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1회 이치를 바로 깨달으나 업은 바로 제거되지 않는다 (43:21)

Buddhastudy 2012. 2. 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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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금강경에서는 키워줘도 키워준 게 없어야 돼. 금강경에 그렇게 써 놨다니까요. ~ 못 알아듣습니까? 말하지 말까요? 그러니까 키워줘도 키워준 게 없어야 돼. 사랑해도 사랑한 게 없어야 돼. 사랑해도 사랑한 게 없음은 미움 없어지잖아요. 사랑하다가 왜 미워집니까? 사랑해놓고 사랑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미워진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 욕도하고 죽일 사람아.’ 이런단 말이오. 죽이기는 뭘 죽여. 상대방은 좋다고 데리고 가는데. 어떤 면에서 나는 싫다 하지만 또 누군가 좋다고 오라 하는 데도 있잖아요. ~ 내 말을 알아듣나? 알아듣지 못하나? 그래서 상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요. 이 대목에서 하는 얘기가.

 

그래서 생각이 비어있음을 아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상을 가지지 말아야 된다. 이거야. 상을. 상 때문에 싸우고, 시비하고, 상 때문에 서로 감정이 충돌하고 이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누리도록 하는 하나의 메시지에요. 상없이 살라. 상없이. 육조혜능 스님께서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하는 구절을 듣고 출가를 했다고 그래요. 사람이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은 어떤 증세가 나옵니까? 중독증세가 나와요. 중독. 사실 번뇌도 근본 번뇌가 의삼업에서 시작되거든요. 탐진치 삼독이 근본 번뇌입니다. 이걸 삼독이라 이래요. 독소 할 때, .

 

그러니까 중생의 마음은 탐진치 삼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얘기에요. 요즘 뭐 사회적으로 청소년들이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다. 이런 얘기도 나오고. 또 마약에 중독된다. 또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분들, 알코올 중독됐다.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중독된 마음을 가지면 안 돼요. 그건 병이잖아요. 분명히. 그러니까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어디에도 마음이 붙들려 중독되지 마라, 이 말이오. 사랑해도 세속적인 정에 너무 치우쳐가지고 중독되면은 치정이 되어 버려요. (어리석을 치)자를 붙인다고요. 치정. 치정이 되면은 망신하는 거에요. 그래서 상없는 마음으로 살아라. 관념의 고집을 만들지 말고 살아라. 이렇게 이 대목에서 설했는데.

 

이것은 불교수행의 단계에 信慧行淨신혜행정 네 단계가 있습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증득하는 신혜행정의 네 단계 가운데 처음 두 단계인 신혜에 대해서 말해놓은 법문이라 이럽니다. 다음 37장에 넘어가면은 능엄경 사구게를 인용하면서 해 놓은 법문이 또 나옵니다. 이치는 바로 깨달으나 업은 바로 제거되지 않는다. 理卽頓悟乘悟倂消이즉돈오사비돈제란 말이 있어요. 선가귀감은 서산스님께서 돈오점수를 주장합니다. 선오종 가운에서는 임제종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면서 임제종 풍을 취하고 있는데 임제 스님하고 서산스님의 다른 점은 임제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한 대표적인 스님이십니다.

 

그런데 서산스님은 돈오점수를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 경전에서는 대부분 돈오점수입니다. 이 대목의 얘기가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얘기입니다. 이수돈오나, 이치는 바로 깨달으나 돈오. 단박에 깨닫는다. 지체 없이 깨닫는다, 이 말이오. 사는 사, 이와 상대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현실 속에서 해야 되는 일,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는 그런 일. 이게 사에요. 현실에 나타는 실제적인 문제죠. 이것은 단박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理則頓悟이즉돈오라 乘悟倂消승오병소원이와 事非頓除사비돈제라 因次第盡인차제진이다 하는 능엄경 사구게 가운데에 두 구절을 인용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깨닫고 나서 철저한 수행을 다시 해야 된다는 거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눈이 목표물을 보고 발이 걸어간다. 이런 말 하셨죠. 그렇듯이 깨닫는 건 우리가 아는 것, 머리에 어떤 생각이 번쩍 번갯불처럼 일어나서 깨닫는 거는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지마는 몸에 익힌 습관이 있어요. 가령, 우리가 기호품을 좋아할 때도 예를 들어 술을 즐겨 드시는 어른들은 하루아침에 술 끊기가 힘들어요. 담배를 계속 피워온 분들은 하루아침에 끊기가 힘들다니까요. 많은 노력을 해야 돼요. 그래서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어진 것은 이것은 사가 되는데. 이건 안 끊어지는 거에요.

