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2회 팔정도란 무엇인가? (42:14)

Buddhastudy 2011. 9. 25. 21:48

  방송 보기: 불교TV

 

그거에 대해서 설명을 한 것이 바로 뭐에요? 집성제입니다. 집성제. 고가 일어나는 원인. 왜 그러면 우리 삶에서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가? 그 고의 원인이 집성제인데, 여기는 집성제가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뭐라고 돼 있어요? 갈애라 그러죠. 가래. 그러니까 사실은 갈애를 대표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 속에는 사실은 무명이라는 것이 숨어있습니다. 모든 우리가 번뇌가 일어날 때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빠질 수가 없어요. 어리석음은 항상 바탕이 되기 때문에. 보통은 무명과 갈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갈애가 일어날 때 무명도 어차피 일어나기 때문에. 갈애라는 거를 어떻게 보면 윤회의 가장 근원적인 것은 갈애라고 하기 때문에 갈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뭐가 일어나요? 성질나잖아요. 성질. 화가 난단 말이에요. , 그러니까 우리가 화가 나고, 그래서 성냄과 탐욕이라는 것은 서로 대게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분노가 일어나요. 분노가 일어날 때 이것이 괴로운 것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일어나고. 서로가 계속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갈애라는 말 한마디로서도 우리가 윤회를 이야기 할 수 있고요. 갈애라는 것이 가장 근원적이기 때문에 갈애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탐욕과 이거는 갈애는 탐욕이죠. 그죠? 성냄, 어리석음 이게 다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갈애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느냐 하면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각적 욕망이 있는가 하면, 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는 뭐냐 하면은,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항상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죽더라고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어지지 않고, 항상 있고 싶어 하는 그런 욕망을 이야기하고요. 비존재에 대한 욕망은 아예 사라졌으면 하는, 다시는 안 태어나고, 아예 사라지고 싶어 하는 그런 욕망이죠.

 

그런데 우리가 아라한이 되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내가 업이 있는 상태에서 내가 그냥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안태어나지는건 아니거든요. 그죠? 조건이 있는 한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거는 단순한 그 실제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일종의 갈망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건 갈애라고 표현을 한 거죠. 그래서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가지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의 대표적인 것이 자살입니다. 보통사람들이 살면서 대개 고통스러우면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취하느냐 하면은, 죽으면 죽음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죽어요.

 

그런데 내가 만약에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악행을 많이 하고 나서 이 사는 것이 그런 악행 때문에 이 삶에 오는 고통이 많은데. 내 죽으면 끝나겠지 하고 죽는다고 고통이 끝나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보면 윤회적으로 볼 때, 그런 사람은 악처에 떨어지잖아요. 그죠? 지옥이나 축생이나 그런 아귀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자기는 원래 고통을 벗어나고자 도망을 간 건데, 실제로는 그렇게 안 그래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갈망이라는 거에요. 갈애.

 

그래서 우리가 보통 108번뇌라고 들어보셨죠. 108번뇌가 갈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갈애가 어디서 일어나요? 우리가 만나는 대상을 통해서 갈애가 일어나잖아요. 그죠?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우리 마음이 대상을 만나는 순간에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고,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계속 먹고 싶은 마음, 이런 게 맛에 대한 갈애란 말이에요. 그죠? 그리고 또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 그걸 계속 듣고 싶어하는 것은 소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갈애가 기본적인 갈애입니다. 거기에 갈애가 3종류가 있잖아요. 그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그리고 과거현재미래가 있거든요. 과거에 있었던게 있고, 현재에 있는게 있고. 그리고 또 미래있을게. 그리고 도 뭐가 있어요? 나한테 일어나는 게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게 있잖아요. 안과 밖으로(, , 안 밖의 갈애) 그래서 그걸 다 계산해 보면 108가지의 번뇌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우리 불교에서 108번뇌라고 하는 것은 갈애의 108가지 종류의 갈애를 보통 108번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갈애라는 거에 의해서 우리가 집착이 이런 갈애가 있으면 뭔가 행위가 일어나겠죠? 그죠? 여기서는 한 가지가 생략돼 있습니다. 업이 원래 일어납니다. 갈애가 있으면 업이 일어나고, 그 업에 있어서 태어남이 있는 거죠. 그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가장 더 근원적인 원인을 여기다 말씀하신 거에요. 갈애가 있으면 업이 일어나고, 업이 있으면 우리가 고성제, 태어남, 오온이 있다는 거죠. 그죠? 이거는 제가 다음에 연기를 설명드릴 때 한 번 자세히 설명 드리기로 하고요. 일단은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고성제와 집성제는 일종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집성제라는 원인에 의해서 고성제라는 결과가 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부모 뱃속에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가잖아요. 그죠? 그 살아가는 배경엔 여러분들이 과거 전생에 가진 그런 갈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갈애. 그리고 그런 갈애를 통해서 지은 업이 바탕이 됬었다는 거죠.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선업이 작용 했겠죠. 그죠?

