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8회 깨달음과 죽음

Buddhastudy 2011. 10. 2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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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거야 뭐 알고 싶어요? 조금 있으면 죽을 건데. 저절로 알아질 건데, 그런 거를 망상이라 그래요. 서울 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자꾸 서울에 대해서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 좋은 면도 있지만은, 버스에서 내리면 서울 저절로 다 눈에 보여요. 그래서 그거 궁금해 할 필요 없어요. 죽음이라는 거는 본인이 알다시피 살아있는 거에 대해서 본인이 알죠? 그런데 살아있는 삶을 본인이 제대로 아는가? 이거요. 제대로 알면 이렇게 괴로울 일이 없죠.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을 때는 여기를 제대로 알고, 저기가면 저기를 제대로 아는게 중요한데, 여기 있으면서 여기에는 무지하고 저기에만 관심 있고. 저기 가서는 저기에 깨어있지 못하고 여기에만 관심 있다, 하면 이거는 어리석은 자다. 그러니까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연구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삶을 만끽하는게 좋다. 그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그래요. 살아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고, 죽어가지고는 또 산거를 생각한다면 이걸 뭐라 하냐? 무지라 그래.

 

그러니까 본인이 지금 살아있을 때 삶에 깨어있지 못한 상태가 무지거든요. 이 무지에서 깨어나는 것을 깨달음이라 그래요. 그러면 지금 삶이 기뻐지고 삶이 보람 있어지는 거요. 지금이. 그러면 오늘 좋으면 내일도 좋고, 이생이 좋으면 저생도 좋고. 저생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이생을 만족스럽게 살면.

 

. 왜 그래요? 바랬다는 건 즐거운 일 아니에요. . 그런데 바램이 다 될 수가 있어요? 없어요? 또 바램이 다 되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아요? 한번 보세요. 사람들이 다 오래 살고 싶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오래 살고 싶은 바램이 다 이루어져서, 다 오백 살 천살까지 산다 그러면, 이 세상이 좋아지겠어요? 나빠지겠어요? 옛날에는 환갑만 넘으면 죽어도 좋았죠. 그런데 지금은 다 80도 부족해서 90을 살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면 다 100살까지 살면 다른 사람은 100살도 부족해서 또 120살 살라 그러겠죠? 그리되면 500살 가도 부족하고 1000살 가도 부족하거든요? 그건 과욕이 아니에요. 지금 60넘어 살려고 하는 거는 과욕이에요. 옛날 사람들 생각에 비하면.

 

지금 벌써 거사님 나이되면 더 산다는 건 과욕이에요. 그런데 본인이 과욕이라고 생각 안하잖아요. ? 나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 500살 살아도 과욕이 안 돼요. 700살 사는 사람이 있으면. 1000살 살아도 과욕이 아니오. 1200살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기 때문에 이게 끝이 없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사람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꼭 좋은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아들 서울대학교 보내고 싶겠어요? 안보내고 싶겠어요? 보내고 싶겠죠? 그래서 원하는 거 다 이루어져서 다 서울대학교 갔다. 일 년에 30만 명 되는 고등학생이 다 서울대학교 갔다 이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될 수도 없고, 된다고 해도 좋은 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또 될 수도 없어요. 그런데 여기 중요한 거는 그게 안 되니까 세상이 요만큼이라도 굴러가지. 사람이 원하는게 다 되어버리면 세상은 하루아침에 망해버려요.

 

그러니까 안 이루어진다고 괴로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거요. 그러면 인생을 늘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원하는 건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안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진다고 특별히 좋을 것도 없고, 안 이루어진다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다. 이걸 알면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는 데로, 안 이루어지면 안 이루어지는 데로, 받아들이면 되거든요. 그것이 어느게 더 좋은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고. 그래서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요. 그러면 인생은 항상 가볍게 살아갈 수가 있죠.

