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깨어있음

윤홍식_선의 정신으로 개벽을 대비하라!

Buddhastudy 2017. 4. 19. 23:05


     
제 강의를 듣고 조금이라도 자명한 것을 추구하시는 분이라면, 찜찜한 것을 껴안고 계시지 마세요. 털고 가세요. 항상. 그게 뭐든지 간에. 저도 제 선생님 꺼, 다 털고 지금 이 자리에 온 거에요. 선생 꺼 껴안고 있을 때 답이 안 나왔어요. 선생님이 도움주려고 하신 말도 저한테는 그게 독이 될 수가 있어요. 나중에 그것도 다 벗겨내야 제 것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제가 답을 내린 게 각자가 자기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최선을 다해 구현하는 것 말고 우주에서 자명한 게 있겠는가 이거죠. 
     
남의 말은 그 사람한테 자명한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이 맞더라도 여러분한테는 독이 될 수가 있고, 여러분한테 자명한 것은 아니에요. 공자님이 참나가 있고, 마음 작용이 있죠. 이 마음작용이 여러분의 우주에요. 여러분의 우주. 이게 마음이구요. 결국. 마음의 본체가 참나니까. 여러분의 우주는 다 참나의 작용이에요. 이게 순수한 나죠. 그래서 선사들이 내가 있어서 모든 문제가 생기고, 내가 있어서 우주가 있다.
     
이 말이 대게 처음에 들으면 “무슨 내가 있다고 우주가 있어? 우주가 있고 내가 있는 거지.”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해요. 이것도 다 화두입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태초도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있어서 우주가 종말도 있는 거고, 
여러분이 있어서 또 다시 시작하는 거고. 
여러분이 있어서 태초도 있는 거예요. 
     
일단 여러분이 없으면 태초라는 말이 어디 붙어요? 여러분이 있으니까 여러분이 지금 계신 이 시점을 기준으로해서 과거니, 미래니가 나오고, 과거에 저 근원의 태초가 성립되고, 저 끝에 종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게 나를 기준으로 정립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없다면 
어디에 그게 태초니, 과거니, 미래니가 아무것도 못 붙어요. 
즉 여러분이 느끼고 경험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여러분의 마음 작용이에요. 
객관적인 게 없다는 게 아니라. 
     
달이 천강에 비친다고 월인천강 그러죠. 제가 이 펜을 들었지만, 여러분 각각의 우주에 이 펜이 다 나타납니다. 제가 이것을 드는 순간 다 나타납니다, 모든 우주에. 이것을 보는 우주에는. 그런데 그 마음마음마다, 나타나는 이 팬은 다 날라요. 느낌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너무 까맣네.” 어떤 사람은 “덜 까맣네.” “어쩌네.” “펜이 쓰기 좋겠네.” “나는 저런 것 별로네.” 온갖. 우리가 경험할 때, 생각감정 오감이요,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보고 들은 거에도 감정이 끼고 생각이 껴서 다 자기만의 그것을 만들어 놔요. 그러니까 백프로 객관적인 게 어떻게 있을 수가 있어요? 저를 봐도 여러분 우주에 나타난 저는 다 달라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사람 우주에 저는 아주 쓰레기일 수도 있어요. 내 존재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도 불쾌한 존재. 어떤 사람 우주에는 아주 후광까지 비칠지도 몰라요. 그건 그 사람 우주의 사정이죠. 각자 다 달라요. 연예인 하나도, 어떤 사람의 우주에 그 연예인은 아주 그냥 후광이 피치고, 어떤 사람한테는 “아, 대마초 피고 뭐하고.” 
     
그럼 이 사람 우주에서는 대마초도 한약의 일종으로 다 정립되어 있어요. “대마초도 약이지 뭐.” 그런 움직임도 실제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각자의 우주에 다 달라요. 지금 대선한다고 난리죠. 각자의 우주에 있는 후보들은 다 지금 달라요. 어떤 사람 우주에는 그 후보가 아주 그냥 이 세상을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고, 어떤 사람 우주에는 아주 그냥 모리배 중에 모리배고.
     
그런데 객관적인 게 없을까요? 
다 다르다고만 얘기하면 끝나도 될까요? 아니에요. 
각자의 보편적 양심이 있어요. 우리 안에. 
가장 순수한 나. 
시공의 오염되지 않은 나. 
이런 판단에 오염되지 않은 나가 있어요. 
     
이 나를 지속적으로 자각하지 않으시면 
여러분은 엄청나게 오염된 상태로 
왜곡된 눈으로 세상을 계속 보고 계신 거예요. 
     
설마, 인류가 마음대로 보다가도 이런 얘기 들으면 모두가 다 ‘설마’ 그럽니다. “설마, 내가 왜곡되었을까?”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은 
예전에 주자도 
내 안에 있는 인의예지의 원리가 있죠. 
원리랑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심여리. 
마음과 리를 하나로 하는 작업이 이 철학, 도학이다.
라고 예전에 성현들이 얘기하셨거든요. 
     
다른 게 아니라 양심에서 이 원리가 양심의 원리인데, 
양심의 원리에서 자명, 찜찜. 이렇게 얘기하는데, 
양심에서 자명하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 마음에서 자명하다고 여기나요?
양심에서 찜찜하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 마음도 찜찜하다고 느끼나요? 
요것만 일치시켜주면 우주에서 제일 잘 사시는 거예요. 
여러분의 우주는 투명한 우주에요. 
     
참나라는 이 등이, 여기 등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언제 제가 이것을 꼭 하나 구입해서 보여드릴게요. 둥근 이렇게 씌여져 있는 유리막 같은 거 있죠? 투명막이 씌여져 있고, 가운데 등하나 있는 거. 이 등이 자명 찜찜이 우주표준하고 내 마음의 판단과 일치가 되었다는 것은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전등이죠. 그런데 여러분, 일치가 안 된다고 하면 시커먼 등으로 둘러싸였어요. 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를 못해요. 여러분 안에서는 보편적 판단이 일어나는데 내면에서는 여러분의 자의식이 왜곡시켜놔서 멋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해버려요. 실천을.
     
그래서 양심이 없는 거랑 진배가 없어져요. 시커먼 상태.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에 이 등이 꺼진 것은 아닌데, 막이 시커머니, 빛이 하나도 안 새어나오니, 그것은 어차피 깜깜한 거랑 똑같아요. 이 정도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악도 중에 삼악도 갈 지경에 가는 거예요. 이런 존재되지 마시고, 계속. 
     
