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30_6. 중도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Buddhastudy 2017. 12. 18. 20:41


천태종에서는 중도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 공제-중제-가제. 공가중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영원한 게 없다는 얘기죠. 제행무상이라.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다 변합니다. 고정 불변한 부분은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의 원리를 깊이 있게 생각해 들어가면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없으니까 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진짜 답일까? 그런데 우리가 공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앞에 보이는 월도 스님이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공이라고 얘기 하냐.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게 있으니까 이게 [가제] 거짓으로 있는 거다. 거짓으로 있는 거다.

 

그럼 이 세상에는 공과 거짓이라는 것만으로 구분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고 있는 것도 있고, 영원하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제]라고 이야기 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어떤 본질. 그래서 이것을 공가중이라고 얘기해요. 중도를 그런 쪽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질문주신 내용을 보면 우리 생활 속에서 중도를 실천하려는데 그 중도라는 게 도대체 뭐냐라는 질문으로 주고 있습니다.

 

실생활에서 말하는 중도는

양극단을 생략한 자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분법적 논리를 가지고 살다보면 우리는 맨날 싸워야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절에 오셔서도 살림을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잘 살려고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다보면 서로 싸우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서로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주지 스님한테 가서 물어보면 이쪽편도 안 들도 저쪽편도 안 들고 양쪽 다 맞는다고 그래요? 안 그래요? 그것을 중도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겁니다. , 우리가 짧게 봤을 때는 이게 옳고 저게 옳은 게 있어요. 그런데 주지스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와 내가 필요가 없어요. 전체가 다 용광사 신도고 용광사 일이거든요. 그런데 단지 왜 다투냐 하면 이 방법과 저 방법이 부딪히는 거예요. 그런데 주지스님이 봤을 때는 너도 용광사를 위한 일이고, 너도 용광사를 위한 일이니까 다 답입니까? 아닙니까? 다 답인 거예요.

 

그래서 크게 보면 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작게 보니까 내가 하는 것만 옳다는 생각으로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보면 집에서도 마찬가지에요. , 한 형제를 낳는데도 형하고 아우하고 싸워요? 안 싸워요? 싸우면 부모 입장에서 속이 터져요? 안 터져요? 그래서 터지니까 두 아이를 불러놓고 설명을 들어보잖아요. 네 말도 들어보고 네 말도 들어보면 부모입장에서는 웃겨요? 안 웃겨요? 웃기잖아요. 똑같은 말인데.

 

그 부분은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라고

화합시킬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중도라고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똑같은 산을 보는데, 그 산을 오른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고, 왼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습니까. 똑같은 산 이름인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르듯이,

 

중도라고 하는 것은

양쪽의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모든 부분이 하나로 갈 수 있는 방향이라면

그것을 다 포섭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중도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게 다 답인 겁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것으로 전체를 다 포섭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중도의 마음이다. 그래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실천 속에 중도를 실천해 낼 수 있는 멋진 우리 불자님들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