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9. 부처님을 좋아한 젊은 비구

Buddhastudy 2019. 2. 14. 21:56


부처님께서 중림정사에 계실 때의 얘기입니다.

박칼리라고 하는 안 비구에 대한 얘기인데요, 이 박칼리는 신분이 아주 높은 브라만 집안 출신이고 집도 아주 부유했답니다.

 

그렇게 세속에 살 때 편안하게 살았는데 나이 20살 정도 되는 그런 젊은 나이에 부처님을 뵙게 되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 분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법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기보다는 그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 늠름한 자세, 그 유창한 말씀 이런 걸 보고 감동을 해서 부처님을 너무너무 좋아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여자 분만 부처님을 좋아한 게 아니고, 젊은 청년도 그 상호를 보고 부처님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부처님 법문 하시는 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어도 기뻤다는 거요.

그것도 참 특이하죠.

 

좋은 음식, 좋은 옷, 높은 벼슬, 이런 게 기쁜 게 아니고

법회 가서 부처님의 그 원만한 상호를 쳐다보거나 부처님의 잘하시는 말씀을 듣거나 어쨌든 그 분위기, 분위기를 잘 타는 사람이었나봐요.

그게 너무너무 좋아서 출가를 했다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우리 몸이라는 것은 영원한 게 아니다.

이것은 가족부대에 똥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

사실은 다 해부해서 보면 그 어디에도 깨끗하다 할 것도 없고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

 

이 몸의 무상함을 몸의 부정함을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이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부처님이 너무너무 좋은 거요.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그런 것 까지 아시는. 그런 부처님이 그냥 좋은 거요.

 

출가를 해도 이 법의 이치를 스스로 깨치기 보다는 이걸 못 넘어 서는 거요.

그래서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이 박칼리 존자를 불러서

 

바칼리여,

소위 몸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온갖 부패물로 가득 찬 것에 지나지 않느니라.

네가 이 몸만을 일심으로 바라봄으로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박칼리여,

담마를 보는 자가

진실로 여래는 보느니라.

 

,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본다. 이거야.

이렇게 까지 얘기를 하면,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이렇게까지 경청해주시는 부처님이 또 좋은 거요.

 

그래서 이 부처님을 흠모하는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출가해서 몇 년이 되어서도 이 법의 이치를 깨치고 수다원과라도 얻어야 되는데 이 분은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환희심은 있는데, 스스로 법의 이치를 깨닫는 이 경험이 없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 해 안거 때

너는 이 곳에서 안거를 지내라하고 부처님은 다른 곳에 안거를 떠나신 거요.

마땅히 자기 따라가야 되는데, ‘너는 오지 말고 여기 있어라한 거요.

 

그러니까 3개월 동안, 안거는 3개월 동안 꼼짝 못하거든요. 3개월 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한 거요.

부처님을 뵙지 못하니까 모든 이 믿음과 신심이 희망이 다 사라져 버린 거요.

재미가 없는 거요. 지루한 거요. 답답한 거요. 그립기만 한 거요.

그러니까 점점점점 몸이 쇄약해지고 몸이 병들고 몸져눕게 된 거요.

 

이성이 아닌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거요.

이렇게 해서 이 비구가 부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이렇게 해서 높은 절벽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으려고, 한마디로 말하면 자살을 하려고 생각한 거요

인생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일을 아시고, 이 비구가 자살하려고 하는 그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기쁨과 만족이 가득한 그대여,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 완전한 믿음을 지닐지어다.

그리함은 평화로운 피안에 이를지니 그대의 존재는 적멸하여 완전한 행복을 이루리라.”

 

그런데 대부분 이런 수준이 될 때 부처님의 설법은 그러거든요.

에이 이 사람아, 이 여래를 봐서 뭐 하려고 그러느냐.

이 허물어져가는 육신을 봐서 뭐하느냐.”

이렇게 깨우쳐서 법의 진실에 들게 하는 게 대부분 내용입니다.