 

그런 갈애가 바탕이 돼서 우리가 이런 윤회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성제와 집성제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중생계를 이해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괴로움의 원인과 그 괴로움이 일어나는 그거에 대해서 고성제와 집성제를 이해하므로서 도성제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 되겠죠. 그죠? 그러니까 소위말해서 집성제를 버리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집성제를 버리고, 내려놓고, 포기하고. 이것을 빛바래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것을 갈애를 효율적으로 버리게겠는가? 어떻게 하면 체계적으로. 여러분들 갈애를 다 버리고 싶죠? 그죠? 그런데 마음대로 안되잖아요. 갈애를 버리고 싶다고 버려지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이거를 어떤 식으로 갈애를 소멸하게 할 것인가? 이 프로젝트가 바로 부처님의 팔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면은 중생들을 마음을 움직여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가?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말을 한 게 팔정도고, 그리고 그 팔정도에 의해서 설명을 갈애를 소멸하게 되면, 이 갈애가 완전히 소멸되면 그게 바로 열반이다 이거죠. 아라한이라고 하는. 물론 수다원 때는 갈애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다함, 아라한이 됐을 때, 이 갈애가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면서 열반을 얻게 되고요. 그러면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소멸했으니까, 멸했으니까, 그죠? 그러니까 더 이상 고통이라는 것은 없고,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는 열반을 증득하게 되고. 그게 되겠죠.

 

그래서 멸성제는 그런 갈애의 원인, 집성제를 완전히 소멸하는. 그러니까 고의 원인인 집성제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멸성제다. 그래서 이 갈애를 소멸하는 방법으로서 설명을 하신게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팔정도입니다.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수행에 해당하구요. 정어정업정명은 계율, 정근정념정정이라고 정수행에 해당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고집멸도, 고성제와 집성제는 이 세상의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 하죠. 그죠? 세상에 발생하는 것과 이 세상의 모습과 이 세상이 왜 일어나는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하는 거에 대한거고. 그것을 벗어나는, 그러니까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를 소먈하는 방법이 도성제죠. 그죠?

 

 

