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2회 팔정도란 무엇인가? (19:43)

Buddhastudy 2011. 9. 25. 21:44

  방송 보기: 불교TV

 

지난시간에 부처님께서 어떤 식으로 수행을 하셔가지고 깨달음에 이르셨고, 또 그때 깨달은 내용이 뭔가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 드렸는데요, 그때 인도 당시에 기본적으로 수행이라고 성행했던 것들이 대부분 고행이라고 그랬죠. 자기 몸을 학대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괴롭게 하는 이런 고행을 주로 했었고요. 그래서 이런 고행을 아무리 극심한 고행을 해 봤지만 그걸로 이해서 깨달음이 일어나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두 가지. 감각적 욕망에도 빠지지 않고, 그리고 고행도 하지 않고.

 

이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오는 즐거움인 팔정도. 그러니까 중도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중도의 길을 가서 마지막에 깨달으신게 중도를 깨달아서 성불을 하시고, 그 성불한 다음에 법문하신, 최초의 법문이 초전법륜경입니다. 초전법륜경을 통해서 부처님 당신이 깨달으신 내용이 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죠. 그죠? 그 내용이 지금 팔정도로 요약되 있고요, 그래서 불교수행은 한마디로 말하면 팔정도라고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도 이 당신의 가르침은 팔정도를 벗어난 것은 거기에는 성자나 성인이 없다. 이 팔정도를 따라서 수행하는 곳에는 성자나 성인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불교수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팔정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은 일단, 이 팔정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부처님께서 경전상에 어떤 식으로 설명돼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오늘 제가 말씀드릴 이 경전은 여러분들이 대념처경이라고 들어보셨죠. 이 대념처경에 보면 사성제팔정도에 나오는 부분에 그거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팔정도는 여덟 가지로 구성되 있죠. 그래서 팔정도라고 합니다. 첫 번째가 정견과 정사유,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계정혜라고 하는 수행으로서 묶어서 이야기를 해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에 해당하는 겁니다. 혜수행에 해당하는 거구요. 그리고 정어, 정업, 정명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는 계율, 계율을 지키는 수행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정정진, 정념, 정정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는 바른 선정, 선정을 닦는 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크게는 세세하게 분류를 하면 여덟 가지로 설명을 하셨고, 그룹을 지어서 설명을 하면 계, , 혜로 얘기할 수 있는데.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거를 왜 그러면 혜를 먼저 얘기를 했느냐? 이것도 우리가 계정혜라고 알고 있는데. 혜를 먼저 얘기 했잖아요 그죠? 정견과 정사유를 먼저 얘기하고, 그리고 계율과 선정을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도 사실은 대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먼저 이 정견과 정사유라는 것이 우리 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좀 설명을 드리려 고합니다. 이 정견은 말 그대로 바른 견해를 이야기 하고요. 이 바른 견해 이거는 지혜에 해당합니다. 정사유는 말 그대로 생각입니다.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할 건가.

 

수행의 순서로 보면은 계정혜가 맞지만, 우리가 혜를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어떤 방향성을 분명히 잡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하거고, 어떤 방향으로 수행을 할 건가. 그거는 정견을 통해서 가능한 거거든요. 이런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이 수행을 하신다면 수행이 엉뚱한 방향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먼저 정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게하고, 그리고 나서 그 정견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수행해서 나아가야 될 방향성을 정확히 아는 겁니다.

 

그러면 그에 맞게 우리가 단계단계를 밟으면서 수행을 하면 올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는데.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이 중구난방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 수행이 바른 수행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먼저, 혜를 먼저 이야기해서 정견과 정사유를 완전히 터득하는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서, 그 바탕에서 계율로 닦고, 선정도 닦고,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이 지혜를 완성하는 이런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혜수행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 시작도 정견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무리도 정견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대념처경이나 이런 경전에 보면 정견에 대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통찰, 또는 올바른 이해,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 진리에 대한.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올바른 이해. 다시 말해 뭐겠어요? 사정제죠. 그죠? 고집멸도. 이 사성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이렇게 설명이 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어떻게 보면 정견, 여러분들이 사성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거꾸로 이야기를 하면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았다고도 말 할 수 있겠죠? 그죠? 사성제를 바로 이해하는 거를 정견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견을 나눌 때 두 가지 형태로 나눕니다. 세속의 정견이라는게 있고, 또하나는 출세간의 정견이라고 있는데. 우리가 사성제중에서 특히 멸성제라고 하는 거 아시죠? 그죠? 멸성제가 뭐에요? 고통이 소멸한 자리잖아요. 그거는 우리가 불교에서 멸성제는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열반을 이야기 하는게 멸성제인데.