다른 경전에 보면 이름이 같은데 동명이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도 역시 박칼리 존자요.

 

이 박칼리 존자가 출가를 해서 아주 부지런히 정신을 하다가 병이 나서 죽게 되었어요.

그런데 보통 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출가해서 온갖 고생하고 살다가 병들어죽게까지 되면 출가한 걸 후회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죠?

 

이럴 바에야 집에서 편안하게 살걸.’

 

그런데 이 비구는 후회를 안 했어요.

아무튼 자기는 출가한 게 잘했고, 그런데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내가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번 뵙는 거다.

내가 우리 스승부처님을 한번만 더 뵙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런 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도반이 이 뜻을 부처님께 전했더니 부처님께서 병문안을 오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부처님이

비구여, 그냥 누워있어라.”

누워있는데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비구가 하는 말이

부처님 저는 스님이 된 이래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 번만 더 뵙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처님께서 오셔서 저를 위로해주시니 저는 이제 아무런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만난 기쁨을 얘기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참 착한 사람 아니오. 그죠? 얼마나 신심이 깊은 사람이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비구여, 이 허물어질 육신을 봐서 무엇 하겠다는 거냐.

너는 출가할 때, 이 육신을 보기 위해서 출가 했냐,

바로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제행이 무상함을, 일체가 고임을, 제법이 무아임을 깨우쳐야 한다.

지금 네 앞에 있는 여래의 육신은 곧 늙고 병들어 허물어질 것이다.

여기에 집착하는 것은 올바른 게 못된다.”

 

이렇게 해서 법의 이치를 설해줬더니 그 비구는 그 마지막 순간에 법의 이치를 깨닫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이름이 같은데 내용이 좀 다릅니다.

 

,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항상

법을 보라. 나를 보지 말고 법을 봐라.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이 비구는 이렇게 지나치게 집착을 해서 그런지, 도저히 자살할 정도까지 이르러서 그런지, 부처님께서 오히려 이 사람이 갖는 그 믿음과 신심을 인정하고, 그걸 기초로 해서 법을 설하는 모습을 여기 보여 주고 있다.

 

/기쁨과 만족이 가득한 그대여,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 완전한 믿음을 지닐지어다./

물론 여기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지니라는 거죠.

 

/그리하면 평화로운 피안에 이를지니,

그때 존재는 즉멸하여 완전한 행복을 이루리로다.

 

오너라 박칼리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볼지니라.

마치 늪에 빠진 코끼리를 건져 올리듯 여래는 너를 건져 올리리라.

 

오너라 박칼리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볼지니라.

마치 아수라의 깊은 골짜기에서 태양이 풀려나듯 여래는 너를 풀어 주리라.

 

오너라 박칼리여

두려움 없이 여래를 올려다볼지니라.

마치 아수라의 깊은 골짜기에서 달이 풀려나듯 여래는 너를 풀어 주리라./

 

이렇게 해서 이 박칼리 존자는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께서

오너라 박칼리여라고 하는 이 소리를 듣고 자살하려고 하는데서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버리고 부처님 곁에 와서 부지런히 정진을 해서 아주 훌륭한 수행자가 되었다.

 

뭐 이런데서 볼 때 부처님의 교화의 사례는 우리가 생각할 때 어떤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을 찾아온 많은 제자들은 또는 대중들은 이 찾아온 동기는 참 각양각색입니다.

 

이 존자처럼 부처님 모습이 좋아서 찾아온 젊은이

또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렸지마는 부처님 모습을 보고 너무너무 좋아해서 찾아온 처녀

그게 뜻대로 안 되자 부처님을 미워하고 원망해서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한 그런 사람도 있죠.

그런 사람부터 시작해서 아들 죽었다고 울고불고 찾아온 사람

아까처럼 밭 갈다가 쟁기를 버리고 찾아온 사람

그래서 부처님 제자가 되어 기쁜 것이 우선 당장 밥 얻어먹는 게 좋아서 그거로 만족을 하는 사람부터 100이면 100 1000이면 1000. 각양각색이요.