우리가 하는 일은 두 가지 공부입니다.
1. 우리 내면에 이런 광명한 광원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시고, 
2. 내 에고에,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감정오감작용이 양심과 일치해서 작용되도록 계속 끝없이 갈고닦는 거예요. 
     
닦는 만큼 닦여요. 
이것은 끝이 없어요. 영원히. 닦고 또 닦고. 
왜 그러냐하면 
현상계라는 것은 무상하니까, 
내가 닦아도 또 먼지가 껴요. 또 닦고. 
그러니까 내가 예전에 많이 닦아놨다고 쉬면 어떻게 되요? 
다시 먼지가 끼어서 시커메져요. 지랄 같죠, 이게. 
     
요 부분 공부가 아주, 요 부분 공부만 하라면 누구나 다 잘해요. 
모른다만 잘하면 되거든요. 이 자리 느끼는 것은 쉬워요. 
     
모른다만 잘하시면 되요.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으시면 그 자리 이미 참나에요. 
여러분이 지금 저랑 여러분을 구분하지만 않으시면 여러분 이미 참나 상태에요.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죠. 
지금 눈을 감을 필요도 없어요. 
저를 보시더라도 나다, 남이다하지 않고 그냥 존재해 보세요. 
     
이 공간과 나를 분리하지도 마시고. 
어떤 분별, 어떤 경계를 안세우면, 
쪼개는 작용을 안 하시면 그 상태가 사실 참나 상태에요. 
     
이 우주가 그대로 참나 작용이라는 게 
둘이 아니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이게 나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다 하면 남이 생겨요. 마음에서. 그래서
     
모든 선의 답은 
판단 중지입니다. 
     
머리를 막, 짱돌을 굴리고 있는 제자를 볼 때 스승이 어떻겠어요? 부처되겠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선생님이 이렇게 공격해오면 내가 이렇게 해서 막아야지, 멋진 대답을 해야지.”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가서 진짜로 몽둥이로 패는 거예요. 도와주려고. 
     
몽둥이로 맞을 때 머릴 굴러가겠어요? 
머리가 하예지죠. 
그렇게라도 해서 잠시라도 
머리를 좀 멈추게 하려고.
     
판단중지가 선인데, 판단중지를 배우려고 절에 가서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어떻게 판단을 중지한다?" 하면서 끝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지금 실제로 다 그래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 명상한다는 분들이 또 머리 엄청 굴리고 있어요. 뭘 보면 아느냐? 눈이 계속 흔들려요. 그런데 며칠 전에 페북에서 어떤 분이 우리나라는 영어 공부 잘못하고 있다. 안 되는 짓만 하고 있다. 안 되는 방향으로만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정력을 쓰고 있다.
     
그런데 제가 그거 보면서 느끼게 “어, 선도 그런데.” 그랬습니다. 정신 공부도 그런데. 영어를 진짜 잘하는 사람이 보면, “뭐 이런 뻘짓을하고 있지?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을 배우고 있지?” 라고 느끼시겠죠? 오, 이게 통하지도 않을 거를 배우는데, 몇 십 년을 쓰고 있어요, 한국인들은. 제가 보는 그게 똑같아요. 
     
견성하는 데, 
왜 저런 말이 나오고, 
왜 저걸 배우고 있는지, 
이해 안되는 게, 어마어마해요. 
그냥 가볍게 판단중지에요. 지금. 
     
저를 보시되,
저랑 여러분을 둘로 보지 마세요. 
아무것도. 우주의 모든 것을. 
몰라 하시고 모르겠다 하시고 그냥 존재만 하세요. 
     
일체 보고 듣고 느껴지는 것을 다 없애라는 게 아니라, 
이게 생각이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고, 오감이 일어나도, 분별하지만 마세요. 
뭐라고 하지 마시고 그냥. 구름하나 떠가도록 놔두고, 
여러분은 청정한 하늘이 되어서 존재하세요. 
구름 몇 점 떠다닌다고 하늘이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모르는 마음이 더 크면 그런 거 아무 문제가 안 돼요. 
     
모르겠다. 내 이름도 모르겠다. 
이게 최상승선입니다. 
화두가 최상승선이 아니고. 
     
화두가 최상승선이 되려면 화두를 딱 들자마자 모른다가 되면 그 분이 최상승선을 닦는 거예요. 그래서 화두자체가 최상승선이 아니구요, 그래서 본인들도 얘기하잖아요, 거기서도. 
     
활구를 참구해야지 
죽은 사구를 참구하면 안 된다 
이게 다른 게 아니라,
같은 화두인데 
그거 들고 머리 굴리면 사구, 죽은 화두공부가 되고, 
‘이 뭐꼬’ 할 때 딱 판단중지에 들어가면 
그 양반은 살아있는 화두를 참구한 거예요.
그때만 최상승선이에요. 
     
그래서 활구참구가 아니면 
최상승선이 아니에요. 
     
화두를 한다고 내가 가장 훌륭한 선을 닦는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인 겁니다. 
화두 아니어도 되요. 
호흡을 닦아도 되고, 그냥. 
뭐든지 판단 중지에 들어가시면 어떤 대상을 붙잡건
판단 중지에 들어가면 여러분 그대로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마당에 있는 뜰 앞에 잣나무도 최상승선이 되요. “부처가 뭡니까?” “저 나무야.” 하면 탁 나무 보는 순간 판단중지에 들어가면 그게 그대로 최상승선이에요.
     
그런데 딱 나무를 보고 온갖 생각이 또 일어나면 그건 다 쓸데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왜 나무를 보라고 했을까? 어떤 대답을 해야 멋진 대답이 될까? 합격은 해야 될 텐데. 뭔가 머리가 굴러가고요, 불경들이 지나갑니다. 나무관련 경전 구절들이 막 지나가요. 나무 나무 나무. 검색을 해봅니다. 그건 뭐, 머리 굴리는 것보다 요즘 스마트폰하나 들고, 잣나무. 쳐보고 보는 게 낫죠. 
     
이거랑 견성이랑 뭔 상관이 있을까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부처가 뭡니까?” “견성이 뭡니까?” 했을 때, 제가 요거 딱 들었단 말이에요. 요 펜을 보실 때, 이거 하나에 어마어마한 게 들어있어요. 의미가.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은 그건 나중 얘기고, 이걸 보실 때, 판단중지하고 보셔야 되요. 요것만 보셔야 되요. “이게 뭐라고?”도 하지마시고. 그러면 거기에 여러분의 실상이 드러나요.
     
