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삼국지 10 : 조조 상소문을 올리다.

Buddhastudy 2023. 12. 7. 19:26

 

 

조조는 청년기 시절

낙양에서 소문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지만

당시에는 사대부들에게 추천을 받아야만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향거리 선제로 인해, 조조의 앞길은 막막했습니다.

 

환관의 손자라는 배경은

사족(士族)으로부터 배척당하였고

이에, 관직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교현, 허소 등 명사들의 평가를 받으며

명문거족 사마방의 천거를 받아 벼슬을 얻게 됩니다.

 

20세 무렵의 조조는 또래의 명문 귀족 자제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직급이었던

수도 북문의 경비대장, 낙양북부위를 맡게 됩니다.

 

삼국지 시대, 조조의 위나라 적국이었던

오나라 신원미상의 인물이 쓴 조조의 전기 <조만전>이라는 책에서는

조조가 낙양북부위직을 맡았을 때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적국 오나라에서 쓰여진 책, 조만(曹瞞)전은

조조의 ’()와 속인다는 뜻의 ’()이 결합된 어휘로

오나라 대중들에게 조조의 간사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선전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낙양북부위로 근무하고 있는 동안에는

조조의 규정이 너무 엄격하여

신분이나 경우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규율에 집착한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교적 가치관이나 신분 계급 사회를 중시하던

고대 중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조조의 엄격함이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경비대의 군기를 잡고

문을 보수한 뒤, 5가지 색깔의 봉()을 만들어

문의 좌우에 각각 10매씩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권세를 내세우는 자가 있더라도 신분 여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곤장형에 처해, 처형을 받다가 죽은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이 때문에 도성 내 사람들은 조조를 두고

피도 눈물도 없는 북문의 귀신이라 부르며

비인간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낙양북부위 조조 일화 중에 가장 유명한 일은

십상시 중 한명인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내세워

통금 시간 이후에도 지나가려 했고

경비대들은 건석의 숙부에게 맞아가면서도 길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조조는 십상시 건석의 숙부라는 신분에도 역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법을 적용하여 곤장을 때렸고

결국, 건석의 숙부는 매를 맞던 도중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십상시들은 조조를 잡아서, 보복을 하고 싶어했지만

조조의 조부가 환관 세계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조등이었기 때문에

십상시가 조조를 처분할 수 있었던 벌은

그저, 돈구현 현령으로 발령을 보내는 일에 그쳤습니다.

 

 

 

환관 조등의 손자가

같은 계열의 환관의 삼촌을 때려죽였다는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더욱 조조에게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습니다.

되려, 이 일이 있고 난 뒤 수도 낙양의 치안은 더욱 좋아졌고

천자가 있는 도성의 관문을 사사로이 열어주는 일이 없으니

낙양 사람들은 도적들로부터 좀 더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십상시는 자신들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조조를

수도에 그대로 두지 않고, 중심부에서 떨어진

연주 돈구현으로 보내 기회를 틈타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조조는 돈구 지역의 현령이 되고 나서, 특별히 알려진 일화는 없지만

삼국지 관련 각종 창작물에서는 마을에서 신을 모시는 사당 등을 철거하며

실속적인 경영 방침으로 마을을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 조조는 옛 학문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금세 의랑(議郞)이라는 직책을 맡으며 출세를 하게 됩니다.

조조는 문학에도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세월이 흘러 자식들인 조비, 조식에게도 이어져

세 사람을 두고서 삼조(三曺)라고 불렀습니다.

 

의랑이라는 직책은 그 중요도가 매우 낮은 자리로

천자의 물음에 자문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다시 말해 천자가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

할 일도 전혀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직책이었습니다.

 

조조는 의랑이 된 후, 할 일 없이 편하게 녹봉만 받을 수도 있었지만

젊은 혈기와 적극성이 강한 성격을 내세워

부정부패로 얼룩진 조정의 과거 사건 당고의 금을 조사했습니다.

곧이어 조조는 천자에게 상소문을 올렸는데

내용인즉슨, 영제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충직했던 두무와 진번이 환관들을 숙청하려 했지만

당고의 금 사건으로, 되려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이때 금고에 처해진 청류 인사들의 복권을 주장했습니다.