그 도성제에 의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게 뭐겠어요? 멸성제입니다. 그죠?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도성제는 출세간의 팔정도, 출세간의 도성제에 의한 깨달음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 지금 이렇게 기본적으로 이 사성제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을 세간의 정견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여러분들이 이 세간의 정견을 통해서 먼저 세간의 정견을 이해를 해야 되요. 그러면 선과 불선이라는 것은 뭐겠어요? 불선이라고 하는 것은 갈애를 바탕으로 한 마음들, 이런 게 다 불선한 마음이 되겠죠. 그죠? 무명과 갈애, 그리고 탐진치를 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마음은 다 불선한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그래서 알아차림과 지혜 등등을 개발하는 자비심, 이런 것들을 개발하는 것이 뭐에요? 그게 바로 선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집성제와 도성제를 이해하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죠? 그래서 그거를 이해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에 이 사성제에 맞게 사성제에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에요. 그게 뭐에요? 그게 바로 정사유입니다. 사성제의 입장에서 진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예를 들면 사람을 봐도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간다고 보지않고 아~ 저기 오온이 지나가는구나. 이렇게 보는 것도 하나의 정사유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정사유라고 하는 것은 사정제에 맞게, 사성제에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보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사성제의 입장에서 봤을 땐, 세상을 집착해야 되겠어요? 안해야 되겠어요? 아니죠. 그죠?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되있냐 하면은 탐욕 없음이 바로 정사유다. 성냄 없음이 정사유다. 그리고 남을 해치지 않는 것, 이건 자비를 행하는 거죠? 남을 해채지 않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이것이 바로 정사유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을 버리는 것, 어리석음과 탐욕과 성냄을 버려나가는 과정이 수행이라는 거에요. 그게 올바른 사유고. 그런데 수생을 절에 맨 날 다니면서도 탐욕과 성냄이 죽 끓듯이 한다면 올바른 수행을 하는 거겠습니까? 그런 건 여러분 스스로 자기 마음을 한 번 잘 관찰을 해 보세요.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이 이런 올바른 사유를 하므로서 가능한 것이다. 정견과 정사유는 그래서 처음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수행의 방향성입니다. 어떤 식으로 우리가 수행을 해야 된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뭐냐 하면요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 않고 불선을 선을 행하고 불선을 행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거에대한 이해를 하게되면 그러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죠. 그리고 행동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우리가 세속에 사는 분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 생계거든요. 생계. 먹고사는 문제란 말이에요. 그럼 먹고 사는 것도 내가 먹고 살기위해서 남을 해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내가 잘 먹고 잘살라고 남에게 피해가 가고, 남의 삶이 도탄에 빠지게 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정어 정업 정명입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도 거짓말 하지 말고, 남에게 거친말, 남의 가슴에 비수를 꼽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 그리고 남을 이간질 시키는 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화합시키고 서로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지 이간질 시키면 안 되고. 그리고 쓸데없는 말, 괜히 할 일없이 앉아서 어제 드라마에서 있었던 이야기, 이런 수다 떨고 이런 것도 다 불선행을 행하는 겁니다. 그것도 선업이 아니라 불선업에 해당하니까, 그런 쓸데없는 말을 너무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경전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덕담이 아니면 침묵하라. 그랬어요.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할게 없으면 말하지 말고 그냥 수행이나 하라. 그랬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정어는 거짓말하지 않고, 거친 말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쓸데없는 말, 그리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정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정업은 살도음. 살행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삿된 음행, 삿된음행이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바람피는 겁니다. 이거는 자기 배우자가 있음에도, 세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 배우자만 만족해야지 다른 사람을 취하지 말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세속에서 말하는 삿된 음행은 자기가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을 범하는거고, 스님들 같은 경우는 아예 그런 음행자체가 삿된게 되는 거겠죠. 그죠?

 

그 다음에 바른 생계는 아까 말했듯이 남을 해치는 인신매매라든가, 독약을 판다거나, 무기를 판다거나, 술을 판다거나, 또 마약같은거, 또 사기치는거. 이런 게 다, 내가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고통에 빠지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죠? 이런 직업은 갖지 마라 그랬어요. 가급적이면. 살생하는 직업 있잖아요. 그죠? 그런 직업도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직업은 가급적 피하란 말씀이죠. 그래서 이렇게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삶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생계를 유희하는 것도 청정하게 하면 우리마음일 일단 어떻게 되냐 하면 후회가 적어집니다. 뭔가 후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이 안정이 되겠죠. 그죠?

 

그러면 이 계를 지키는 거 자체만 해도 우리가 악처에 떨어질 수 있는 거친 형태의 불선업은 짓지 않습니다. 보통 이 계를 어기는, 여기서 말하는 이거를 행하는 것은 악처에 떨어질 수 있는 원인이 되거든요. 여러분들이 지옥아귀축생, 이런 데 떨어질 수 있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 계를 잘지키는 것은 그런 악처에 떨어질 수 있는 원인을, 없게 하는, 적어도 악처에 안떨어지게 하는덴 도움이 굉장히 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게 바탕이 되면 우리 마음이 안정이 되면 그때는 계율은 어떻게 보면 상황에 부딪혀서 하는 거지만, 이 선정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선법을 개발하는 겁니다.