 

옛날 어느 선방, 이런 얘기가 전해지는 게 있습니다. 효봉스님이 살아 계실 때 얘기에요. 효봉스님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정권을 세워서 나라를 맡아 있을 때 사셨던 어른입니다. 우리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셨죠. 그 스님께서 한때 저 경상남도 통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옛날은 충무라 하다가 다시 본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미래사란 절도 있고 이래요. 절에 계실 때 참선 수행하러 오는 스님들이 그 스님 밑에 모였거든요. 선방에 있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선방에 정진하러 온 스님 한 분이 결재를 해 놓고 며칠 있다가 효봉스님께 찾아와가지고 스님, 그냥 가려다가 스님께 그래도 인사를 드리고 가는 것이 도리라 해서 인사드리러 들어왔습니다. 제가 여기 당부를 드려서 스님 밑에서 공부를 좀 하려 했는데, 부득이 떠나야 되겠습니다.’

 

왜 가려 하느냐?’ ‘제 옆에 앉아있는 스님이 담배를 피우는지 옆에 앉아있으면 자꾸 담배냄새가 나서 정진이 제대로 안 됩니다.’ 이 말이에요. 제가 이거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그 좀 뭐랄까? 괴벽한 성격이 있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냥 제가 선방을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데요. 그랬더니 듣고 계시던 효봉스님이 그러면 한 삼일 쉬었다 가라는 거에요. 삼일만 기다렸다가 삼일 후에 떠나라. 이러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스님이 아~ 그냥 지금 당장 가지 말고 한 삼일 있다가 가라고. 삼일만 참다가 가라 이 말이오. 그래서 큰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 그러겠습니다. 대답을 했답니다.

 

그러고 나서 효봉스님께서 시자보고 지필묵을 준비하라 시킨 거에요. 먹을 갈라는 거에요. 그래서 붓으로 문종이 한지에다가 글씨를 쓰는데, ‘담배 하나 못 끊는 사람이 번뇌는 어떻게 끊노?’ 이렇게 써가지고 주로 담배 피우는 습관을 가지고 있던 스님이 화장실에 가서 좀 담배를 피우거든. 화장실 입구에다 떡~ 붙여 놓은 거요. 담배 하나 못 끊는 사람이 이 참선해가지고 수행하는 거 이 번뇌, 물론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게 열반이다. 이런 구절도 앞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 그래서 그걸 써가지고 붙여놓게 하고 하루를 지났는데, 수좌스님이 한 분 효봉스님 방으로 찾아 들어와서 넙죽 큰절을 하면서 아뢰는 말이.

 

스님, 번뇌는 못 끊어도 담배는 끊겠습니다.’ 했다. 담배 끊은 거요. 담배 끊으니까 옆에 앉아도 냄새 안 나게 될 거잖아요. 그래 가려던 스님, 이젠 앉아도 될 거야, 담배 냄새 안 날 거야. 담배 냄새 때문에 가겠다 했으니까, 그런 일화가 있어요. 우스운 참~ 에피소드죠. 그래서 그 경우에는 큰 스님의 묘한 방편으로 인해 끊었지마는 잘 안 끊어진다. 이거요. 잘못된 습관이 참~ 고쳐지기가 쉽지가 않다 이거요. 그래서 돈오점수를 내세우는 겁니다. 그다음 여기 보면은 밑에 문수는 천진을 달관하고 보현은 연기를 밝힌다는 주혜의 말이 있어요. 문수는 지혜죠. 보현은 行願행원이고. 그러니까 아는 것은, 깨닫는 것은 이걸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말하면 머리로서 아는 것이고 머리로 깨닫는 거니까 그건 빨리 할 수 있다는 거에요.

 

번갯불처럼 번쩍 여기도 나옵니다. 解似電光해사전광, 아는 것은 번갯불 같아도 이 말이에요. 行同窮子행동궁자라. 행동은 궁자와 같다. 궁자는 거지 행각을 하는 어느 장자의 아들입니다. 법화경 신해품에 나오는 비유 중에 있는 말입니다. 법화경은 여러 가지 비유를 설해 놓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法華七喩법화칠유니, 九喩구유니 이런 말이 있어요. 어느 장자의 아들이 어려서 집을 나갔어요. 난리통에. 그래서 거지가 되어서 오십년을 삽니다.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문전걸식을 하고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귀한 집 자식인데 신분이 천한 사람이 되었어. 오십년이 지나서 우연히 이집저집 걸식을 하러 다니다가 아버지 집에 오게 된 거요. 아버지 집에. 밥 빌려. 아버지가 아주 지체가 높은 그런 권세를 누리는 분이었어요.

 

대문 앞에서 보니까 대청에 자기 아버지가 앉아있는데 아버지인 줄 모르는 거요. 이 집은 아주 세도가 대단한 집인가 보다. 내가 붙들리면 야단을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겁이 나서 도망을 쳐버려요. 그때 아버지가 묘하게도 그 대문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 50년 전에 집 나간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하인을 시켜 가지고 붙잡게 하니 하인이 잡으러 가니 놀라가지고 아들이 기절을 해 버렸어요. 이래서 방편을 씁니다. 하인들을 시켜가지고 아들하고 어울리도록 해가지고 마구간에서 청소나 하고 이런 일을 시키게 합니다.

