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개인주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와 불교

Buddhastudy 2024. 2. 20. 19:58

 

 

기독교와 불교는 개인주의 관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외부성

주요한 방법론으로서의 자기부정

구원(깨달음) 이후의 문제 등에서 그러하다.

에고를 버리기 위해 반드시 에고가 필요한

개인주의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오늘은 기독교와 개인주의와 불교에 관하여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좀 근본적으로 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의 경우에는

유대라고 하는 민족과 여호와라고 하는 신 간에

어떻게 보면 집단적 계약이잖아요.

경영 용어로 이야기하면 B2B 계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예수가 등장하면서

예수가 어떤 일을 했는가 하면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

개인을 하느님 앞에 끌어내서 세우거든요.

그렇게 해서 회개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대단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는 빈부, 귀천, 계급, 민족 상관없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다 똑같다, 죄인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유대교 제사장들이 자기네들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죠.

 

근데 개신교도 비슷합니다.

가톨릭에 대항해서 일어난 개신교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개인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일을, 영혼 구제를 개인이 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된다

-두 번째는 만인사제주의라고

만인사제니까 모두가 사제가 되어야 된다는 거 아닙니까?

다르게 이야기하면 가톨릭의 사제 계급이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구원의 영혼 구원의 문제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성경을 읽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직접 회복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중재자가 필요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일이 되는 거죠.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구원에 끼어든, 끼어들어서 이렇게 굳어져 버린

단단하게 굳어진 조직화 되고 관료화된 집단주의의 정화를 위한, 카토르시스를 위한

하나의 리액션이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과두제의 철칙에 따라서

자꾸 조직화 될 수밖에 없고

조직화 된 거는 굳어지기 마련인데

그러니까 이 리액션도 또는 리폼, 개혁도

주기적으로 일어나야 기독교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불교도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도 뭐든지 그렇듯이

처음에 시작할 때는 대단히 생명력이 넘치지만

그것은 교조화되거나 조직화되어서 생명력이 굳어져 가고

그러면 또 혁신이 일어나고

이러면 리액션의 주기를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 관점에서 그럼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을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이라든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죠,

집단적인 사건은 아니죠.

 

E=mc2이라는 과학적 발견은

인류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그 순간에

내가 그걸 몰라도 됩니다.

몰라도 비행기 탈 수 있고, 인공위성으로 핸드폰 할 수 있죠.

 

그런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그걸 체득하기 전까지는 내 것이 아니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불교나 기독교나 뭐가 필요한가 하면

구원받거나 깨달을 개인이 꼭 필요한 것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은 이후의 상태, 깨달은 이후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그건 몰라

하지만 구원을 받거나 깨달을 개인이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눈에는 집단이나 조직이 2차적인 것이죠.

그러니까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구원받고 깨달아야 할 개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필연적 개인주의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이에 비해서 유대교, 유대교라든지

하나님이 민족을 구원하겠다 하는 거 아닙니까?

그다음에 유교 같은 경우는

동북아의 한자 문화권의 유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치국평천하

입세 지향적인 세상 속에서 뭘 하겠다는 거니까

이 개인의 어떤 의식이나 영혼의 문제하고는

좀 사실 상관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나 혹은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굉장히 실존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기독교가 불교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개인이 꼭 필요하다 ㅎㅎ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에 아주 거칠게 본 3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도 그 구원을

개인의 노력의 소소한 결과물로 보지 않습니다.

구원은 외부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너의 머리를

하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개개인의 노력이나 선행 또는 고행

이런 걸로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 컨센서스죠.

 

그래서 이걸 불교 쪽으로 이야기하면

초기에 부처님이 수정주의, 선정을 닦고

두 번째는 고행주의, 6년간 정말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도록 고행하고

하는 이런 걸 해봤는데 안 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통적인 것은 뭐냐 하면

고생하는 거

몸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는 이런 식으로의 억압을 가지고

구원이나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두 종교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또 두 번째는 기독교에서는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내가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할 수 있도록 너를 죽여라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주권을 완전히 하나님에게 내맡겨야 한다.

 

대부분의 간증의 뼈대는 이거죠.

내가 어떻게, 내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하다가 왕창 깨지고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일으켜 세워서 중하게 쓰시더라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권을 완전히 하나님에게 맡겨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걸 기독교에서는

산제사를 지낸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이게 논리적으로 보면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궁극에 이를 수 있다라고 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은 선불교라든지 이런 데서

선의 본질 중의 하나로

정신력의 완전한 소진, 완전하게 억제할 수 없는 상태

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을 써서

어떻게 전혀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

 

그러면 아는 나와 알려지는 대상이라고 하는 이분법,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

이렇게 하면서 자아가 뭐라 그럴까 부재하는

그런 상태에서만 뭔가 그게 도달이 될지, 체득이 될지 모르지만

어찌 됐건 그런 얘기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둘 다 완전히 맡기는 것

혹은 개인의 노력이 완전히 포기될 때

의도와 노력이 포기될 때 일어나는 가능성

그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공통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구원을 받았다거나 깨달았다거나

그 뒤에 뭐 문제 없냐?

그 뒤로 그걸로 끝나냐?

 

물론 여기 기독교에도 캘빈주의는

그마저도 다 예정되어 있고, 신이 다 결정하는 거니까

그건 인간이 손댈 수 없어라고 하는 캘빈주의도 있고

 

그다음에 알미니안주의는

구원 후에 또 실족,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자유의지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하고도 연결이 됩니다마는

결국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은 퇴전의 문제

언제부터 불퇴전이 가능한가

퇴전의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도 돈오 이후의 점수를 매우 강조하고

특별히 보림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능엄경에도 보면은

이즉돈오이나 사비돈제라 理雖頓悟 事非頓除

 

이치라고 하면 즉시 깨달을 수 있지만

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씩 풀어가야 된다.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새로이 깨달을 것은 없지만

그 깨달음에 친숙해지고 깨달음이 완전히 기존의 업을 혹은 습관을

완전히 없앨 때까지는

항상 긴장까지는 아니고 친숙해져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죠.

 

그러니까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다음에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구원받은 뒤에 문제는 없는가?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깨달음 뒤에는 문제는 없는가?

라고 하는 점에서

그런 구조로 보면은

기독교나 불교가

그렇게까지 서로 상통하는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저는 상통한다이렇게 보입니다.

 

거칠게 보더라도 이것이 말하는 것은 두 종교 모두

결국은 에고를 가지고 뭘 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죽어야 산다, 죽어야 살리라

또는 거듭남이런 표현을 쓴 것처럼

불교에서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그다음에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다음에야 다시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

이렇게 가고 있지 않습니까?

심우도, 소를 찾는 과정도 똑같고.

 

그렇게 보면 두 종교 모두

에고를 벗어던지는 것이 목적인데

아이러니는 에고를 벗어 던지기 위해서

에고에 기초한 개인주의가 매우, , 반드시 필요하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기독교와 불교를

개인주의라고 하는 관점에서 한번 같이 놓고

상통하는 점에 대해서 이해를 해보려고

여러분들과 말씀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