이게 놀라운 게 요것을 통해 여러분도 알게 되고, 요것도 알게 되요. 우주에서 이 모두가 다 같이 꽃 피워요. 요것을 깨어서 보시는 순간. 깨어서 보는 그 자리가 참나에요. 그렇죠? 자, 먼저 방법론상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안 해줘요. 다른 데서는. 몇 십 년씩 하는 거예요. 요거 하나 이해하는데. 몇 십 년 하다가 요거 근처까지만 가도 난리가 납니다. 도를 얻었다고. 
     
왜? 남들은 더 못하니까. 남들하고만 비교하만 안 돼요 상대적으로 자꾸 비교하시지 마시고. 요거를 딱 깨어서. 제 선문답 책에 다 써 있어요. 
     
요걸 딱 보시는 순간, 
깨어서 보시면,
몰입해서 깨어서 보시면 
여러분 내면에서 순수한 여러분의 근원이 드러나요. 
판단중지하고 보시면 
생각, 감정, 오감이 작동이 아주 안 된다고는 아니더라도, 
작동이 덜하게 되면 이게 강해져요. 
     
그래서 참나만 찾아도 대단하신 거예요. 이거 하나만 보다가 안에 화평이 일어나고 내면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순수한 자신이 있다. 생각, 감정, 오감 이전에 판단 중지된 상태에서도 나는 있더라까지 아시면 아공까지 깨치신 거고, 이거가지고 법공까지 깨치시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요걸 왜 들었는지까지 알게 되요. 다른 방법도 있는데 왜 요것을 왜 들었을까? 요게 부처라고 왜 그랬을까? 
     
요게 여러분 우주에 대상이 정립되려면 뭐가 있어야 되죠? 알아차리는 자가요. 태초가 있으려면 여러분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요 펜이 있으려면요, 
지금 여러분 마음에 펜이 들어온 거죠. 
제가 이 펜을 든 순간, 여러분 우주에 펜이 나타난 거예요, 갑자기. 
그 펜은 누가 만들었어요? 
여러분 마음작용이니까 누가 만든 거예요? 
여러분 참나가 만든 거죠. 
 그럼 “부처가 뭡니까?” 하면서 이 펜을 보여준 것은 
여러분 참나의 작용을 보여준 거예요. 
     
여러분 참나가 지금 펜을 
여러분 우주에 만들었다하고 보여주는 거예요. 
요게 단순한 펜이 아닌 거예요. 
참나의 작용이지. 
여기까지 이해하시면 법공까지 이해해요. 
     
그래서 화두라는 것은 깨치는 정도에 따라서, 어디까지 깨칠지는 그 사람의 영성 수준에 따라 또 달라요. 같은 화두를 풀어도 대화를 해보면 달라요. 요거 왜 들었는지까지 아시고 나면. 그러니까 예전에 구지선사가 “부처가 뭡니까?” 하면 손가락 하나 들었데요. 지금 이 손가락이 제 손가락 같죠? 여러분 우주에 손가락이 지금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 참나가 손가락을 여러분 마음에 나타나게 했어요. 요것을 탁 판단중지하고 보시는 동안, 여러분 참나를 깨치시는 거고, 더 나아가서 어디까지 아시냐하면 영성이 있는 사람은 저 참나가 내 참나의 작용이구나. 둘이 아닌 그 깨어있는 안목으로 보면 여기까지 이해가 되요. 체험이 있으니까 이해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뭐가 되요? 손가락 하나 보신 게 아니라니까요. 사실 우주를 보신 거예요. 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이 손가락이랑 똑같아요. 
여러분 참나가 만든 거예요. 지금. 
지금 여러분 마음에 나타난 모든 것은 
참나가 만든 거예요. 
참나만 아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보여준 것은
이 손가락이 어떻게 네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는지까지 알아내라는 거예요. 
참나 없이 손가락이 있을 수 있나요? 여러분이 없이, 이게? 
     
그러니까 예전 어른들이 거기에 대해서 평을 달 때, 
손가락하나를 들었지만, 우주가 다 꽃피웠다라고 하는.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우주가 한번 들썩 하는 거예요, 
이 원리를 알면. 
     
대신 별개 아니라 여러분, 
몰라하고 여러분의 내면의 근원으로 돌아가셔서 
거기서 우주를 한번 봐보세요. 
그럼 들리는 소리, 바람 부는 거, 하늘이 파란 거 
다 내 참나의 작용으로 보여요. 
     
왜? 내 오감, 내 우주에 나타난 거니까. 이것을 말로 하면 "뭐, 그럴 수 있지." 이게 아니에요. 체험을 하면서 느끼시면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내가 사는 우주가 달리 보여요. 이런 체험이 없이, 이런 체험이 오래 쌓이지 않고, 확철대우니, 견성이니, 이런 것을 말하는 거는 의미가 없고, 이것을 바로 들어가야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화두를 들고 “언젠간 되겠지” 하고 합니다. 대게 몰입의 달인은 되는데 견성은 영 몰라요.
     
이 뭐꼬도 하는 법이 여러 가지에요. 이 뭐꼬. 뭐,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고, 뭐 하고. 그것은 제가 볼 때 영어 발음하겠다고 엉뚱한 짓하고 있는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건 뭐냐?” 요걸 볼 때, 이건 뭐냐? 할 때 이게 뭐냐고 하는 거예요. 이것의 본질, 이것도 되요. 넌 정체가 뭐냐? 이게 뭐에요? 참나의 작용이요. 이렇게 바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건 뭐냐?”할 때 
이것을 보는 이놈은 뭐냐는 거예요. 
내 우주에 이걸 등장시킨 그놈은 누구냐 하고 들어가면 
참나를 만나고 참나를 만나면, 이놈이 뭔지도 나와요.
     
이제는 이건 단순한 펜이 아니에요.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펜이 아니에요. 
“이건 뭐냐?”했을 때, 요놈이 뭐가 되요? 깨치고 보면? 
내 참나의 작용이에요. 이게 일체유심조입니다. 
     
이거 일체유심조까지 모르시면 확철대우는 아니에요. 
아무리 참나 안에서 안주해도 아공수준에 안주하면 
아라한이라고 해요. 아라한밖에 안 돼요. 
방금 요 소식까지 알면 법공을 알면 이제 초보보살이 되요. 
초보보살을 확철대우 했다고 하는 거예요. 
이 정도 알면 왜 보살이라고 하냐하면 현상계와 싸우지 않아요. 
현상계가 다 내 참나의 작용이니까. 
     
