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 7. 깨달음의 6가지 함정(4)

Buddhastudy 2023. 4. 13. 20:15

 

 

5. 무아지경에 이르다.

 

조사들의 어록에 보면

깨달았다고 말하는 수행자들을 주장자로 내리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수행자가 아픔을 호소하면

지금 아파하는 놈은 누구인고?”하면서 일침을 가한다.

특별히 깨달음을 거론하지 않아도

수시로 몽둥이를 날리거나 욕설, 고함을 해대는데

이런 언행들은 모두 참된 본성을 깨우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무아에 빠져 자성을 망각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나 할까.

 

사실 사마타 수행에 깊이 몰입하다 보면

물론 쉬운 건 아니지만 간혹 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 없으니 생로병사가 없고 나아가 시공도 없다.

소멸될 가 없으니 영생이고, 일체의 번뇌망상이 없으니 열반이 아니랴.

얼핏 보면 무상의 경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를 없애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행의 교본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심이 되어 나가 없어지면 그것이 깨달음인가?

깨달음은 마음을 비웠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아의 경지는 그냥 일정 시간 동안 생각이 멈춤으로써 일어난 고순도의 망각 현상에 불과하다.

비유하자면 돌멩이처럼 되었다고나 할까.

마음이 꽤 편해진 정도의 효과는 있지만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다.

 

남방불교의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에 보면

무아의 경지를 멸진정이라 하여 깨달음에 버금가게 다루고 있다.

얼마나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갔으면 7일 이내에 삼매에서 나올 것을 다짐하고

수행한다고 한다.

일례로 인도의 수행자 라마나 마하르쉬 같은 경우는

삼매에 한 번 들어가면 거의 시체처럼 될 때까지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깨우지 않았으면 죽어도 여러 번 죽었을 것이다.

이토록 무아 수행의 멸진정은 여느 수행자가 쉽게 범법할 수 없다는 높디높은 경지임에 분명하다.

 

 

사실 무아론에 대한 시빗거리는 꽤 많다.

논란의 시작은 초기불교에서부터이다.

초전법륜경에 보면 싯다르타가 중도로써 무아를 깨달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무아가 깨달음의 핵심 소재이고, 그렇다 보니 무아를 중심으로 다룬 무아경도 나와 있다.

힌두교의 아트만(참나)에 대비해 싯다르타가 제법무아의 가치를 들었고

이 때문에 무아가 되려는 수행은 불교에 유행처럼 번졌다.

 

어차피 없어질 나를 미리 부수어 완전히 소멸하려는 쪽의 수행,

여기에 큰 이견은 없었다.

그러다 훗날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열반에 상락아정을 그려 넣었다.

무아가 아닌 청정법신의 진아가 불성이라는 주장이 은연중 대두된 것이다.

 

이렇게 보니 수행자들 사이에선 초기불교의 무아를 따르기도 하고

대승불교의 진아를 추구하기도 한다.

중도론자들은 그 둘을 한꺼번에 취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체무애나 응무소주를 들어 그 둘을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답인가?

 

 

단언컨대 무아 수행이든 진아수행이든 아니면 그 둘을 통합한 수행이든

모두 어긋나 있다.

그것들이 수행의 한 갈래인 것은 맞지만 깨달음까지 쭉 이어진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불교의 모든 수행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행자들이 해오는 수행은 불교 수행이 아니지 않은가.

거듭 말했듯 그건 싯다르타가 출세하기 전에 이미 인도 전역에서 행해지던 수행이다.

 

 

아트만(참나)을 찾아 브라만과 합일하려는 수행과

아트만을 부정하고 에고를 철저히 부수어 무아로 돌아가려는 수행

그리고 이 양단의 수행을 적절히 가미해 펼쳐지는 숱한 중도의 수행들...

싯다르타는 이런 부류의 수행들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없었던 전혀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세상이 알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수행법, 그것이 바로 불법이다.

불법이 나옴으로써 불교는 독자적인 가르침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불법이 뭐냐고 물으면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불교의 태동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힌두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승려들은 위빠사나 수행을 불법으로 알았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 위주로 했다.

자신의 상념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지로 나아갔다.

하지만 평생을 바쳐 수행해도 딱 거기까지였다.

번뇌망상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는 있지만

이런 정도의 마음 수양으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었다.

 

 

깨달음이 열리지 않자, 다시 수행자들은 힌두교의 다른 수행에 눈을 돌렸다.

무아와 진아로 대표되는 사마타와 참선 수행이다.

무아와 진아는 마치 동양철학의 음양처럼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명제이다.

이것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정말 장쾌하지 않은가.