 

그러면 우리가 수행자가 처음부터 열반을 이해할 수는 없죠. 열반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열반을 체험하고 증득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열반 자체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나중에 수행을 완성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고집멸도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는 수행의 초기에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고성제, 집성제, 도성제. 이 세 가지는 수행을 하기 전에 준비과정에서 알아야 될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본질적으로 보면 괴로움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고성제고, 그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이 뭐에요? 집성제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소멸하는 길이 도성제이 해당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사성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우리 삶의 고통을 유발하고, 어떤 형태의 마음이 우리 삶의 고통을 소멸하는가. 고통을 끝내고 행복하게 해주는가?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지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는데 유익한 마음을 선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열반을 증득하는데 이익이고 유익한 마음을 선이라고 하고. 그것에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고 훼방 놓고, 열반에 이르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불선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해로운 마음,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선과 불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궁극적인 행복을 성취하는데 유익하냐? 해로우냐? 이거에 의해서 분류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괴로움의 원인인 이런 탐욕이나 성냄 이런 것들은 뭐에 해당하겠어요? 불선한 마음에 해당하겠죠. 그죠? 그리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 알아차림. 바른 알아차림을 한다거나, 지혜를 개발한다거나. 선정을 개발한다거나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의 유익한 마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처음 시작은 우리 삶의 유익한 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 행복을 얻는데 유익한 것과 유익하지 않은 것, 해로운 것,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바로 <세간의 정견>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좀 불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선법과 불선법을 구분하는 지혜를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두 가지를 모른다면, 여러분들이 행복을 원하면서도 불선법을 계속 일으킨다면 행복해질 수가 있겠어요? 그건 애초에 불가능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평생을 노력하다고 해도 그건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른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노력의 방향성이 분명해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선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해도 그것이 결실을 얻기가 힘들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래서 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셔서 다른 사람, 다른 스승들이 말하지 못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설하신게 바로 뭐냐 하면 이것이 선법이고 이것은 불선법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이것은 우리가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고, 이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를 명확하게 설법해 주신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독특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세속의 정견이라고 하고요. 세속의 정견에 따라서 이 정견을 가지고 우리가 수행을 해서 나중에 열반을, 멸성제를, 깨달음으로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거는 뭐가 되느냐하면 그게 바로 <출세간의 정견>이라고 합니다.

 