아라한들은 현상계랑 싸워요. 그러니까 청정한데를 찾아가야 되고, 자신의 오온하고 싸워야 되요. 자신의 생각감정오감과 싸워요. 왜? 참나만 알았지, 이 놈들의 정체는 아직 몰랐으니까. 이해되세요, 여기까지? 이것만 한번 들으셔도 평생 참선공부 잘못하신 거 다 바로잡힙니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몇 십 년 하셨데요. 제 강의 듣고 허탈해서 오셨어요. 진짜 허탈하셔서. "아, 맞는 거 같아요."하면서. 자신의 그 지난 세월이 안타까운 거예요. “아, 맞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나요.” 제 강의를 들을수록 자명하고 허탈하다는 거예요. “왜 나는 이렇게 안했지.” 하는 거죠. “왜 이것을 이제야 들었지?” 
     
이게 어떤 성철스님의 한분의 문제가 이날, 우리나라 제가 볼 때는 불자 분들이 꼭 들으시고 견성을 꼭 하기 싶으시면, 불자 아니라도 이거는 초등학생도 하 수 있어요. 저희가 초등학생한테 지도해봤더니 
     
초등학생도 판단중지 들어가니까 
바로 견성을 해요. 똑같이. 
     
나라는 존재 핵을 바로 느껴버려요. 
순수하니까 더 잘해요. 
     
어른들 지도하면 요게 요게 요겁니다. 아무리 해도 눈이 굴러가고 있어요. 자기가 기존에 알던 지식하고 지금 검색해 보느라고, 맞추어보느라고 바빠요. 초등학생은요, “생각감정 몰라해.” “오, 진짜 몰라져요.” 바로 그래요. 팔다리 찾고 그래요. 팔다리가 있는 줄도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도 넌 있지?” “있어요.” “어때? 그 느낌이?” “환하고요, 빛나고요.” 애가 학교 끝나고 집에 갔다 다음날 와서 “집에 가도 계속 있었어요.” 이런 얘기를 지금 주고받으면 절에서 주고받으면 난리 납니다. 그런데 이 초등학교에서 일어나니까 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는 거죠.
     
또 자기가 발심해서 한 게 아니라, 되다가도 그러다가가 그냥 말아요. 계속, 선생님이 계속 하라고 안하면 안 해요. 그런데 몇은 또 끝까지 해요. 자기 형제랑 싸웠을 때, 엄마한테 지적받았을 때, 방에서 한데요.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지니까. 활용하는 친구들도 몇 프로는 꼭 있었어요. 제가 실험해본 결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대상으로. 예전에. 그것도 예전에 동영상에 발표했었어요. 유튜브에 발표해 드렸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 어떤 지경이냐 하면, 아까 영어로 예를 들었으니까. 지존에 영어 공부한 한 사람이 더 안 되는 격인 거예요. 잘못된 습관이 들어서. 이제 막 순수한 시작한 친구들이 더 잘하고, 어린아이들이. 오랜 수많은 각종, 토익 토플 수많은 영어 문법을 막 씹어 먹고 하셨던 분들이 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그 격이랑 똑같아요. 이게 불교에서 뭐 좀 했다는 분들이 저희가 지도해 보면 훨씬 힘들어요.
     
묵은 관념과 묵은 습관들하고 싸우는 게 대게 힘들어요. 기존에 엉망으로 프로그램이 깔려있어서 그거 지우는데 대게 힘들어요. 아무것도 안 깔려있는 친구는 그냥 깔면 끝나요. 이것도 아셔야 되요. 그래서 “내가 좀 오래 했네.”하고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 겸손한 마음으로 하시는 게 훨씬 효과가 좋아요. 이거 한번만 생각하십시오. 
     
왜 요 말씀 오늘 드리냐 하면, 지금 보면 대선 때문에 다 과열되어 계시고, 너무 그러지 마시고, 시공문제 때문에. 저는 과열되지 말자, 미지근하게 살지 말자가 아니라 화끈하게 살자는 주장이지만, 돌아서면 또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되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초연할 수도 있어야 되요. 
     
싸울 때는 화끈하게 싸우시고 
돌아서서는 또 초연해질 수가 있어야 
다음엔 사람들을 상대할 때 
더 양심을 따라서 처신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분대로 안하고. 
늘 이렇게 자기중심을 자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주변의 매몰되지 않고 
항상 중심에서 상황을 보기 때문에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요.
     
다시 보지 않을 사이처럼 막 그러지 마시고, 
따질 건 확실히 따지되, 
그게 항상 상생으로 작용하게 하려면 초연하셔야 되요. 
     
그래서 상대방 말이 맞으면 또 바로. 그러니까 여기까지 싸웠으면 “내가 맞는 말을 해도 저 사람이 거부하겠지.” 할 상황인데, 도인은 뭐가 달라야 되요? 그럴 때 또 수용할 수 있어야 되요. 방금 전까지 싸우다가도, "음,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럼 상대방이 당황할 걸요? “오 이게 인정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싸우려면 이렇게 쉽게 수긍하면 싸움이 안 되는데. 
     
도인하고 만나면 헷갈려요. 이 사람의 판단 기준이 자기 판단기준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자명하면 맞는다고 하고, 찜찜하면 아니라고 하니까. 우리 편이니까 좀 봐 주겠지 하니까 지적하고, “그건 찜찜한 거야. 하지 마.” 또 나는 다른 편, 다른 당이니까, 저 사람이 거부하겠지. 하고 얘기했더니, “으흠, 그 말은 당신 당 말이 더 자명해.” 이 말 하실 수 있어야 되요. 이런 말씀 못하시면 어디서 마음 공부했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일반인하고 도인이 그게 달라야죠. 그런데 그 근원이 그렇게 무슨 일부러 습관을 만든 게 아니라, 양심을 자각하고 살다보니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그래도 마음 공부하러 오셨으니까, 참나 반드시 자각하시고, 앞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이 참나만 붙잡고 사세요. 모든 문제는 여기서 해결합니다. 생사걱정도 거기서 해결합니다. 
     
죽음이 두려울 때도 
몰라하고 참나한테 맞기고 
여기 하느님 자리에요. 
참나니까 ‘나’라고 착각하시면 안 돼요. 
나는 나죠. 나의 존재 근원이니까.
     