 

보통 계율은 우리가 수행으로 치면은 하나의 수행의 기초를 이야기하고요, 베이스. 그런데 이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과 지혜수행. 그러니까 계정혜에서 선정과 지혜를 불교에서 본격적으로 수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계율은 일종의 토대고요. 그 중에서 선정은 정정진이라고 하는 거는 아까 계율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악도에 떨어 질만한 그런 불선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건데. 이 정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법을 개발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일어난 선을, 이미 일어난 악은 버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선은 더 늘리고. 그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은 일어나게 하는거.

 

다시 말하면 선법은 늘리고, 불선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개 바로 정정진입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분들이 선법이 뭔지, 불선법이 뭔지를 모르면, 바른 노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선법을 늘리고 불선법을 줄이는게 정정진이잖아요. 그죠? 그래서 세간의 정견이 없는 사람은 바른 노력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불선법을 버리고, 선법을 개발하려고 하면 뭐가 필요하겠어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되겠죠. 여러분들 마음에 선법이 일어나는지, 불선법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버릴 겁니다. 어떻게 개발하고, 그죠?

 

그래서 우리가 그런 말도 합니다. 탐욕이나 성냄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일종의 무명입니다. 그게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한테 지금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어떤 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정념입니다. 정념. 그게 바른 알아차림이죠. 그죠? 그래서 이 알아차림을 통해서 이 알아차림은 제가 다음에 한 번 좀 더 세밀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불교에서 알아차림이 바로 불교수행에 있어서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거기 때문에 다음에 제가 한 번 설명해드리기로 하고요.

 

그래서 이런 알아차림을 잘 개발하고 나면, 이 알아차림을 우리에게 일어나는 마음이 어떤건지를 알고, 불선법이 일어나면 즉시 내려놓고, 선법을 자꾸 개발해야 되요. 그러면 이런 선법을 개발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그러니까 알아차림의 대상을 점점 줄여서. 그러니까 하나의 대상에만 알아차림을 해서 알아차림의 힘을 아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삼매입니다. 삼매를 우리가 닦음으로서 아주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만들어요. 이거는 아주 마음이 고요하면서 마음이 아주 깨어있어요. 굉장히 깨어있으면서 고요한 그런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되야. 마치 이런 상태로 우리 마음이 아주 고요한 호수처럼 아주 안정되고 깨끗한 상태가 됩니다.

 

경전에서는 이 선정에 들어간 마음이 아주 때가없고 맑고 깨끗하고 밝고, 그리고 아주 부드럽고 적합하고 그런 마음상태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런 아주 청정하고 깨끗한 이런 마음상태를 만들면 이 상태에서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명확해지겠죠. 그죠? 옛날같이 어설프게 보는게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게 되겠죠. 그죠?

 

그래서 이 바른 선정을 닦고 나면, 이 바른 선정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정견이 명확해 집니다. 정견과 정사유가 명확해 지고, 이 선정을 바탕으로 해서 이 세상에 있는 현상을 있는 그 대로 바라봤을 때 그때 사성제를 꿰뚫게 됩니다.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꿰뚫게 됩니다. 이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 결코 무상하다. 우리가 영원한 것은 없다. 무상, 또 고, 괴로움이고, 무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보게 되면 그것으로 사성제를 꿰뚫게 되거든요.

 

무상함을 보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염오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멀어지는 지혜가 일어나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욕이라 그래서 욕망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해탈이 일어나죠. 그래서 선정을 바탕으로 해서 바른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지혜수행을 하게 되면, 그 지혜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오온이는 것이 공함을 알게 되요. 오온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는 걸, 그걸 통해서 우리가 해탈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간략하게 이 팔정도가 어떻게 구성돼 있다는 것을 설명을 드렸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부연설명이 할겁니다.

 

오늘은 개괄적인 팔정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부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팔정도를 설하셨는가에 대한 설명만 드렸고요, 다음 시간에는 제가 오온에 대한 설명을, 오온을 다음시간부터 몇 번, 우리가 고성제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에 보면 뭐라고 돼 있어요? 오온이 공함을 알면 도일체고액한다, 그랬죠? 그죠? 그럼 오온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공한걸 알겁니까? 그죠? 그래서 오온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오온을 이해를 하고, 그 오온의 공함을 보는 것이, 어떻게 보면 불교의 수행이고, 그걸 보도록 하기 위해서 계정혜수행을 부처님께서 말씀을 해 놓으신 거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좀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