 

피조물인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없애 무로 돌아가는 수행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없앴는데도 남아 있는 초지성의 진아

이 두 명제를 향한 수행은

초월로 몰아가고 더 나아가 해탈까지 쭉쭉 안내해 준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의 뜨뜻미지근한 것에 비하면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 무아와 진아 수행이 위빠사나를 어느 정도 밀어내고

불교 수행의 대간을 차지하게 된 건 필연이었다.

 

 

싯다르타가 부정했던 힌두교 수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불교 수행자들..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이리 가든 저리 가든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된다.

하지만 무아 수행을 하든 진아 수행을 하든 깨달음은 요원하다.

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냥 정진만 할 뿐이다.

 

무아 수행과 진아 수행

그건 깨달음과 가장 흡사한 형태의 의식 상태를 구현한다.

그만큼 대단한 공효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깨달음을 성취하기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오온이 개공하여 일체 무상함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에 따라 합성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결국은 뿔뿔이 흩어져 없어질 허망한 것들이다.

실체가 텅 비어 없듯, 나 또한 그렇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아를 이루게 되면 깨달음이라 한다.

 

금강경에 나오는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게 된다는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음을 인식하고 무아를 입버릇처럼 거론한다.

 

제상이 공하여 무아이고

이것의 관점에서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 깨달음이라면 절 밥 3년이면 모두 다 성불했을 것이다.

 

불성의 정수라 여겨지는 무아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마음이 텅 비면 본래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백날 마음을 비워 봐도 그 구조상 깨달음은 열리지 않는다.

무라는 개념엔 유가 대칭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무아는 그 자체로 상대적 분별이다.

그래서 무아나 그것에 대한 어떤 현상을 인식하는 순간 왜곡된 허상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게 된다.

 

대칭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무아는 말 그대로 나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 자체도 무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를 싸잡아 자극한 허무주의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싯다르타의 수행은 익히 알듯이 생로병사의 고를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모든 고의 뿌리인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해결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나가 없기에 고의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해결법은 유물론에도 있다.

나는 물질의 합성이기에 시간이 지나 그것들이 해체되면

나는 없게 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무가 될 텐데, 인생을 모두 소비해 가며 그런 를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

 

물론 불교는 그런 유물론적 무아와 차별을 두기 위해 이런저런 구실을 대지만

무아를 가치로 내건 이상 단멸론이라는 근본 패러다임은 똑같다.

수행자들은 흔히 나는 없지만

오감을 통해 관찰하는 어떤 현상만은 뚜렷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때 그 현상이 진아냐고 물으면 갈팡질팡한다.

무아가 뭔지 진아가 뭔지 전혀 모르니

그저 줄어든 번뇌망상과 늘어난 이해력을 보고 우쭐할 뿐이다.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를 무아로 놓음으로써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일 =무아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면 적어도 제1원인에 대한 명증이라도 덧붙여야 한다.

1원인을 통해 무아론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허무주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무아가 이러함에도 싯다르타가 이것을 중요하게 언급한 건

불법의 기초를 닦게 하려는 의도였다.

한마디로 일종의 방편이란 얘기이다.

 

 

중생으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를 불교에서는 착으로 본다.

어느 무엇에 달라붙어 있기에 실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착을 떼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착을 뗄 것인가?

 

본드를 제거할 때 쓰는 윤활제처럼

중생의 착을 제거하기 위해 꺼낸 카드가 바로 무아이다.

그리고 무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한 보조제로서 쓰인 것이 연기이고 말이다.

 

나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대상에 대한 집착력은 큰 폭으로 줄어든다.

더 나아가 생로병사라는 매우 강력한 끈끈이도 힘을 잃는다.

이처럼 싯다르타가 들고나온 무아는

무상을 무력화시켜 분별의 장막을 거둬내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깨달음의 요체가 아니라 중생의 착을 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이다.

 

이 점을 알아차리는 데에 수백 년이 걸렸다.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무아론의 한계를 절감하고 아주 조금씩 진아를 경전에 삽입해 갔다.

세존의 법통이 곧 무아라는 뿌리박힌 권위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진아론을 꺼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까지 무아와 진아의 다툼은 끊이질 않는다.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축하면 터져 나오는 것이 이것에 대한 논쟁이다.

무아를 고집하자니 뭔가 미진한 것 같고

그렇다고 진아를 대놓고 주장하자니 힌두교의 아류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아무튼 수행자들이 오매불망하는 무아엔 깨달음이 없다.

물론 무아를 통해 수많은 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있다.

이렇게 해서 한층 가벼워진 의식은

더 높은 차원의 경지로 나아가는 데에 적잖은 효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