하지만 거기는 
모든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하느님 자리에요. 
하느님한테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참나, 
예전에 대행스님 같으면 주인공, 다 똑같아요. 
그 자리에 맞기고 쉬시는 연습을 지금 부터 계속 하세요. 
겁나시죠? “나 중병 걸린  거 아닌가?” 건강이 염려, 이게 사람을 참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또 흔쾌히 병원은 안가요. 혼자서 고민하지. 
     
아무튼 가실 때 가시고, 이것도 몰라를 자꾸 하시면 다 흔쾌히 움직이는 힘이 커지니까, 필요한 처방도 하시고, 또 쓸데없는 염려증일 때는 몰라하고 안에다 맡기고 쉬실 수 있어야 되고, 두려움, 불안함. 인생에서 앞으로 닥칠, 앞으로 불행 안 닥칠까요, 우리한테? “살아보니까, 불행이 오더라.” 그러면 앞으로 올 불행이 또 두렵죠? 참나한테 맡기고, 지금 이 순간 참나와 함께 하실 수 있나요?
     
계속 맡기셔야 되요. 무조건. 힘드실 때는 더 맡겨야 되요. 이게 건강할 때는 하늘이 맑고 구름이 적을 때는 구름 좀 떠다녀도 괜찮은데, 구름이 하늘을 뒤덮을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일단 구름을 좀 잡아야죠. 계속 맡기세요. 웬만하면. 마음이 심란할 때는 일단 무조건 다 참나한테 맡겨서, 청정한 하늘을 일단 만드세요. 그러니까 
     
몸이 아프시거나 힘드실 때는 
무조건 몰라하고, 
지금 인 순간 청정하고 태평한 마음을 만드실 수 있어야 되요.
     
에고는 생각감정오감의 인과대로 굴러가요.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도 에고는 힘들다고도 할 수 있어요. 
아니 힘든 일이 생겼으면 힘들어하는 게 맞죠. 
슬픈 일이 생겼으니까 슬퍼하는 게 맞죠. 
그런데 관심을 여기다 덜 주고, 여기다 더 주는 것뿐이에요. 
이 친구들 없앨 필요는 없어요. 
그 구름 좀 떠다니고 그런 거 괜찮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 좀 떠다니는 거 괜찮으니까 
여기에 관심을 주지마시고, 참나한테만. 
     
지금 이 순간 두개 다 내 마음이잖아요. 
청정광명한 이 자리도 내 마음이고, 
힘들어죽겠다는 것도 내 마음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힘들어 죽겠다는 데만 자꾸 관심 갖고 보고 있으면 이게 증폭이 되요. 그러니까 여기다 관심을 좀 주자는 거예요. 둘 다 내 마음이니까. 근원인적이 마음에다 관심을 주고계시면 이 친구가 약해지고, 좀 적절히 중화 되요. 그럼 살만해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몸도 더 건강해져요. 스트레스를 덜 받으니까.
     
안 그래도 몸도 아픈데 스트레스까지 더 주면 더 아프죠. 그런데 모른다하고 다 참나한테 맡기고, 생사도 거기다 맡깁니다하고 맡기고 쉬실 수 있냐는 거죠. 죽으나 사나 모든 사람은 이것을 해야 되요. 산다는 게 쉬운 얘기가 아니잖아요, 죽을 때까지. 결국 우린 죽고 끝나요, 다. 안타깝지 않아요? 여기서 아무리 여러분이 큰 작품을 만들고, 큰 공을 세우건, 멋진 인간관계를 맺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우리 홀로 떠납니다. 
다 준비되신 분들이에요.
     
혼자 “나는 안 죽을 거야.”라고 생각하신 분 안계시잖아요. 단 우리가 어떻게 사나요? 평소에. 생각 안하고 살죠, 그냥. 그런데 조금 더 나가서, 참나한테 맡기는 마음으로 좀 더 한번 내면의 평화를 찾고 살자는 거죠. 그래야 진짜 힘든 상황일 때도 극복할 힘이 생기니까. 그래서 일단 이것만 해도 여러분, 제가 사실 이것만 지도해 드려도 도움이 되실 텐데, 양심까지 얘기하니까, 힘들어하실 거 같아서. 이런 얘기도 한번 드려봅니다. 여기다 양심 보태면 또 힘들어지실까 봐. 
     
이것대로 사는 게 사실 양심대로 사는 거고, 양심성찰이냐 하는 것은 양심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도와드리는 팁일 뿐이에요. 본질은 여러분이 양심과 함께 살아갈 수 있냐는 거예요. 이 두부류가 있죠. 공부 잘못하는 부류가 두 부류가 있겠죠. 
     
양심은 모르겠고, 
자신의 생각감정오감은 내려놔버리고, 
막 살면서 내면에 참나만 늘 붙잡고 살아가는 엉터리 도인들, 
     
또 하나 참나는 모르겠고 광원을 모르는데, 
생각감정오감만 양심적으로 만들려고, 
그러니까 뿌리가 없는데 잎사귀만 화려하게 만들려고 뿌리는 약한데, 
그래서 고생하시는 분들. 
둘 다 힘들어요. 
     
양심하다 지쳐요. 내면에서 안 받쳐 주니까, 샘이 말랐는데 그 물 가지고 많은 일을 하려니 이게 일이 됩니까? 또 어떤 분은 근원만 지키고 있어요. 이 물을 가지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고. 그 물 콸콸 잘 나온다 하는. 물 마를까봐 여기만 들여다보고 있는. 
     
제일 훌륭한 보살은 뭐죠? 
늘 샘이 솟게 늘 
이쪽도 관리해주고, 
또 이쪽은요, 
그 물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이런 덕을 갖추어야죠.
     
사실 이게 한 얘기인데, 하나인데 ‘양심 잘하자.’ 이게 끝이에요. 그래서 이 양심 잘하자는 말을 무슨 바르게 살자. 이정도 이해하시면 안 돼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늘 양심을 따르자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양심이 이 참나를 말해요. 
     
참나로서 양심을 이해하셔야 되요. 
내 참나, 우주에 근원으로서 그 마음이 지금 내 마음에 있는가 
하는 것을 자각해야 양심을 따르는 그에요.
     
그리고 그 양심에서 나오는 자명찜찜의 신호랑 
내 마음에 이 작용들이 일치시켜가면서 살아가는 게 
양심을 따른다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바르게 산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르게 살자. 이런 차원이 아니라구요. 이 안에 양심을 따르자, 이 안에 지금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 안에, 팔만대장경을 다 둘둘 말면 마음 심자, 하나다 그랬죠.
     
