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2회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다 (20:12)

Buddhastudy 2011. 12. 11. 23:35

  방송 보기: 불교TV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 날씨가 조금 추워졌습니다. 서울이 더 춥네요. 그러나 사람마음도 온도가 있다 이래요. 마음의 온도가 높아지면은 추위가 덜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 불교 믿는 이 신심. 이건 내가 내 인생에 기울이는 어떤 정성의 도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 정성의 도수가 마음의 온도이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사람이 정성을 모으고, 정신력을 굳건하게 가지면은 그 힘에 의해서 하는 일이 활력을 얻어 더 잘 진행되어가지 않겠나? 이렇게도 생각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것을 법화경이라는 대승경전에 보면은 일대사 인연을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설명을 해 놓았습니다. 법화경 방편품이라는 품이 있는데, 그 속에 설해져있는 내용가운데에 부처님이 일대사 인연으로 중생세계에 출현하셨다. 이래요. 큰일이 있어서, 이 큰일을 하나 하기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거에요. 그 큰일, 일대사인연을 뭐라고 설명했느냐 하면은 중생들에게 여래의 지견, 여래가 알고 보는, 말하자면은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지견, 이것을 중생들에게 열어주고, 開개. 한자로 (열 개)자가 있어요. 보여주고, 示시. 보인다. 또 깨닫게 해주고, 悟오. 들어오게 해주기 위해서다.

여래의 지견을 중생들에게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오게 해주기위해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거에요. 중생이 있는 이 사바세계에 오셨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 제도하신다. 이거죠. 그런 법화경의 법문이 있는데, 오늘 배울 이 선가귀감, 2장에는요, 부처님이 쓸데없이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런 말이 있어요. 부처님이 쓸데없이 이 세상에 왔다. 말하자며는 그런 뜻이 들어있는 말이 나옵니다.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났다. 바람이 없는데 어떻게 물결이 일어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에서 한 말이죠.

다시말하며는 필요 없는 일이 생겼다는 거에요.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이 세상에 나온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선에서 하는 말들은 교회에서 하는 말하고 차원이 다릅니다. 이걸 이해하셔야 됩니다. 불교가 보통 교리적으로 이렇게 설명해갈때는 처음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논조가 말입니다. 있다. 이렇게 말하는 설법이 있어요. 이걸 유교라 그래요. 유교. (있을 유)자, 있다고 가르쳐주는 법문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런가하며는 또 없다고 가르치는 법문이 있어요. 없다. 말하자면 이건 (없을 무)자의 뜻인데. 이걸 공교라 하기도 합니다. 空敎공교.

물론 종자를 써서 空宗공종 하는 얘기도 있죠.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반야심경 독송하다보면은 없다는 말이 주욱~ 나오거든요. 無무자가 반야심경의 제목 10자까지 합쳐서 270자입니다. 그 270자, 제목을 떼어내면은 260자인데. 260자 속에 없다는 뜻을 가진 무자가 21자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반야심경 같은 법문은 없다고 설하는 법문입니다. 있다고 설하는 법문이 있고, 없다고 설하는 법문이 있고. 그런가하면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非有非無비유비무. 그래서 부처님설법이 어떤 때는 있다고 가르쳐주시고, 어떤 때는 없다고 가르쳐주시고. 어떤 때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신다 이거에요.

이런 말이 다른 것. 논조가 다른 것을 방편설이라 이럽니다. 방편설. 방편으로 그때그때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좋겠다. 그때는 이렇게 말해주고, 또 달리 좀 다르게 말을 해야 되겠다. 이럴 때는 또 다른 표현을 써서 가르쳐주고. 이런다는 거에요. 그래서 있다는 법문은 아까는 유교라고 했는데, 상용이라고도 합니다. 상용법문. 상을 가지고 말한다. 없다고 말하는 법문은 공용법문이라 그래요. 공용법문.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하는 법문은 (성품 성)자를 써서 성용법문이다. 이렇게 구분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것을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필요 없는 일이 생겼다. 이런 뜻이에요. 佛祖出世불조출세가 無風起浪무풍기랑이로다.(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께서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바람 없으면 물결 안 일어나요. 그런데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이 일어났다. 물론 이것을 개개의 숨은 뜻이 있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죠. 바람 없는 데서 물결이 일어났으니까. 상식을 초월한 얘기지 않습니까? 여기서 부처님이나 조사는 세존, 석가모니 부처님. 가섭존자를 말합니다. 가섭존자 이후에도 아란이 법을 전해 받고 이래서, 흔히 말하는 삽三祖師삼조사가 주욱~ 대를 이어 불법을 이어전합니다.

중국에 육조스님이 인도의 스님들의 법맥을 다 합쳐서 말하면은 33번째 조사가 되죠. 아마 선종에서는 중국의 달마스님이 건너오고부터 쳐가지고 달마스님으로부터 6번째 조사가 된다. 이래서 육조스님이다. 이렇게 주로 불러왔습니다. 출세라는게 무어냐? 세속에서는 출세는 뭐이래 벼슬도 높이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신분이 상승되는 걸 출세라 이러지요. 저 사람 출세했다. 이럴 때는 쉽게 말해서 세속적으로 잘됐다는 얘기에요. 직위도 높아지고 사회적인 어떤 그런 인지도도 높아지고, 이렇게 되는 경우인데. 불교에서 출세라는 것은 부처님경우를 여기에서 설명하는데 대비로 바탕을 삼아서, 大悲대비. 大悲心대비심할 때, 대비로 바탕을 삼아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 말이에요.

