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27. 궁극의 깨달음! 그냥 있어라. 그냥...

Buddhastudy 2023. 6. 22. 19:36

 

 

 

세존이 걸은 깨달음의 길, 불법!

그것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5차원 실존의 단면을 언어로 쪼개고 관념으로 붙여

괴상망측한 분별 덩어리를 만들어 놓았다.

 

말로는 시종일관 실존을 가리킨다지만

본서의 어느 구석에도 실존은 없다.

실존을 모방하고 흉내내고 연상하는 정보의 거품만 옹기종기 일어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본서에서 길을 찾았으면 곧바로 그 길을 지워라.

불법을 비롯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깨달음의 길은

한낱 엄지손가락(반지름)에 불과하지 않은가.

치켜세운 엄지손(반지름)을 내리지 않으면

오히려 주먹에서 멀어져 보기 흉하게 된다.

그러니 부디 깨달음 타령을 그만 좀 하고 그냥 있어라, 그냥!...

 

 

반지름을 내리는 것에 대한 멋진 표현이 불교에 있다.

바로 희론적멸이다.

쉽게 말해 [말장난하는 것을 멈춘다]는 뜻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기 반지름 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꽤 어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럴진대 반지름을 칭칭 감고 깨달음 행세를 하는 자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불법의 요체라는 공, 연기, 무아, 불성, 중도, 해탈, 열반 등은

일종의 진리를 모방한 가면이다.

그래서 깨닫고 난 이후 한 생각을 일으켜 현상계를 바라볼 때,

가장 해괴망측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왜곡의 절정에 이른 것들이 진리의 상징으로 둔갑되어

뭇 수행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모든 법은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얻을 수 있는 실체가 없다.

오로지 헛된 망념일 뿐이다.

 

용수가 저술한 용론-귀경게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음미해보자.

 

...생하지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5차원 실존의 경지를 그런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생하고 멸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붙거나 떨어지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오고 가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밝고 어두운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있고 없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공 또한 성립하지 않으며

이렇게 성립하지 않는 것도 성립하지 않으며

오로지 존재하며 홀로 가치를 누리고 있도다.

 

 

2차원 생물이 3차원으로 올라와 2차원을 내려다보면

그동안 자신이 굳게 믿고 있던 것들이 죄다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듯 5차원 실존이 깨어나면

4차원 영성과 3차원의 지식은 실로 희뿌연 먼지처럼 아득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불립이다.

 

붓다와 중생, 깨달음과 무명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다.

나가 없지만 그렇다고 나 아닌 것도 없다.

나와 무아가 성립되지 않는 경지에 참된 존재와 깨달음이 있다.

 

 

이와 같이 필자가 말했어도 4차원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5차원 의식에서 아무리 잘 생각을 일으켜도 4차원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가 말한 것을 이해하고 맞장구를 쳐 봤자 깨달음은 없다.

저렇게 표현하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남아 있는 일모의 분별식마저 털어내야 비로소 5차원 실존이 드러난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멈추어진 바람을 알아야 한다.

그렇듯 분별을 멈추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분별을 제대로 느끼고자 함이다.

멈춤을 모르는 분별은 번뇌방상의 바람이지만

멈춤을 아는 분별은 그 자체로 열반의 바람이다.)

 

이것은 자존하며 영원불변하는 경이로운 경지이지만

너무나 당연하여 존재에 대한 인식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열반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니 어떤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말고

그냥 깨달으라는 것이다.

언어로는 5차원 실존의 단면밖에 읽어낼 수 없다.

언어가 끊어진 경지를 직관하라.

 

 

흔히 언어의 한계를 거론하면 불립문자를 떠올리기 쉽다.

불립문자가 뭐냐고 물으면

오감을 통해 얻은 감각을 언어로 옮길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댈 것이다.

 

 

가령 사과는 직접 먹어 봐야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런 방식으로 깨달음을 언어화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건 적절한 설명도 비유도 안 된다.

 

사과의 맛을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것과

5차원에 이르러 언어가 성립하지 않게 된 것은 확연히 다르다.

전자는 언어가 지닌 구조적 한계가 맞지만

후자는 언어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립문자를 언어의 구조적 한계로만 설명하는 사람은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아무튼 이 둘의 차이를 궁구하는 것도 꽤 좋은 화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