마음 심자 하나에요. 여러분 마음에 양심이 잇고,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양심으로 욕심을 경영할 수 있으면 팔만대장경 봐도 다 이해가 되고, 요것을 못하시는 분이 팔만대장경 보면 그냥 지식이 느는 거지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참나 어디 있나요? 
여러분 존재의 근원 느껴지시나요? 
생각도 감정도 오감도 아닌 그 자리. 
의식의 핵인 그 자리. 
     
그래서 지금 내가 경험하는 생각감정오감, 즉 내가 살아가는 모든 우주가 거기에서 나온 빛으로 지금 돌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존재의 광원이죠. 광원. 빛의 근원. 그 자리를 자각하고 사셔야 됩니다. 모른다만 하시면 되요. 얼마나 쉬워요. 
     
몰라 하면 생각이 판단중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판단중지만 하면 그 자리에요. 
판단 중지하고 있는데, 존재하는 나, 그 자리. 
나다 남이다도 없지만, 아무튼 내가 존재하고 있죠. 그 자리에. 
그 자리에서 쉬세요. 충분히 쉬세요.
     
힘들 때는 더 많이 쉬세요. 
어차피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올 때는 거기서 더 쉬세요. 
쉬다보면 자명한 답이 또 나옵니다. 
이렇게 꼭 살아가시기를 일단. 
     
     
이런 분들이 많이 나오셔야 됩니다. 우리 끼리 농담으로 최근에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웅녀프로젝트를 진행해보자. 뭔 말이게요? 제가 지금 개벽시기라고 많이 말씀드렸죠. 개벽할 때다. 어차피 개벽됩니다. 물질이 개벽이 되요.
     
제가 어느 대학 강의 갔더니 인공지능, 이런 거 연구하시는 학자님들이랑 산학협동에서 제 강의를 들었어요. 현장에서 인공지능 만드시는 분하고 학계 쪽에 계신분하고 같이 제 강의를 듣는데, 오셔서 제 강의 많이 들으신 분이 “선생님말씀이랑 너무 맞다.” 
     
제가 앞으로 정신개벽이 
204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물질 쪽에서도 그때 특이점 온다고 
2045년이면 인공지능이 획기적으로 
지금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고 
그렇게 보고 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분이 맞추어본 거예요. "연도가 비슷해요"하고. 제가 듣고 "오 그래요." 정신개벽과 물질개벽이 지금 둘이 만나서 크게 한번 삶을, 우리 지구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때가 오는데, 인공지능이 그러니까 개발되어야 되는 거예요. 사실. 인공지능을 두려워하시는 것은 구시대의 문화에서는 그게 타격이 커요. 그런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면 그게 문제가 안 돼요.
     
그러니까 그릇이 요만할 때, 그릇이 요만한데 이것을 어떻게 담아요? 그러니까 이 그릇에 집착해서 이런 것들이 삶에 다가오니까 감당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릇을 키워야죠. 이것을 거부하실 게 아니고. 그릇을 키우면 어떻게 되요? 그냥 안에서 잘 놀아요. 아무 문제없이. 
     
인공지능을 굴릴 수 있는 해법을, 
그런 문화적 해법을 찾아내라는 게 
지금 이 우주가 던지는 화두입니다. 
이거 못 푸는 분들이 그냥 나가떨어져서 
인공지능을 막아야 되나? 뭘 해야 되나? 
답은 없고 끙끙 앓고 계시죠.
     
그래서 선을 닦았다는 분들이 
그러고 계시면 되겠어요? 
     
여러분, 그럴 때 몰라 하세요. 
뭐가 다가오든지 
몰라하고 보면요, 답이 보여요. 
     
뭐야? 왜 내가 구시대의 패러다임을 붙잡고 요것을 어떻게든 그 안에 맞춰보려고 하지? 어차피 농업사회 때요, 농업사회 불과 100년 전 사람들이 농업사회살 때, 지금 우리가 산업사회 거쳐 정보화 사회 사는 거 상상도 못했어요. 100년 전분이 지금 이런 문명은 상상도 못 한다고요. 우리 할아버지 때에 그 이전분들이 지금 이렇게 사는 거, 상상도 못하죠. 100년 뒤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고요? 말도 아닌 소리죠. 
     
그런데 더구나 이 진화속도가 더 빨라졌기 때문에, 이제 지금 부터 100년 뒤에는 억울하시죠? 100년 뒤 보고 싶으시죠. 저도 가끔씩 억울할 때가 있어요. “100년쯤 뒤에 태어나지.” 또 태어나시면 되요. 그러니까 아무튼 그때 또 태어나서 누리세요. 또 뽀로로부터 시작하셔야 되지만. 그래서 또 하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윤회는 자꾸 또 오고, 또 와서 계속 하는 거예요. 
     
아프리카 사람들 걱정되시죠? 다음 생에 아프리카에 태어나시면 되요. 가서 또 보살도하시고. 아니 좀 넓게 보세요. 좁게 보지 마시고. 한생을 가지고 계산하시는 거, 답이 안 나옵니다. 어차피 여러분, 
     
화엄경에서 십지보살되는 거 배우죠? 
한생에 안 돼요. 
화엄경에 진리가 맞다면 어차피 윤회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 한생에 될 내용이 아닙니다. 절대. 
애초에 전제를 3무량겁에 걸린다고 써 있어요. 
     
그러니까 그 윤회 피하시지 마시고, 여행가는 기분으로, “다음에 어떤 삶을 살아볼까?”하고 오히려 지금 잘 살아서 다음 생까지 잘 연계되게, 덕이 잘 이여지게, 공덕이 이어지게 지금부터 조심해서 삶을 관리해야 되는 거지, 그거 거부한다고 안 오고하는 거 아니니까. 윤회 거부하는 분들은 요 부분은 듣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분한테는 자명하지 않은 얘기니까. 저한테는 자명해도. 이런 얘기는 무시하셔도 됩니다. 다만 혹시 윤회에 대해서 인정하시는 분이라면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훨씬 마음이 편하실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실용적으로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보고 지금부터 공부를 잘 해나가세요. 
     