여긴 세상에 나왔다는 얘기이니까. 부처님이 세상에 뭐 하러 나왔느냐? 앞서 법화경에 나오는 말씀 소개해 드렸죠? 여래지견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오게 해주기 위한 것. 일대사인연. 그게 결국 대비를 바탕으로 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겁니다. 그게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 본뜻인데, 그런데 이 선가귀감은 한 물건에서 시작되었죠? 한 물건. 한 물건에서 볼 때는 이 말이에요. 한 물건을 안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이거에요. 한 물건, 그게 결국 부처에요. 한 물건에서 볼 때는 나도 가지고 있고, 너도 가지고 있고. 다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사람 본래 자기물건을 다 가지고 있어요.

이러니 누가 누구를 이해해준다는 말, 할 수가 없다는 얘기에요. 누가 누구를 이해해 준다, 제도해 준다는 것도 애해해 준다는 말 아닙니까? 누가 누구를 이해해주고 할 것 이 없어. 내가 가진 한 물건, 너가 가진 한 물건, 똑같아. 차이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러고 그 한 물건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 갖추어져있는 거에요. 부족한 게 없는 거다. 이런 뜻입니다. 완전하게 다 갖추어있는 기라. 그런 면에서 볼 때는 그 한 물건에 대해서 더 꾸밀 것도 없어요. 더 뭐 이렇다 저렇다, 거추장스럽게 수식할 것이 없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여기 주에는 어떤 말이 나왔느냐? 옛날 여인들이 화장을 할 때, 뭐라 합니까? 분바르고, 연지 찍는다 합니까? 분바르고 연지찍을 필요가 뭐 있느냐? 이런 말이 나와요.

***하는 한문 구절이 있는데, 남이 내 얼굴에 분발라주고, 연지찍어 줄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불교TV는요, 오면 꼭 뭘 발라 주더라고요. 내가 이거 완전히 책 내용하고는 반대되는 걸 이래 했습니다. 그래서 한 물건은 꾸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한 물건은. 한 물건은 본래 모든 것이 완전무결하게 다 갖추어져있는 거에요. 이거는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고, 이게 불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불교의 근본 알맹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이게 법이에요. 바로. 불법할 때. 법. 그래서 선에서는 교의 말을 전부 허튼말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투로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옛날 선사들이 남긴 말 가운데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불손스럽게 느껴지는 말도 있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 이런 말이 나와요? 殺佛殺祖살불살조한다. 이 살자가 살생한다할 때 (죽일 살)자 거든요.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 도대체 이 불손한 말이 어떻게 쓰여지는가? 깝짝 놀랄 수도 있죠. 그런데 이거는 선의 기백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부처나 나나 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똑같다. 이거에요. 내가 부처님에게 똥을 받을 일도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그런 뜻에서 부처도 필요 없다. 없애버려라. 이런 뜻이에요.

운문문언 선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남긴 에피소드에는 일화에는, 부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일곱 발자국을 걸으시고, 한손은 치켜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은 땅을 가리키고 이러면서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다 그래요. 하늘, 이 하늘아래 내가 홀로 가장 높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개인적인 어떤 자기 뭐랄까? 잘난 것을 말한 게 아니에요. 아만을 과시했다. 이래 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불격을 천명한 말이라고 할까요? 그런 뜻이 있는데. 아무튼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말이 부처님태어나자마자 외쳤던 말이다 하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운문문언선사가 이 말에 대해서 선사의 기백으로써 하신 말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염송 같은데 전등록에 있어요. 내가 만약에 그때 그 말을 들었으면은 석가를 속된말로 하면은 죽여서 뼈를 추려서 아주 비어처럼 표현된 말이 있습니다. 개에게 주었을걸.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이 말을 한 거를 어디에서 그런 얘기를 터무니없는 얘기를 했느냐? 이런 투로 말한 거에요. 이거 역시 한 물건의 입장에서 한 얘기죠. 그래서 선에서는 그렇게 기백을 중시하는 거에요. 내가 부처라는 사실, 이걸 자각하고 이걸 바로 믿는 게 이게 중요한 거에요. 선세계에 있어서는. 그러니까 부처님을 의지해서 우리가 가피를 입고 은혜를 입고하는 이런 마음이 소박한 신앙심에서 볼 때는 누구 없이 있는 법인데. 그런 마음으로 부처를 믿고 따르는 거는 부처의 근본을 모르는거다 이거에요.

이래서 선에서는 무엇보다도 기백이 있어야 된다. 이런 점을 강조해요. 그래서 선의 기백은 기상이라고도 할 수 있죠. 사람이 기백이 있다. 씩씩하고 뭔가 자신감을 충분히 갖고 있는 모습을 기백이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 선의 기백은 나와 부처님이나 조사를 똑같은 동격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불교는 교조주의가 아니에요. 물론 교조가 석가모니부처님이지만은 교조를 너무 지나칠 정도로 숭상해서 교조에 모든 것을 중심으로 마쳐버리면은 안된다는거에요. 예. 선의 특징이 이런 점이에요. 종교를 요즘 현대 종교학자들이 쓰는 말 가운데, 종교를 표층종교, 심층종교, 이렇게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표층이라는 말은 옅은 것. 아주 겉에 나타나는 것, 심층이라는 것 깊은 거, 심층종교가 불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