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27강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2

Buddhastudy 2017. 9. 7. 20:42

 

그러나 이 혼탁한 세상에서 설령 이렇게 했다 하더라도 나아가는 길이 일사천리로 가지지는 않는다. 그럼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잘못된 것을 잘못된 줄을 알아차려야 한다. 어긋났을 때 어긋남을 빨리 알아야 된다. 틀렸을 때 틀린 줄을 빨리 알아야 되고 몰랐을 때 모른 줄을 알아야 되고. “,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가 그것을 잘못 알았구나.” “아이고, 이거 내가 잘못했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잘못한 일을 알겠어요? 원칙을 딱 쥐고 있어야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길을 똑바로 가려는 사람에게 엇길로 갔다.’하는 판단을 할 수가 있지, 어느 길로 갈지 정해지지 않은 사람한테는 엇길이라는 게 있어? 없어? 자전거를 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아이고 넘어졌구나.”라는 게 있지, 타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넘어질 일도 없죠. 그런데 두세 번 타보고 넘어지면 에이, 난 안 되나봐.” 이렇게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되겠지.

 

넘어지면 또 타고, 넘어지면 또 타고, 넘어지면 또 타고, 넘어지면 또 타죠. 그러다가 어느 날 순간에 타지죠. 그러니까 넘어지는 것을 한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고 세 번 넘어지면 이건 더 안 되구나.”가 아니라, 한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고 세 번 넘어진다는 것은 안 넘어지는 쪽으로 지금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하나 전제가 되어 있어야 돼. 타겠다는 목표가 분명해야 된다. 그러면 몇 번 넘어지고 탔느냐?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딱 타자마자 가지는 사람도 있을 거고, 세 번 넘어지고 타는 사람도 있을 거고, 열 번 넘어지고 타는 사람도 있을 거고, 때로는 어떤 사람은 100번 넘어지고 타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나 100번 넘어지고 타는 사람은 아주 문제가 있는 사람이냐? 아니다. 한번 넘어지든 두 번 넘어지든 백번 넘어지든 그것은 못 탔을 때 얘기고, 일단 딱 타버리면 어때요? 넘어진 횟수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요.

 

일단 타려고 마음먹고 딱 서면

넘어지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넘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다? 다시 일어나야 돼.

타려는 생각이 있어야 다시 일어나지지,

한두 번 넘어진다고 포기해버린다.

 

에이, 해봐도 안 되더라.” 이 넘어진 자가 일어나는 것, “, 이게 틀렸구나.” 하면 고치면 되죠. 그래요? 안 그래요? “, 이거 잘못되었구나.”하면 뉘우치면 되죠. “, 이거 모르겠네.”하면 물어서 알면 되잖아.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자기를 인정해야 되는데, 모르는 자기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 남한테 숨기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묻지 않고 자꾸 적당히 해서 때우려고 그래요. 자꾸. 안다고 그래. 그러니까 자꾸 우기려고 하죠. 길 모르면 아는 사람한테 물으면 금방 찾아갈 거를 그거 묻기 싫어서 자꾸 돌아다니다가 시간만 많이 낭비 하는 거 아니오.

 

뭘 하다가 틀렸다 이거야. 그럼 틀렸을 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억울하죠. “바보같이 왜 이렇게 했을까? 낭비했다.” 천만에.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 되었지, 지금 발견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어? 더 갔을 거 아니오. 그죠? 그랬으니까 , 틀렸구나.” 할 때는 과거에 대한 뉘우침도 있지만, 알은 거에 대한 뭐도 있다? 기쁨이 있는 거요.

 

틀린 줄 알았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요.

만약에 발견 못하고 그냥 갔으면

더 엄청난 문제가 생기겠죠.

잘못했구나.” 뉘우치면 되죠.

 

그러니 우리는 공부를 욕심으로 한다. 이거야. “나는 한번 마음을 먹고 자전거를 타려고 했으면 안 넘어져야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오. “안 넘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안 넘어집니까? 관계가 없는 거요.

 

안 넘어져야 된다.’에 사로잡히면 넘어진 자기를 용서할 수가 없어. 용납을 못해. 그러니까 넘어진 자기를 학대하는 거요. 그래서 나는 안 되나봐.” 이렇게 해서 포기한단 말이오.

 

넘어질 수 있는 자기,

넘어지는 자신을 뭐하라?