이제 지구는 바뀝니다. 이건 피할 수 없어요. 
왜? 인공지능의 개발은 이미 가속화 되었고, 
물질계의 벽은 이미 예고되어있어요. 
2040년대 가면 이미 질적으로 달라질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그래서 사물인터넷해서 이제 영화에서나 나오는 냉장고가 나한테 내 건강 체크 해주고 뭐라고 하고. 이거 좀 덜 먹으라고 그러고. 막 이제 나의 모든 정보를 관리해서 나를 조언해 주는 비서역할 을 할 거란 말이에요. 그럴 때 여러분 뭐할 거냐는 거예요. 사람은 뭐하고 살아야 되나. 지금 답을 못 내면 인류는 지금 이제 물질이 풍족해져도 우울증 걸립니다. 사는 낙이 사라질 거예요. 할일이 없어지니까. 기본소득이 되도 우울할 거예요 돈은 되는데, 뭘 해야 되는지. 
     
인간이 뭘 해야 되는지에 답이 안 나오면 이 문명은 이제 엄청난 문제가 생길 거예요. 실업문제도 어쩔 수 없고. 이게 지금 다 예고되어있는데. 돌파구가 있어야, 
     
답이 없을 거 같죠? 
더 우리는 잘 살게 될 거에요. 
정신문명만 확보되면. 
     
그런데 그 답을 어디서 내요? 
선의 정신으로. 
     
이런 모든,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지금 답답하다고 하는 것을 초월해서 
참나 상태에서 양심에 맞게 답만 내리면 
우리는 얼마든지 인류가 다 같이 공생할 수 있는, 
더 멋진 답이 나올 수 있는 시기에요. 
저는 확신하고 그 답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매순간 
양심으로 우리 마음을 경영하고 
나라를 경영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그럼 공생의 터전이 마련될 거예요. 
     
그래서 홍익학당에서는 그런 거 말씀 드리고 싶어서 이런 얘기. 일단 제 강의 들으시는 분들이라도 이 기술을 좀 익히세요.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을 기술입니다. 
몰라 못하는 분들은 살기 힘들어져요. 
     
‘개벽 오면 다 죽는다.’ 이런 겁주는 말이 나온 게, 
진리를 알면 산다. 이런 말이 꼭 같이 있죠? 그
진리가 무슨 주문하나 외우고 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주문외우면 살고, 다 그렇게 될 일이 아니고, 
여러분이 오직 양심을 따를 때 살 수 있습니다. 
새 문명이 열려요.
     
꼭 무슨 병이 걸려 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양심을 안 따르면 답이 안 나온다니까요. 이 문명의 답이 안 나와서, 인류에게 던진 이런 세계의 도전을 응전을 못함으로서 인류가 패망한다니까요. 
     
응전하는 방법이 있다니까요. 
양심으로, 선의 정신으로 화두를 풀 듯이 
선의 정신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왜 물질에 흔들리세요? 정신이. 
     
내 마음에 나타나는 우주의 이런 존재들 때문에 
왜 내가 중심을 놓쳐야 되요? 
중심 잡고 육바라밀에 맞게 양심에 맞게 처리해버리세요.
     
그래서 저는 웅녀프로젝트. 지금 개벽기다. 환웅이 지난 개벽을 열었던 분이에요. 신시개천이라는 것이 개벽을 말합니다. 지난 개벽에서 배울 게 뭐죠? 삼국유사에 다 나와요. 환단고기 들먹이지 않습니다. 거기는 후대에 조작된 게 많아서 삼국유사는 오히려 짧아서 좋아요. 뒤 사람들의 좀 신화된 게 있기는 하지만, 짧아서 딱 핵심정보만 취하기가 훨씬 좋아요. 요것을 부풀려 놓으면 막 섞여요.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버려서 더 복잡해져요. 삼국유사가 짧게 정리되어있어서 저는 그것을 좋아해요. 
     
환웅이 내려올 때 왜 그게 개벽기라고 하시는 줄 아세요? 
인류가 정신문화가 한 번씩 점프할 때가 개벽이거든요. 
물질문화가 점프하든가. 
그런데 그때 정신물질 문화가 다 같이 점프한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 환웅이 내려놨더니 다 뭐 였죠? 곰과 호랑이였죠. 
     
왜 사람을 곰과 호랑이라고 했을까요? 
곰토템 호랑이 토템. 그렇게 풀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사람이 거죽, 사람이라고 사람입니까? 
양심을 어기면 금수이하죠. 
다 금수수준이었다는 거예요. 양심을 모르고. 
     
그러니까 웅녀프로젝트가 별게 아니라, 곰과 호랑이 불러다가 마늘과 쑥 주고 동굴에서 수행시켜요. 100일 해서 호랑인 못 감당하고 곰은 사람 되었죠? 뭐 했겠어요? 그래서 저희는 웅녀프로젝트. 
     
마늘과 쑥은 깨어있음과 양심성찰. 
거기 동굴에 100일은 학당에 오시면 신사과정 6개월 있습니다. 
나중에 100일 과정을 만들어볼 수도 있어요. 
     
양심 알면 사람 되는 겁니다. 
자기 안에 천부경에 나오는 광명한 태양 같은 양심, 본심이 있다는 걸 알면 사람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그전에 뭐 곰이었겠어요? 
왜 짐승으로 표현되었겠어요? 
사람 덜 되었었다는 거예요.
     
사람이 먼저다. 요즘 이런 말씀 하시는데, 
저는 일단 사람이 없다 에요. 사람이 잘 안 보인다. 
     
지금 왜 개벽기인지 아시겠어요? 
금수수준이에요. 양심수준이. 지금. 
     
그나마 요즘 조금씩 각성되고 있는 겁니다. 그렇죠? 지금 곰과 호랑이 수준이라고 우릴 생각하셔야 되요, 여러분. 
     
지금이 개벽기라는 것은 
다 같이 “나도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양심에 대해서 각성을 하셔야 되요.
그게 개벽이에요. 
한두 명 각성이 아니라, 
그 문화에 구성원들 전체가 각성해야 되요. 
     
저는 항상 주장해요. 51%죠? 
대다수가 다 했으면 좋겠지만, 
51%이상은 각성해야지 그래도 개벽이라고 하죠. 
     
한두 명 각성은 인류역사상 계속 각성해 왔어요. 어느 시대나 각성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개벽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다 같이 한 걸음을 나가야지 개벽이지 혼자 10걸음 가는 것은 개벽이 아니라구요. 그래서 왜 환웅 때가 왜 귀중한 줄 아세요? 성경이나 불경만 보시 마시고, 한국유사, 역사이면서 신화이면서 경이에요. 
     
환웅이 내려와서,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와서, 예수님은 실제로 다 못 가르치고 가셨죠? 일부밖에 못 가르치셨죠? 환웅은 내려와서 천황이라고, 하느님이 내려오셔서 왕이 되셨네. 해서 하느님 왕이라고 천황이라고 불리면서 신시, 신의 도시, 신의 나라를 열었어요. 
     
