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어떻게 평온에 이르는가?

Buddhastudy 2024. 1. 9. 19:38

 

 

삶은 꿈과 같다.

젊은이들에게는 이루어야 할 꿈이고

길 찾는 자에게는 깨어나야 할 꿈이다.

꿈에서 깨어난 자는 그저 생활을 해 나갈 뿐이다.

상상 속에서 증폭시켰던 괴로움이 사라질 뿐이다.

어떻게 깨어날 수 있는가?

충분한 몸부림이다.

지금 괴롭다면 가능성이 커지고 잇는 것이다.

삶을 자신의 계획하에 두려는 마음과

이를 위해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의지가 소멸할 때

자연히 깃드는 것이 평온함이다.//

 

 

 

오늘은 어떻게 평온에 이르는가?’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을 자면 꿈을 꾸지 않습니까?

근데 꿈 중에는 나쁜 꿈도 있잖아요.

꿈자리가 사나워서 한참 쫓기고 마음이 급하고

야 이거 큰일 났다

이렇게 꿈속에서도 너무 실감나게 힘들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이거 꿈이네, 맞아, 이거 꿈이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정말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되면서

긴장이 사라지는 경험들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대낀 마음이 큰 만큼이나 안도감도 크게 드는

이런 그 경험들을 하고 있죠.

 

오늘 주제는 괴로움을 어떻게 벗어나서 평온에 이르는가 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도 꿈꾸는 거하고 비슷하다

이런 얘기들을 불교에서 특히 유식론에서는 꿈에 비유해서 말을 많이 하죠.

인생은 꿈과 같다.

 

그런데 삶은 꿈이다라고 했을 때

젊은이들에게 이 말은 이루어야 할 꿈을 이루어야 된다 이런 거지만

안 젊은이들, 혹은 진리를 추구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꿈처럼 대하라그다음에 꿈에서 깨어나라이런 것이죠.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든 간에 그것은 꿈이듯이 깨고 나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무슨 그런 엄혹한 일이 있었든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것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꿈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증폭기, 감정의 증폭기를 통해서

사람이 괴로움을 더 크게 만들어 내는 이런 확대 재생산은 안 하게 된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비슷하게 보면 꿈만 그런 게 아니고

안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도 안경을 끼지만

안경을 오래 끼고 있으면

마치 내가 안경을 꼈는지 안 꼈는지 모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안경알이 아주 깨끗하다

그러면은 어느 순간에 일어나서

가만있어 봐, 안경이 어디 있지? 안경을 어디 뒀지?”

한참 안경을 찾다가 뭐가 딱 걸렸는데

아 맞다. 내가 지금 안경을 끼고 있지

이렇게 자각할 수가 있죠.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죠.

스마트폰을 들고 스마트폰을 찾아본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근데 스마트폰을 찾을 때의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가만히 있어 봐,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하면서

온갖 곤란한 일들의 리스트가 쫙 펼쳐집니다.

그와 비례해서 나는 평정심을 급속하게 잃어가고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되지? 어떻게 수습해야 되지?

막 이런 걸로 마음이 막 어마어마하게 힘들어지죠.

 

그러다가 가만히 있어 봐, 어디 전화해서 물어봐야 되겠다라고 해서

전화를 하는데

그게 내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거잖아요.

이런 가끔씩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런 자각이 들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착각했네라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는 쓴 웃음이 나오죠.

세 번째는 어떻게 됩니까?

-그걸로 끝입니다.

그죠?

 

우리가 마음공부를 한다든가, 도를 닦는다든가 해서

궁극적 경지 혹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각자가 있을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죠.

 

착각에서 벗어나서

원래 아무 일도 없는 거다, 그냥 다시 평상의 삶을 살아가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안경을 잘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핸드폰을 손에 들고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심오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약간 쪽팔리는 겸연적인 것이 있을지언정

이것을 가지고 엄청난 이론화를 할 수는 없고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를 묘사할 수도 없다 하는 게

불교적인 가르침이죠.