 

그런데 이 모든 중생들의 업연 따라 인연을 따라 그러나 그것을 어디로 인도했습니까?

다 해탈의 경지로 인도했다.

 

그들의 출발지는 다 다르지만 그들의 도달 지는 한 곳으로 인도했다.

열반과 해탈이라는 목표인 곳으로.

 

그런데 오늘 우리의 교화는 이러지 못합니다.

우리는 수행이라고 하는 하나의 목표, 이 수행을 해가는 그 길도 하나,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이 수행에 대해서 말을 하거나 법을 묻는 자만 이 길로 인도하고 나머지는 아예 상대를 안 해버리죠.

 

그건 세속적인 거다. 그건 도가 아니다. 그건 법이 아니다.’

적어도 나한테 와서 물으려면 법만을 물어라. 법이 아닌 것은 묻지 마라.’

법을 구하는 자는 찾아오고, 나머지는 아예 오지마라.’

이렇게 철조망을 쳐서 문 닫아 놓고 접근을 차단하고, 뭐 이런 경향이 있죠.

그러니까 이것은 대중과 유리된다.

대중의 각양각색의 다양한 고뇌를 외면하고 그걸 하찮게 생각합니다.

이런 어떤 원칙주의, 그것이 나아가서는 고립주의에 빠지게 되죠.

 

그런데 반대로 대중의 근기에 맞춰서 중생을 교화한다면서 밥 달라는 사람 밥 주고, 수명 달라는 사람 수명주고, 복 달라는 사람 복주고, 이사 가는 사람 날 잡아 달라면 날 잡아 주고, 100가지 요구에 100가지를 응대하면서 100가지 목표에 도달케 하는 거요.

이것을 대중성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방편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사회성이라고 말하고, 이런 길이 있다.

 

이것은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하는 게 아니고,

바로 중생의 요구에 따라서 세속화된 거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세속화된 불교가 많습니다.

이것을 법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방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다.

 

그럼 어떤 것이 바른 법, 정법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것은 중생의 그 갖가지 요구, 천 가지 만 가지 그 요구는 인정되어야 한다.

 

부도났다고 우는 사람

연애하다 실패했다고 우는 사람

자식이 말 안 듣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

남편이 바람피운다고 우는 사람

키가 작다고 신체에 열등의식을 갖는 사람

 

이 세상의 중생은 그 인연을 따라서 그 고뇌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84천 번뇌망상이니까.

 

중생은 그러한 고뇌를 안고

그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법에 귀의하게 된다.

 

, 쉽게 말하면 중생은 만 가지 각각의 꿈을 가지고 사는 거요.

온갖 그 꿈속에서 고뇌를 가지고 있다.

 

그럴 때, 그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은

그 중생의 갖가지 꿈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하나 꿈을 따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다.

그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꿈을 깨워주는 거요.

그 꿈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흔들어 깨워주는 거다.

바로 법에 눈뜨게 해서, 법의 실상을 깨달아서

그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다.

 

찾아와서 묻는 자가 법을 물어야 된다. 이런 게 없습니다.

부처님 찾아와서 물은 제자 중에 법을 물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들 죽었다고 아들 살려 달라.’ 이렇게 와서 하소연했지.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고뇌하는 사람에게

제행이 무상한 법의 이치를 깨달음으로 해서

그 고뇌에서 벗어나도록 한 거요.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밥 달라고 밥 주고, 옷 달라고 옷 주는 게 방편이 아니에요.

그가 밥 달라고 옷 달라고 뭘 달라고 하더라도 .

그것이 상에 집착인 줄 깨우쳐서

밥이 필요 없고 옷이 필요 없는 도리를 깨닫게 해주는 거다.