이 출세간의 정견은 소위말해서 도의 지혜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죠? 그래서 수다원 도, 입류, 입류라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거 들어보셨죠? 그거 네 가지의 깨달음. 그거를 일어나는 것이 바로 출세간의 정견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출세간의 정견이 일어날 때 번뇌가 완전히 소멸합니다. 영원히. 그 이전에 우리가 세간의 정견을 닦을 때는 수행을 할 때는 번뇌가 잠시 안일어났다가 또 수행을 안하면 번뇌가 또 일어나요. 왔다갔다 합니다. 그래서 조금 수행했다고 방심하면은 또 번뇌가 일어납니다. 이거는 완전히 소멸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이 출세간의 정견. 이 깨달음이 일어나면은 번뇌가 영원히 소멸해 버립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 그래서 이게 또 세간의 정견하고 출세간의 정견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간의 정견을 바탕으로 해서 계정혜, 삼학을 닦음으로서 이게 세간의 팔정도를 실천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마지막에 출세간의 정견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이룩하는 것. 그게 바로 부처님께서 이 팔정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세간의 정견이 바로 이 사성제를 완전히 꿰뚫어 아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하는 도성제라고 하는 거는 출세간의 팔정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세간의 팔정도라기보다는 출세간의 팔정도라고 이야가 하는 거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출세간의 팔정도를 통해서 우리가 멸성제를 이해하게 되고, 통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상류타니까야라는 경전에 보면 우리가 태양이 뜨기 전에 여명이 밝아 오잖아요. 그죠? 그런 것처럼 정견이 앞장서고 전조가 돼서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일어난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정견이라는 것이 우리가 수행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반드시 이해를 해야 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견을 이해하려면 멸성제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성제와 집성제. 도성제. 이 세 가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성제는 어떻게 보면 보통 우리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보통 우리 삶을 뭐라고 생각을 합니까?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단 말이에요. 그죠? 그러니까 뭔가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괴로움들이 있다는 거죠? 대표적인 게 뭐요?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누구나 겪는 게 바로 노병사입니다.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어가는 이거는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피할 수 없는 게 노병사라고 하는 고통이 있고요.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아무리 뭐 잘생기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걸 피해갈 수는 없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게 근원적인 고통이다. 그리고 또 좋아하는 사람하고 헤어지는 고통(애별리고), 여러분들 가족이 죽었다거나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거나, 또 뭐 자기 애인하고 헤어졌다거나. 자기가 애착을 가진 존재하고 헤어질 때 오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특히 부모자식간의 이별을 겪으면 이거는 굉장히 큰 고통이죠. 그죠? 그리고 보기싫 은 사람하고 같이 있는 거(원증회고) 이것도 고통입니다. 부부가 원수가 만나서 같이 있으면 큰 고통이죠. 이거는 진짜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이죠. 매일 봐야 하니까. 그리고 또 직장에 다니는데 직장상사하고 관계가 안좋을 때 이런 것도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치 않는,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것도 큰 고통, 이거는 내가 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인연 따라서 우리가 만날 수도 있는 거기 때문에.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구부득고) 여러분들 다 돈 벌고 싶죠. 그런데 다 벌고 싶은데, 다 얻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죠? 권력을 쥐고 싶습니다. 다 얻어 지는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많지만, 그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실제로는 보면은 이루어지지 않는게 더 많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죠?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죠. 사자는 우리가 화살을 쏴서 사자를 쏘으면, 사자는 그 거기서 괴로워하는게 아니라 ,화살을 날라 온 자리를 보면서 사람은 문다 그러잖아요. 화살을 뺄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런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현상에 끄달리지 않아요. 그 현상에 끄달리지 않고 그 현상이 일어난 원인이 뭔가? 이걸 관찰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이런 노병사, 이런 생노병사 이런 고통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거에 부처님께서 관찰을 해 보니까,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이건 태어남에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 뭐고? 만약에 안태어났으면 이런 육체적 고통이 있겠어요? 정신적 고통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일어난다. 그래서 경전에는 고성제에 대해서 생노병사, 애별리고,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지는 고통, 또 원치 안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원증회고라 그러죠. 그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 그리고 이런 온갖 감정의 형태가 일어나는 걸 오온성고(, , , , )라고 하는데. 이 여덟 가지 고통을 팔고라고 합니다. 팔고.

 

경전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뭐라 그러냐 하면 한마디로 고라는 건 뭐냐? 고성제라는 오취온이다. 오취온. 오취온이라는 거는 물질과 정신(몸과 마음)을 이야기 하거든요. 좀더 쉽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 몸과 마음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 몸과 이 정신적이었던 마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어떤 여러 가지 육체적 고통도 일어나고, 정신적 고통도 일어나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고성제는 바로 오온으로 오취온이라고 하는 오온으로서 설명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의 눈으로 이 세상을 들여다보니까, 이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은 물질적인거 하고 정신적인거.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눠지더라는 거에요. 그리고 정신적인 부분은 또 나눠보면 느낌, 인식, 그리고 심리현상들. 그리고 마음. 이렇게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이 네 가지 형태로 나눠진다는 거죠. 그래서 물질은 색온. 이렇게 이야기해서 색수상행식. 오온이다. 일체는 오온이다 그랬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은 오온이다. 이 오온이 있기 때문에 고가 있다는 거에요. 이 오온이 없다면 고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고성제를 한마디로 여덟 가지의 고형태로 말 할 수도 있지만 한마디로 오온이다. 오취온 때문에 고가 일어난다. 여기 취라는 게 붙은 이유는 집착하다는 의미거든요. 집착의 대상이 되는 오온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라한은 이런게 없잖아요. 아라한 같은 경우는 오온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일반 중생들은 오취온이라 그래요. 여기서 이 오온이라는거인데 그러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알 수있는게 이 오온이라는게 그러면 왜 태어나느냐? 이걸 부처님께서 알아봤겠죠. 이 오온이 왜 형성되는가? 이 고통이, 우리고 고라는것이 오온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런 생노병사라는 이렇게 태어나서 생노병사 노병사가 일어나는 이게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