 

그래서 상황이 종료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상상으로 키워온 여러 가지 괴로움의 리스트들이

그냥 그 순간에 사라지고 평온해지는 것

이게 전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평온에 이르려면 깨달아야 되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삶을 치열하게도 살아야 되지만

또 동전의 반대편에서는 꿈처럼 보는 시각도 키워봐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이미지화하면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지식을 엄청나게 축적하거나

실천을 엄청나게 훈련해서 이룰 수 있는 경지이거나

획득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라는 것은 알 수가 있죠.

 

그래서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선불교에서 얘기하는 것은

당신의 그 모든 추구, 노력, 의지 이런 것들이

그리고 그것이 잘 안 될 때

되고 싶은 그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모두 그런 에너지가 모두 불타버리고, 소진되고, 사라져 버린 후에

찾아드는 평온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굳이 하자면 하기도 하거든요.

 

심리학에서는 이거를

현출, 문득 떠오르는, 솟아오르는

이런 얘기도 하고

복합계 물리학에서는 창발이라고 해서

어떤 어떤 사물이

분자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질서도가 올라가면

어느 순간에 순식간에

완전 다른 배열로 구조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

이것을 창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뭔가 새로운 게 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것이 완전히 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기존의 것이란 뭡니까?

자아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삶의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는 엄청난 노력

생을 다하는 데까지 멈추지 않는 노력이죠.

노력이면서 또 추구이면서 욕망이면서

그리고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언제나 괴로움

4가지가 박살이 나버리는 것이죠.

뭔가 새로운 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됐냐?

인간은, 저도 벗어날 수 없는데, 중생은

산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예측하고 싶어 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시죠.

예측과 통제라고 하는 것이 번뇌의 근본이거든요.

 

그런 예측하고 싶은 마음,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아까 완전 소진돼서

즉 맛이 가버려서

만세, 항복을 해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그때 찾아드는 게

그것도 문득,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드는 게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죠.

 

포기하면 편하다이런 말이 있는데

그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머리가 맑아지고, 다시 차분해지고, 다시 흥분이 잠드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근데 사실은 예측과 통제하려는 의지, 추구, 노력

그런 것이 문제였다라고 하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

지견이 생기는 것이죠.

, 그런 거였구나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괴로운 것을 멀리하려고 하고 어떻게든 괴로움

예를 들면

지금 집이 좀 너무 낡고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워서

에어컨도 달고 난방기도 달고

벽도 다시 하고 구들도 다시 놓고 이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바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데

우리의 멈출 수 없는 추구에 대해서는

그래야 사는 거 아닌가? 그게 옳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전혀 손을 안 댑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우리는 힘들죠.

두카, 내 마음과 같지 않고 여의치 않기 때문에 힘들죠.

 

근데 여러분 지금 힘들다면 희망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힘들어야

도대체 이게 뭐지?’라고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

의문을 가지는 순간에 감수성이 생기고

그 감수성이 여러분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깨달음이라고 하는

우리가 제작할 수 없기 때문에

문득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고

어떤 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모든 추구가 헛되이 소진되어서 완전히 항복했을 때

마음이 완전히 항복했을 때

문득 그런 일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괴롭다는 것은 지금 게임에 지고 있다는 건데

히딩크가 틀린 게 아니었던 것이죠.

히딩크는 40으로 지고 있을 때조차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계획대로 잘 지금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근데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사실인 것으로

우리가 인정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괴롭다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삶이 우리를 두드리는 것이죠.

좀 잘 생각해 봐’ ‘좀 착각해서 깨어나 봐.’ ‘꿈에서 깨어나

이렇게 우리를 자꾸 건드리고 자극하고

어떻게 보면 격려하는,

격려가 좀 과격하긴 하지만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하여튼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우리는 파르르 떨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잘 보라고

계속 우리 문을 두드리고 있는 손님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마음공부가 되었든, 도닦음이 되었든

저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은 낙관적인 겁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걸 만드는 작업이 아니고

꿈에서 깨는 일이기 때문에

몸부림치다 보면 깨어날 수 있다.

지금 깨어나지 못한다면

몸부림이 충분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 되는 것이죠.

 

그래서 꿈은 어떻습니까?

영원히 꿀 수는 없죠.

언젠가는 깨게 되어 있는 것이 꿈이다.

 

그런 확신 때문에 저는

깨달음, 그다음에 평온에 이르는 것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은 조금 낙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평온에 이르는가

깨달음의 모습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느냐에 따라 좀 다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