그래서 고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딸이 셋인데, 아들 하나 낳고 싶다고 와서 하소연을 한다.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아들 낳는 비법을 일러주는 게 불법이 아니에요.

바로 아들이다, 딸이다 하는 이 차별의 이 인식이 잘못된 것을 깨우쳐서

아들이 별도로 필요 없는 도리를 알아버리는 거다.

 

자식을 낳지 못한다 해서 그것이 죄가 아닌 줄을 알아버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에요.

 

그래서 그 중생의 갖가지 고뇌 따라 거기에 적절한 처방이 쓰여지는 데, 목표는 한가지에요.

병이 낫는다. 그 병이 완전하게 낫는다.

바로 여기 해탈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게 정법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법의 이치를 알고, 즉 법의 이치를 모르고 헤맨 것은 비록 이 세상에서 어떤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건 꿈속의 얘기이기 때문에, 법의 이치를 깨닫는 즉시 그건 다 없었던 사실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법의 이치를 알고도

그 잘못된 행위를 한다는 것은

계율을 어긴 것에 해당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참회를 해야 하고, 어떤 계율은 어김으로 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본인이 깨는 쪽으로 가고자함이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기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요.

나쁜 인간이라든지, 못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렇게 말하는 거요.

해탈의 열반의 길로 갈 목표설정이 잘 안 되어있다.

 

그러니 세상에 돌아가서

부지런히 일하고, 가정을 돌보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우선 복을 닦아라.

너는 아직도 해탈의 길로 갈 준비는 안 되어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 인도(=교화)의 목표다.

여기에 다양한 방편, 방편이라는 말은 그때그때 알아서 적당하게 땜빵하는 그런 거짓말이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서 깨달음으로 인도되는 가장 시적절한 방법, 정도다. 이런 얘기에요.

이것을 방편이다. 이렇게 부르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 이 박칼리 비구는 좀 특이한 사람이죠.

법에 귀의하지 않고 뭐 했다? 상에 집착한 사람이오.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는

상도 상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시는 그 비상이 더 좋아서 비상을 상으로 짓는 사람에요.

이건 이 비구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상에 집착해서 상에 집착함을 버리라고 비상을 제시하면

비상을 새로운 상으로 만드는 사람이오.

 

, 여기 산이 하나 있다.

한 사람은 동산이라 하고 한 사람은 서산이라 하고 서로 다퉈요.

그래서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다.

나는 여지가지 동산이라고 알았더니 동산이 아니구나.

그럼 무슨 산이고? 비동비서산이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다.

이렇게 또 다른 상을 짓는 거요.

 

그래서 누가 서산이라고 그러면 아니야.”

동산이라 그러면 아니야

그럼 넌 뭔데? “비동비서산이야

이런 새로운 상을 짓는 사람이다.

 

이것은 마치 그 용어는 부처님의 말씀 같은데

실지로 그는 그 용어만 사용했지,

그냥 상을 지은 자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불법에 정통하다 하더라도

불법의 상에 집착한 자는

불법을 모르는 자다.

 

바로 박칼리 비구가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 부처님의 그 상마저도 좋아해버리는,

그래서 새로운 상을 짓는, 이런 경우에 빠지죠.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짓는 사람도 많죠.

상이 없음을 알아야 되는데, 진리는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지어버린다.

그러니까 그는 공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하더라도

상 없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이 말이오.

 

그런 우를 우리들이 범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래서 어떤 말이 있습니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을 보지 마라.’ 이런 얘기를 하죠.

달을 보라.’ 하는 그 손가락의 가르침을 따라서 달을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주는 손가락 끝에 집착함으로 해서 말에 집착함으로 해서 또는 형상에 집착함으로 해서, 그 원 뜻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선에서는 이 교에 이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불립문자다.

문자에 의거해서 우리가 진리를 깨칠 수가 없다. 진리에 도달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께서 부처님의 형상뿐만 아니라

법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그 본질에 우리가 도달해야 된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새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