 

여러분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모르는 게 아는 척하지 마라.

 

이거야. 아는 척한다고 알아지는 게 아니오. 너 몰라지지. 여러분들은 뭘 하면 자꾸 틀릴 수 있는 자신을 인정해라. 그런 자신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사랑해라. 이 말이오. 잘못한 자기, 잘못 할 수도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그것마저도 자기가 수용하고 받아들여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죠.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다 알고 다 잘하고 그러겠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우리는 이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깨달음의 길 즉,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그러한 세계에 나아가는 데는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가 있다. 그때 착오를 범했을 때 착오를 범한 줄을 빨리 자각을 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자각을 하면 어때요? 조금이라도 더 괴로움이 적어지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갈 수가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수행을 할 때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은 문경수련장에서 깨달음장을 하는데, 한번 참가해 보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편안하게 가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물어서 알면 되고, 틀리면 틀리는 대로 틀린 줄 알면 고치면 되고, 잘못한 것을 발견하면 뉘우치면 되죠. 옳다싶으면 빡빡 우기면 되죠. 그러다가 잘못된 줄 알면 뉘우치면 되죠.

 

그런데 미리 알려고 하죠. “뭐 합니까?” “프로그램은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한테 가서 묻고 저 사람한테 가서 묻고. 왜 그럴까? 거기 가서 잘난 채 좀 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와서 잘난 채 해서 뭐해요? 거기서 잘나서 그게 뭐 국회의원 당선되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무슨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잘나서 뭐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가도 잘나고 싶단 말이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숨겨서 잘나고 싶고, 틀리는 거 안 틀렸다고 우겨서 잘나고 싶고, 잘못해놓고는 뻑뻑 자기가 잘했다고 우겨서 잘나고 싶죠. 그런 생각을 하니까 두렵단 말이오. “이 못난 자기, 모르는 자기, 잘 틀리는 자기가 사람 앞에서 폭로되면 어떨까?” 그러니 더욱 더 안보이죠.

 

밥상을 차려다 줘도, 눈앞에 갖다놔도 안 보이는 거요. 다 얘기를 해 줬는데도, 안 들리는 거요. 그러니 편안하게 임하시라. 이 말이오. 여러분들이 스님을 만났을 때, “아이고 스님, 제가 자주 못 와서 미안합니다. 정토회 요새 빼먹어서 미안합니다. 어려울 때만 스님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아이고, 이런 얘기 갖고 스님하고 상담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얘기는 안하면 안 할수록 좋습니다.

 

인사로 물론 한다는 것은 알지만. ? 그런 얘기는 시간 낭비잖아요. 그죠? 인사말을 짧게 하고 싶으면 그냥 짧게 하고 가면 되고, 길게 하고 싶으면 길게 하면 되는데, “짧게 하겠습니다.” 하고 짧게 하는 이유만 실컷 설명한단 말이오. 그냥 얘기하세요. 편안하게.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졸리면 자야 되고, 배고프면 먹어야 되고, 똥 누고 오줌 눠야 되고, “저 분은 다 안다.” 이런 생각 할 필요도 없고, “지가 알기는 뭐 알겠나.”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서로 의논해 보고 몰라도 본전이잖아. 그죠? “나도 모르는데 지가 어떻게 알겠어?” 이렇게 생각하고 가면 되는 거고.

 

또 생각보다 나보다 더 많은 지혜가 있어서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되면 좋죠. 그러니까 편안하게 접근을 하시면 된다.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은

팍 팍 무시하고,

자기보다 조금 나은 사람한테는

그저 주눅이 들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이러잖아.

 

그러니까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은

종이의 양면처럼 같이 작용한단 말이오.

이게 중생심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잘난 척하고

한쪽은 못난척하고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둘을 놔버려야 돼. “아이고, 잘못했구나.” “아이고, 잘못했구나.”하는 게 잘난척하는데서 벗어나서 못난 척 하는 쪽으로 가면 안 된단 말이오. 잘못한 것을 잘못했구나하고 다만 뭐할 뿐이다? 알 뿐이오. 그럼 고치면 돼. , 잘못한 자기, 못난 자기도 어떻게 하라? 그냥 수용해라. 이거야.

 

나는 잘못을 안 하는 사람, 나는 매사에 다 완벽한 사람.” 이렇게 환상을 그리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으니 현실에 있는 자기 틀릴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이 자기를 자기가 용서를 할 수가 없어. 아시겠어요? 창피해. 그러니까 이것은 참회가 아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것은 또 한쪽으로 또 기울은 거다.

