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 희귀 난치병으로 인해 눈이 점점 안 보입니다. (2023.10.26.)

Buddhastudy 2023. 12. 27. 20:27

 

 

저는 수술이 안 되는 희귀 난치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괴로움도 많았습니다.

스님을 보기 위해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았는데

여기서도 스님이 안 보이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옷자락 색깔이라도 볼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알아차림과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동시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마음이 올라올 때

제가 어떻게 대처해야 덜 괴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음이 부정적으로 일어나면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화가 나거나, 번뇌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마음이 긍정적으로 일어나면

감사한 마음이 들거나, 이해하는 마음이 들어서

마음이 시원해지고 편안해집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싶으면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키면 되고

편안해지고 싶으면 긍정적인 마음을 일으키면 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쥐가 접시에 담긴 고구마를 먹으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쓰레기통만 뒤지다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면

이게 웬 떡이야, 나도 운이 좋을 때가 있네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바로 쥐약입니다.

누가 쥐를 위해 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겠어요?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거죠.

 

이때 붓다는 먹지 마라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쥐약 들었다이렇게만 말합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리 맛있어도 안 먹어야 합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먹고 죽을래하고

먹고 죽으면 돼요.

죽음을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진실을 말할 뿐이에요.

쥐약이 들었다고 사실을 말해주었을 때

그 사실을 알면 번뇌가 사라지고 나의 선택만 남습니다.

최종 선택은 내가 해야 합니다.

붓다가 대신 선택해 주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가 붓다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하는 겁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데 계속 치료에 매달리면

나는 괴롭고 열등한 존재가 됩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이 현실이 된 지금 상황에서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볼 것 다 봤으니까

지금부터는 안 보여도 괜찮아.

대강 짐작할 수 있어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긍심이 생깁니다.

옆에서 사람들이 걱정하면 이렇게 말해주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난 볼 것 많이 봤어.

요즘 세상이 많이 어지러운데 더러운 꼴 안 봐서 다행이야.’

 

유마 거사가 아픈 몸을 가지고 법문을 했듯이

자신의 조건을 가지고 법을 설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면 괴로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장애는 불편한 것이지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인공으로 만든 눈을 이식해서 넣으면

육안보다 더 많은 기능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런 날이 오면 질문자가 갖고 있는 희귀 난치병도 큰 문제는 안 됩니다.

 

피부 이식 기술은

화상 입은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나온 기술인데

요즘은 미용을 위한 성형수술에 많이 쓰이잖아요.

 

앞으로 인공으로 만든 팔의 기능이 너무 좋으면

멀쩡한 팔을 잘라내고 인공으로 만든 팔을 넣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으로 만든 눈이 너무 좋으면

멀쩡한 눈을 파내고 인공으로 만든 눈을 넣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벌써 성형술은 그런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월한 것도 없고, 열등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입니다.

 

장애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니까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하거나

하나님이 벌을 주어서 그렇다하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열등하다고 규정해 놓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지배 논리입니다.

 

붓다는 무상(無常)‘무아(無我)‘를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존재도 열등하다고 할 실체가 없고, 우월하다고 할 실체도 없습니다.

브라만이라고 성스럽다고 할 실체가 없고,

수드라라고 더럽다고 할 실체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수드라가

성스러운 존재인 브라만의 그림자만 밟아도 죽임을 당했지만

출가한 승려들은 모두 무아를 체득했기 때문에

브라만 출신인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가

수드라 출신인 우빠리와 함께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어요.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민주주의와 평등사상이 서양에서 전래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최근에 서양을 쫓아가며 살다 보니까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미 2600년 전 붓다의 가르침 속에

인간 해방 사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습니다.

팔이 하나 없는 나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꿀 것인지

눈이 안 보이는 나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꿀 것인지

내가 관점을 바꾸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남으로부터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열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남을 동정해 주어야지 왜 동정을 받습니까?

눈이 안 보이면 좀 불편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불편할 뿐이지 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