.

3차원의 대칭성에 의해 어느 한쪽으로 결정되는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워진 초대칭적 자아이다.

그렇기에 엄밀히 말한다면 참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영성이나 신성의 회복 정도로 봐야 한다.

 

물론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영성을 회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출가 수행자들도 힘겨워 할 정도의 난해함이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위빠사나를 통해 참나를 찾았다면 실로 경탄하고 축하할 일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 얻어진 깨우침을 견성이나 성불로 확대 해석하는 건 곤란하다.

 

초기불교에서 수행자의 대부분이 위빠사나로 수행하다가

점차 다른 수행법을 도입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로 얻게 되는 지극한 알아차림의 경지로는

구도에 대한 갈증을 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얻게 되는 참나의 경지

그건 깨달음으로 향하는 디딤돌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위빠사나에서 언급하는 참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아(불성)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한글과 한자라는 차이를 빼면 의미적으로 똑같다.

하지만 그 용도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참나는 힌두교의 아트만에 가까운 반면

진아는 아트만과 브라만을 합쳐 놓은 개념이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한번 설명하겠지만

아무튼 위빠사나의 참나는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에 위치한 순수 영혼을 가르킨다.

자연스럽게 깨달음의 문턱이 낮아지는 특징이 있다.

 

이에 반해 진아는 참나에 더해 무량한 반야를 증득하고

절대나 해탈의 경지마저 넘나드는 완전한 깨달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참나는 주로 열단계로 등급을 나누게 되고

진아는 많아야 견성과 성불 정도로 구분한다.

 

대중적인 영성자각 운동에 있어서는 고난도의 진아보다 위빠사나의 참나 찾기가 적합하다.

그래서 근래 들어 가장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수행 가운데 하나가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를 통해 참나를 일깨우고자 하는 수행 문화는

재가 신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사회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기라성 같은 힌두의 구루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위빠사나를 통한 영성 회복을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의 참나 찾기 운동이 더욱 왕성해져서 인류를 교회시켜 나간다면

가히 영적 혁명이라 하겠다.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저물고 영성 인류인 호모 데우스의 시대가 도래한다고나 할까.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역사를 보면 중생들을 계몽하다가 오히려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위 말하는 견성 공장이다.

몰라를 주입시켜 순간적으로 멍한 상태가 되면

그것을 가지고 참나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어떤 돌발 상황을 맞으면 생각이 순간 방향을 잃어 멈칫거리게 된다.

지감이 되든지 아니면 멍때리게 되는데

이때의 무심을 참나로 포장하고 견성의 상표를 찍는 것이다.

 

이처럼 허접하기 짝이 없는 상품이지만

에고 마케팅만 잘하면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

중생들의 에고를 부추기면 그들은 그것을 믿으려는 쪽으로 마음이 이동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것을 주장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따른다.

여기서 종교적 추종심이 생겨나 변질되는 것이다.

이것이 견성 공장의 함정이다.

중생들의 아상을 부채질하여 결국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전형적인 사이비들의 전략이다.

 

 

오쇼 라즈니쉬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명실상부한 참나 찾기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런데 추종자들이 많아지자 그는 미국 오레곤주의 64천 에어키의 땅을 사서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리곤 갱단을 방불케 하는 온갖 패악을 저지르다가 FBI에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라즈니쉬의 추종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당국은

그를 인도로 추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가 얼마나 위험인물이었으면 당시 20여개 나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렇다면 라즈니쉬의 참나는 어떻게 조폭이 된 것일까?

그 참나는 바로 그들의 에고가 만든 허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즈니쉬의 사례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한다.

참나를 영성 회복을 넘어 깨달음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의주시해야 한다.

라즈니쉬의 전철을 밟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문턱을 너무 높여 특정인만의 전유물이 되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문턱을 너무 낮춰 버리면

그건 구원을 내세운 일종의 종교가 돼 버린다.

참나 참나~’ 하여 깨닫는 것과

주여 주여~’ 하여 구원받는 것이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물론 혹자는 벽암록이나 심신명, 대승기신론.. 등을 언급하며

참나의 절대성을 주장할 것이다.

사실 그 경전들은 세존이 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설령 붓다가 말했어도 상식과 논리에 어긋나면 고개를 저을 줄 알아야 한다.

 

 

요컨대 위빠사나 수행은 대중들의 영력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있어서

대단히 탁월하며

인류의 정신문명에 꼭 필요한 수행이다.

다만 여기서 얻어지는 참나의 경지를 가지고

붓다의 깨달음으로 과대포장하게 되면

자칫 아상을 부채질하여

기껏 이룬 수행의 성과가 퇴색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