지금 우리나라 개천절을 기념하는 게 그 신시 때 입니다. 단군이 나라세울 때가 아니에요. 개천절이라는 것은 신시개천입니다. 신시가 열렸다는 게 인류에게 새 하늘이 열렸다는 게 개벽이라는 거예요. 개벽. 
     
문명이 업그레이드 된 게 
개벽이에요. 
갑자기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거예요. 
금수수준으로 살다가. 
     
자, 금수에서 인간이 될 때 제일 핵심모토가 뭐였나요? 
홍익인간이요. 
‘널리 인간을 위할 줄 알아라.’하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때 인간으로 점프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리고 환웅이 뭘 가르쳐줘요? 
곡식, 먹고 사는 문제, 다섯 가지만 딱 적어났죠. 대표로. 
곡식, 먹고 사는 문제, 지금도 똑같이 중요하죠. 
선악 윤리적인 문제, 
양심 판단하는 문제 지금도 중요하죠. 
그다음에 정치제도 짜는 곳. 지금도 중요하죠. 
또 병 고치는 것. 의료. 지금도 중요하죠. 
형벌, 잘못한 사람 어떻게 처벌할지. 
요 5가지를 대표로 얘기해놓고 뭐라고 했냐하면 
366가지 모든 일을 다 다스려줬다고 되어있어요.
     
왜 수많은 날 중에 왜 366일이라고 그랬을까요? 
1년이 365일이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1년 동안 살면서 겪는 
모든 일에 대해서 양심적인 답을 다 주고 가셨데요. 
그렇게 해서 통치하다가 어천절 때, 
어천절이 음력 3월 15일입니다. 
그때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개천절, 어천절이 다 있어요. 
     
이 정도는 아셔야 되요. 한민족이면. 이게 지금 어느 나라 성경, 어디 경전에 뒤지지 않는 스토리이고, 성공스토리고, 어떤 성인들이 나오기 전에 몇 천 년 전에 홍익인간이라는 인, 자비, 황금률에 해당되는 홍익인간을 제시하고, 사람 되는 도리를 열어줬는데, 그 후손들이 또 금수수준이 되어있어요. 금수만 못해서 살아요.
     
금수는 사람 저렇게 안 죽입니다. 처참하게, 이유도 없이, 자기 재미로 묻지 마 살인도 하는 게 사람이죠. 반성해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남 위할지 몰라요. 금수보다 남위할지 모르고 내 새끼까지만, 나에서 내 새끼, 이 정도 이상 나가지 않고. 세상에 세월호 하나 하는 것도 예전에 일배들 그 험한 짓하고 그랬죠. 그 앞에 가서. 자기들이 그일 당해봐야 알아요. 역지사지.
     
우주는 그런 일을 역지사지하게 도와줍니다. 
어떤 식으로든. 기대 되요. 
이번생 아니면 다음 생에라도 꼭 겪으실 겁니다. 
남한테 함부로 한 거는 
반드시 자기가 다 당하게 되어있으니까, 
     
이게 한생만 보고 살면 겁이 없어져요. 
왜? “히틀러도 마음껏 살다 죽던데?” 이렇게 생각해요. 
“스탈린 할 거 다 해보고 죽던데?” 
“어차피 죽는 거 그렇게 사는 게 낫지 않나?” 
“찌질하게 사는 거보다 한탕 제대로 해서 누리다가 사는 게 낫지 않나?”
     
이게 한생만 보면 이 결론이 나요. 
그래서 오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윤회설도 나오는 거예요. 
     
그게 윤회설도 또 악용되면 또 나빠져요. 다만 우리가 올바르게 취한다면 한생만 보고 살지 말고,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선악에 대해서 연구하며 살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일정부분 윤회설 얘기를 자꾸 들먹이는 이유입니다. 멀리 보고 수를 놓자. 그래서 그냥 필요에 따라 윤회설은 받아들이시고, 윤회설 부정하셔도 좋고 다 좋은데, 윤회설을 부정한다 긍정한다 할 만한 우리가 재료가 많이 없죠?
     
그러니까 부정이다도 말하지 마시고 그냥, “난 아직 실험 안 해봐서 모르겠다.” 그런 태도정도는 좋습니다. 그럼 또 그대로 그냥, 그런 분들은 양심에 찜찜하니까 하지마시라. 그 얘기 드리고 싶고, 
     
웅녀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개벽이 오지 않을까요? 
어때요? 재미로 붙여봤습니다. 
귀에 쏙쏙 잘 들어오게 하려고. 
     
마늘과 쑥은 
깨어있음과 양심성찰이다.
     
호흡까지 하면 더 좋은데, 일단 이 두개만 해도 사람 되거든요. 일단 사람 되는데 급한 거는 두개니까, 그래서 제가 오늘도 말씀드린 게 그거죠. 
     
양심하나 붙잡고 갑시다. 그럼 사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 개벽입니다. 개벽. 
인류의 개벽을 우리가 한번 주도해 봅시다. 
환웅이 과거에 개벽을 열었듯이 
그 후손들인 우리가 이 땅에서 세계적으로 개벽 한번 해봅시다.
     
전 뜻이 커요. 제가 우리나라 대통령, 이거 하나 바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제가 또 말씀드렸지만, 저는 양심으로 세계정복이 목표고, 우리나라는 일차 교두보일 뿐이에요. 우리나라를 양심세상 만들어야 전 세계에서 이걸 모델하우스로 와서 구경하고, 자기들 또 다 바꿀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 나라가 바뀌기를 바라고, 다행이 제가 영어도 못해서 다른데 못가니까, 어쩔 수 없이 저는 여기서 딱 묶여있는 몸이라, 죽으나 사나 여기서 할 거에요. 죽을 때까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 겁니다. 
     
그 성과가 어떻게 나는지는 우리가 결과를 어떻게 보고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분명히 제 양심에 자명하고 많은 분들이 또 양심으로 동참해주고 계시기 때문에 아주 기적 같은 성과가 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일단 양심에 맞으니까 죽을 때까지 추진해 볼 생각이니까, 동참하신 분들은 같이 해서, 또 우리 살아서 또 좋은 결과 볼 수도 있잖아요. 못 봐도 해야 될 일인데, 전 또 보고 싶어요. 그래서 꼭 보고 가고 싶습니다. 이런 일 같이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동참 바랍니다. 예.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