 

이런 거를 이치를 아는걸 뭐라고 한다? 깨달음이라고 그런다. 이런 걸 모르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 인생도 괴롭게 산다. 이 인생이 괴로우니까 자꾸 죽은 뒤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거요. 그때는 안 괴롭게 살 수가 없을까 싶어서.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지금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게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좋으면 내일도 좋고, 이생이 좋으면 내생도 좋다.

 

그러니까 내생에 극락이 있으면 나빼고 갈 사람이 누가 있겠냐? 이렇게 자신이 있어야 되고, 지옥이 있다면 있든지 말든지 나하고 아무관계가 없다. 이렇게 이 생을 사는 인생에 자신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생에 사는 인생에 자신이 없으니까, 지옥 간다 하는 소리는 들으니 두려움이 생기고, 천당 간다 하니까 어떻게든 돈을 좀 뇌물을 좀 고해가지고 가볼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게 이생에서 잘못살고 있는 인생의 반영이란 말이오.

 

그러니 죽음이라는 건 뭐, 숨 끊어지면 죽는 거 아니에요? 그죠? 그걸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죽은 뒤에 어디가나? 지금 이 생각 하는거 아니에요?, 그죠?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죽은 뒤에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은 뒤의 얘기는 증명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기를 쳐도 다 대부분 밝혀지는데, 이 죽은 뒷 얘기하는 거는 아무리 사기를 쳐도 안 밝혀져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하셔야 되요. 태어나지 않는게 뭐가 좋아요? 태어나야 이렇게 재미있게 살지. 그래도 이 사람들 다 살고 싶지, 죽고 싶은 사람 별로 없는데요. 태어나서 더 살고, 또 늙으면 또 태어나서 또 살고, 나무도, 저 하찮은 나무도 어때요? 잎이 떨어지면 또 새싹 트고, 또 잎이 떨어지면 또 새싹 트고, 나무가 죽으면 열매가 떨어져 새싹 트고, 하찮은 나무도 그러는데, 사람이 뭐 그 보다 나아야 안 되겠어요?

 

꼭 사람으로 태어나면 뭐해요? 풀로 태어나면 어때요? 그러니까 그런게 일종의 종교적 쇠뇌에 속하는 거요. 죽으면 천국가야 된다. 자꾸 이런 얘기하면 천국 안갈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고, 그러죠? 그러니까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아라한은 깨닫게 되면 완전히 깨닫게 되면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를 하셔야 되.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다. 죽고 사는거 이런거 논하는거 자체가, 걱정이 있으니까 죽고 사는 얘기를 자꾸 하잖아요. 근심걱정이 없어져버리면 죽고 살든. 죽는다 해도 아무런 마음의 미동의 두려움도 없는데, 그게 뭐 죽으면 어떻고? 살면 어떻겠어? 아무런 걱정이 그런 문제없는데.

 

연세가 드시고 하니까 이 생은 다 되 가고, 내생에 어떻게 좋은 일이나 있어볼까 해서 관심을 갖는 건 좋은데요, 항상 수행이라는 건 이런 거에요. 어느 정도로 현재에 깨어있어야 되느냐? 숨이 나올 때는 나오는 줄만 알고, 들어갈 때는 들어가는 줄만 안다. 찰나 찰나에 깨어 있어야 된다. 찰나 후도 생각할 필요 없고, 찰나 전 지나간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나간 걸 자꾸 생각하면 괴로움이 생기고, 오지 않는 미래를 자꾸 생각하면 근심걱정이 생기는 거요. 항상 지금에 깨어있으면 괴로움도 없고, 근심걱정도 없다. 이 말이오.

 

지금에 깨어있는 자. 이게 수행자에요. 지금에 깨어있어야 되요. 그러니까 숨이 하나 싹 들어갈 때, 숨이 들어가야 살죠. 그죠? 지금 숨 들어가는 이 찰나에 내가 삶을 만끽해야 되고, 지금 숨 나오는 이 순간에 내가 만족해야 되요. 그 이외의 거를 생각하면 인생이 괴로워집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