 

영제는 젊은 나이의 조조가 열심히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사실에

기특하게 여겨, 조조의 청을 들어주는 듯 했지만

십상시들이 득세하던 조정에서, 조조의 상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조조의 움직임은 사대부들이 보기에는 의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사대부들을 대표하거나 청류 명사에 속하지 않고

되려, 환관들과 가까운 탁류파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청류 인사들의 복권을 건의한 것은

파벌 중심의 정치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겁니다.

 

한편, 조조의 청을 들어주는 척했지만

전혀 미동이 없었던 한나라의 제27대 황제인 영제는

실상, 후한 말을 망조에 접어들게 한 암군으로 대표되는 황제였습니다.

영제 바로 이전의 황제는 환관들과 매우 가깝게 지낸 환제였는데

환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환관들과 권력다툼을 하던

대장군 두무와 두태후가 환제의 5촌 조카인 영제를 내세웠고

당시, 영제는 13세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등극했습니다

이때, 두 무는 환관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해서는 안된다고 여겨

청류당의 사람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 했지만

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환관들이 먼저 영제를 설득해 손을 썼습니다.

그리고 2차 당고의 금을 통해, 청류파 인사들을 대부분 숙청한 후

영제는 십상시와 함께 나라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제는 원래 황실의 중심 권력과는 먼 친척 집안의 자손으로

마치, 유비와 비슷한 입장에 놓인 가난한 황제 집안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제는 13세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가난함에 대한 트라우마를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소년에서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나이였던 영제는

환관들에게 이용당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는, 자신을 마음대로 주물리고 싶어했던

외척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환관들과 손을 잡은 면도 있습니다.

 

영제는 집권 초기부터 환관들을 통해

강력한 황제의 권력을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여기에 더불어, 돈을 모으는데도 집착했습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찌들어지게 가난했던 자신을 탈피하여

황제가 된 이후,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군주가 되고 나서도 국가 예산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는 커져만 갔습니다.

 

고대 중국 황제라든가 다른 나라의 왕들이

개인 자산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을 두고 내탕금(內帑金)이라 하는데

영제 시절 이전부터 황제들의 경영관리는 엉망인 상태로

이미 한나라의 국고는 내탕금도 빠듯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이 때문에 영제는 어떻게든 돈을 만들 수 있는 구실을 생각했고

그 결과 자신이 직접 나서, 벼슬에 정가를 매기는 매관매직을 공식화하며

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이 뇌물을 권장하는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그동안 환관과 외척들은 벼슬자리를 놓고 몰래 뒷돈을 챙겼는데

영제가 나서고 나니, 벼슬을 외상으로 사고 2배로 갚는 제도가 생겼고

아울러, 월정액 할부로 갚아나가는 방식까지 생겨났습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십상시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처럼 설명되지만

역사 속의 영제는 천하의 암군이라는 명성답게

돈맛에 빠진 영제가 갖가지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관리들은 신임 때뿐 아니라, 보직 이동에서도 돈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관리들은 황명이 떨어졌으니, 이를 따르지 않으면 대역죄가 되었고

황제에게 돈을 바치기 위한 유지비를 마련하는 행위는

결국, 백성들에게 세금이나 벌금을 거두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매관매직이 공식화되면서, 돈에 눈이 먼 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을 두고 벌어지는 관직 경매를 벌이기도 했으며

영제는 자신의 수익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관직의 재임 기간도 대폭 줄이게 됩니다.

 

관리들은 비싼 돈을 들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줄여진 재임 기간으로 인해 1년 만에 다시 돈을 마련해야 하니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요역을 부과하였고

이를 제때 이행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잡아들여 매질을 반복했습니다.

 

매관매직으로 생긴 수익의 일부는 국고에 충당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영제 개인의 비자금이 되어서

서원의 창고에는 돈이 넘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영제에게 조조의 상소문은 전혀 관심 밖이었고

조조는 영제의 화답을 보며, 더 이상 상소문을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제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은채

자신의 이문을 밝히는 통치를 하던 중

나라의 관리들은 수탈이 더욱 가혹해졌고

백성들은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폐정은 결국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10번째 시간으로

조조가 북문의 귀신이라 불리던 낙양북부위 시절과

의랑으로서 영제에게 상소문을 올린 이야기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