 

그러니까 뉘우친다는 말은 뉘우친다는 것은

잘못한 틀린 자기를 발견을 해서 그 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그러니까 잘못한 자기를 발견했으니까 뉘우침의 눈물이 흐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이제는 잘못을 안 범해도 되는 기쁨이 있죠.

 

그래서 금강경에 어떻게 나왔냐? 체루비읍 희유세존이란 말이오. 뉘우침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 뉘우침의 눈물은 얼굴이 쭈글어드는 얼굴이 아니고 얼굴이 확 편단 말이오. 눈에 눈물이 나기는 나는데 얼굴에 미소가 확 피어지는, 그런 눈물이다. 눈물은 나는데 웃음꽃이 핀다. 체루비읍 희유세존. “거룩하십니다. 세전이시여.” 그런데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 슬픔에 빠지고, 얼굴이 피어지면 기쁨에 빠지고 이러죠. 다르단 말이오.

 

, 그러면 참회는 뭐다?

잘못을 발견하는, 그 잘못을 발견하는 게 깨달음이오? 아니오? 깨달음이죠.

잘못을 잘못인지 모르는 것은 뭐다? 무지며 전도몽상이고

잘못을 잘못인 줄 아는 게 뭐다? 깨달음이며 지혜다.

그러니까 깨달았는데 왜 괴롭겠어. 기쁘지. 알았다는 기쁨이 있다는 거요.

 

참회, 참회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육조단경 참회품에 있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오, 회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짓지 않는 것이다. 이미 지은 것은 어떻게 해버리고? 뉘우쳐서 소멸해 버리고, 짓지 않는 것은 어때요? 조심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다. 이것을 다른 수행의 원칙에다가 인연법으로 말하면, 이미 지은 인연은 어떻게 한다? 감사하게 받아들여라.

 

정말 자기가 잘못한 줄을 알면 과보를 어떻게 해야 된다?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되겠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이것은 받아들인다는 거요? 안 받아들인다는 거요? 안 받아들인다는 거요.

자기가 그 인연을 지은 것을 뉘우친다는 거요? 안 뉘우친다는 거요? 안 뉘우친다는 거요.

아직도 잘했다는 거요.

 

다음 문제 보겠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나간 세상, 끝없는 세월에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탓으로 몸과 말고 생각으로 지은 악업이 한량없고 끝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 나쁜 업에 어떤 형체가 있다면 가없는 허공으로도 그것을 다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온갖 말고 생각에 청정한 입으로 법계에 두루한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 앞에 지성으로 참회합니다.

 

다시는 나쁜 업을 짓지 않으며 항상 청정한 계율의 모든 공덕에 머물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야만 나의 참회가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공계와 중생계와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참회도 끝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나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이게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내가 왜 참회를 합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보살은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바로 참회를 해야 된다. 그런데 중생계가 다함이 없고, 중생업이 다함이 없고,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니 나의 참회 또한 다함이 없다.

 

늘 부족한 줄 알고

잘못한 줄 알고

틀리는 자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참회해 나아가야 한다.

 

이게 죄의식하고 비슷한 거요? 아닙니다. “내가 전생에 참 죄를 많이 지어서 나는 죽일 년이야.”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아시겠습니까? .

 

,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서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 그런데 이 참회에는 이렇게 스스로 잘못을 뉘우쳐서 깨닫는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참회법도 있다. 이 참회법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 한 가족이라든지, 또는 이렇게 저희 정토회처럼 사람들이 몇 십 명이 모여 사는 한 어떤 수행집단 같은 경우, 또는 신도회 같은 경우, 어떤 이런 단체, 조직에서 그 구성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 제가 이렇게 같이 살면서 우리가 약속하기를 아침에는 4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하도록 했다. 아침은 바루공양을 하기로 했다. 청소시간에는 자기 정해진 구역에서 청소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서로가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좋죠. 그런데 본인이 그것을 안했다. 이 말이오. 아침예불도 빼먹고, 바루공양도 빼먹고, 청소도 빼먹고 이랬다 이 말이오.

 

그런데 본인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았어. 잘못한 줄 모르는 것은 어떤 거요? “그럼 아픈데 어이하란 말이냐? 너는 아프면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