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깨달음의 상태는 의식수준 600에서 시작한다. [낭독74회]

Buddhastudy 2024. 2. 14. 19:53

 

 

 

오늘 함께할 책은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수준을 넘어서]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서로는 이 외에도

[의식혁명]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나의 눈] [호모 스프리투스] [진실 대 거짓] [놓아버림] [치유와 회복]과 같이 다수의 작품들이 있는데요.

 

호킨스 박사는 인간의 의식 수준을

1부터 1000까지 수치화하고, 그것을 다시 17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이에 의하면 수치심의 에너지 수준은 20

무감정의 에너지 수준은 50

슬픔은 75, 두려움은 100, 분노는 150, 자부심은 175

용기의 에너지 수준은 200으로 분류되는데요.

 

지난 영상에서는 의식 수준 175인 자부심에 대한 부분을 읽어 보았구요.

오늘은 깨달음의 상태들이 시작되는 의식 수준 600에 대한 부분 함께 하겠습니다.

내용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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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상태들은 의식 수준 600에서 시작한다.

이 에너지장은

초월, 빛 비춤, 지복, 신 의식과 같은 용어들이 가리키는 경험과 관련된다.

이 상태에 이를 때,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고

지각의 특정한 초점은 없다.

이 수준의 개인들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잦은데

왜냐하면 지복의 상태는 일상적인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영적 스승이 되고,

다른 일부는 이름 없이 인류의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몇몇은 세상으로 복귀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가 되어

사회에 크게 기여한다.

 

종교의 테두리 안에 남아 있는 이들은

결국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지명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 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식적 종교는 초월되어

모든 종교의 원천을 이루는 순수한 영성으로 대체된다.

 

600 수준 이상에서,

행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정지된 채 슬로모션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지각된다.

전부는 살아 있고, 빛나고, 끊임없이 흐르며

절묘하게 조율된 진화의 춤 속에서 펼쳐지는데

그 속에서 의의와 근원은 압도적이다.

 

이 굉장한 드러남은

생각이나 개념 없이 일어나므로,

마음속에는 개념화를 중단시킨 무한한 침묵이 있다.

 

목격하고 있는 그것과 목격되는 그것은 정체가 동일하다.

관찰자는 녹아 버리고 동등하게 관찰 그 자체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힘이 무한하지만 절묘하게 부드러운 현존에 의해 일체가 된다.

 

600에서 700 사이로 측정되는

미술, 음악, 건축물의 걸작품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높은 의식 수준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보편적으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영원한 것으로 인지된다.

 

이 수준에서는 이행을 목격하는 이것이나 분리된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완결적 이어서

아는 자아는 대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신의 현존임이 틀림없는 무한한 평화의 상태가 있으며

그것은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평화나 평온함과는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멎어 있음 속에서, 전부는

저절로, 자율적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다.

소리는 침묵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침묵은 소리 안에서조차 지속된다.

 

그 상태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사치타난다(침묵의 지복)로 지칭되었다.

 

생리적 기능은 정지될 수 있다.

움직이거나 말하려는 욕망은 없으며

내면의 침묵은 영원성 속에 정지된 것처럼 소리가 없다.

 

육체가 지속되고 생존하는지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고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관심 밖의 문제이며

지휘하는 것은 우주에 달려 있다.

카르마적 경향이 육체의 지속과 정렬된다면

육체는 생존한다.

그렇지 않다면 육체는 단순히 버려지고 만다.

 

육체는 흙에서 나왔으므로 영의 목적을 충족시켰다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식 수준이 실현되었을 때, 50퍼센트의 경우

육체는 포기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육체의 지속은 세상의 반응과 일치하는데,

세상은 먹거나 마실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내부에서는 이 방식이나 저 방식에 대한 기호가 전혀 없고,

의사소통의 필요나 말할 필요성도 없다.

 

현존은 자기 충족적이고, 완전하고,

비할 바 없이 절묘하게 부드러우며, 동시에 강력하다.

그것의 본질은 존재의 근원으로서 모든 나타남에 스며든다.

 

단일성과 하나임 안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동시에 내재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동일자로 존재하기 때문도, ‘다른것으로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다.

전부임의 무한한 맥락 안에서 잠재성은

일반적으로 신의 의지로 알려져 있는 신성한 명령에 의해 활성화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완벽하고 완전하다.

창조는 에고가 목격하는 바와 같이

완벽하지 않음에서 완벽함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에서 완벽으로 이동한다.

 

완벽하지 않음에서 완벽함으로 이동한다는 환상은

정신적 해석일 뿐이다.

예를 들면,

장미 봉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장미가 아니라

완벽한 장미 봉우리이다.

 

시들 때 그것은 완벽한 시든 꽃이고

그다음에는 완벽한 마른 식물이 되며

그 이후 완벽하게 수면 상태에 든다.

 

정신적 해석에 의한 간섭이 없을 때

존재하는 전부의 완벽함은

그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증명된다.

 

편집과 분류가 없을 때

일체는 동등하게 절묘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이 잡초라고 무시하는 것이

꽃의 아름다움과 동등한 아름다움을 갖는다.

분류하지 않을 때

일체는 동일한 장점이나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각성된다.

 

전부는 창조로서의 신성의 한 표현이다.

전부는 동등하게 신성하고 성스럽다.

다른 어떤 것과도 마찬가지로, 육체 또한 자율적이며 알아서 돌아다닌다.

 

600대의 수준에서는

원인적 행위자나 행위의 결정자로 상상되는

사적인 자기나 와 같은,

의지 작용을 갖는 원인적 자리는 없다.

 

보통의 개념화 교육에 대해,

지복 상태는 궁극적 상태처럼 보일 것이다.

에고 자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정확히 그러하다.

 

불안, 예상, 후회, 매력, 열망은 사라진다.

규칙, 목적, 목표, 과정들,

그리고 충족되거나 완성되어야 할 조건이나

해내야 할 역할 또한 사라진다.

 

이 수준에서는 사람, 자기, 혹은 다툼을 벌일 타인이 없다.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며

순전히 있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묘사적 지각인 성질은 사라진다.

일체는 형용사 없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 있다.

마음은 멎는데, 그것은 주체나 대상이 없고

저것을 하면 이것이라는 행위자가 없으면

동사의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성질 부여가 없다면

형용사의 필요성도 없다.

게다가 내려야 할 결정이 없기 때문에

의지 작용은 사라지고,

전부는 창조의 표현으로서 자연 발생적이고 자율적으로 진화한다.

 

고맙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채널 [지혜별숲] 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평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