 

이래서 아들하고 하인이 서로 마구간 치우는 이런 일을 하면서 여러 날을 지내가지고 친해져요. 친해져가지고 이 집에 있어도 겁을 안내도록 이렇게 유도를 했다 할까? 이래가지고 나중에 부자관계를 알게 하고 재산을 물려준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궁자에 비유한 것은 거지행각을 하면서 다니던 그 습관이 하루아침에 귀한 집 자식의 신분 높은 본래의 처신이라 할까? 행동으로 단박에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얘기가 나왔고요. 다음 장에는 또 불교를 계정혜 삼학. 이걸 삼물학이라고도 합니다.

 

이 선가귀감에서는 삼학을 골고루 강조를 했어요. 다른 선어록에는 선정위주의 설법을 주로 해 놨습니다. 선정. 간화선을 강조할 때는 화두만 착실히 들면 된다. 물론 삼학이 삼위일체기 때문에 계학 속에도 정학이나 혜학이 들어있고, 또 혜학 속에도 계학과 정학이 들어있다고 이렇게 봅니다마는 이 선가귀감에서는 삼학을 골고루 강조를 해 놨어요. 다른 어록, 뭐 임제록이니 이런 유명한 어록들이 있는데, 이런 데서도 물론 삼학을 다 같이 말했지마는, 주로 선정을 닦는 정학을 강조해 놓은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삼학을 골고루 강조하면서 다음 장에서는 계행이 없으면 마군의 도를 이룬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계를 지키면서 수행을 해야지 계를 지키지 않고 수행하는 거는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거에요. 사도를 이룬다는 거죠. 그러면서 하나하나 예를 듭니다. 帶婬修禪대음수선은 如蒸沙作飯여증사작반이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음심을 띄고 선을 닦는 것은 음행하는 마음, 음욕심을 가지고 선을 닦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거와 같고, 모래가 밥이 안 되 죠. 쌀로써 밥을 짓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하려 한다는 뜻이죠. 증사작반이라. 초발심자경문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帶殺修禪대살수선은 如塞耳叫聲여색이규성이오. 살생을 하면서 선을 닦는 것은 귀를 막고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다. 귀를 막으면 소리가 안 들리잖아요. 그러나 남한테는 크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 역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다음 帶偸修禪대투수선은 如漏巵求滿여누치구만이오. 도둑질을 하면서 선을 닦는 것은 깨진 잔은 새잖아요. 물을 담으면은, 깨진 잔에 물을 부어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거와 같다. 이런. 그다음 또 거짓말을 하면서 선을 닦는 것은 똥을 새겨 가지고 향을 만들려는 거와 같다. 이런 비유를 했어요. 그러니까 향은 전낭 같은 향나무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향냄새가 제대로 나는 것이지 향이 아닌, 말하자면 사람의 똥이나 짐승의 똥을 가지고는 향을 만들 수는 없는 거에요. 이래서 이렇게 선을 닦되 계행이 갖추어져야 된다. 계행을 갖추지 않고 선을 닦으면 결과에 가서는 마도, 마군의 도를 이루고 만다. 마도란 말은 정도의 반대말.

 

그래서 이 대목에서 계행을 잘 지키면서 선을 닦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를 했습니다. 불교수행이 일반적으로 앞서 말씀 드린 데로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는데, 이게 법망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계를 지키면은 선정이 이루어진다는 거요. 선정이 이루어지면은 지혜가 이루어진다는 거요. 그래서 계를 인하여 선정을 이루고, 정을 인하여 지혜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행동, 사실은요, 우리가 머리 좋은 사람들을 보통 수재다, 천재다, 이러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녀교육을 시킬 때 자녀가 머리 좋기만 바래요. 이걸 너무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그 문제에 치중합니다.

 

물론 머리 좋은 거, 이걸 지능이 높다. 아이큐가 높다. 이렇게도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머리 좋은 것은 천재가 아니란 말도 있어요. 진정한 천재가 아니라요. 행동이 바른 게 천재에요. 행동이 바른 걸, 이런 걸 쇼펜하우어라는 독일 서양의 철학자가 있지 않습니까? 철학자가 도덕적 천재라 이랬어요. 도덕적 천재. 행동이 바른 사람, 마음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올곧게 쓰는 사람. 이 사람이 천재라 했어요. 지능 높은 천재는 사회에 물론 어떤 면에서 유용한 일꾼이 되기도 하지마는 큰 도덕적 자산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거에요.

 

이 불교는 우리 인류사회가 요즘 흔히 나라마다 경제문제를 우선시하지만은, 그것도 중요하지마는, 도덕적 자산이 많이 갖추어져야 되요. 그래서 종교가 필요한 거에요.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그 나라, 그 사회에 도덕적 자산을 많이 갖추게 하는 거에요. 이게 천재라는 거에요. 그래서 쇼펜하우어 같은 경우에는 세 종류의 천재 이야기를 하면서 지적인 천재. 지능이 높은 사람. 이건 진짜 천재가 아니고, 그다음에 사고력이 좀 뛰어난 사람 발상을 잘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남보다 뛰어난 생각을 먼저 해내는 사람. 이것도 천재의 행위에 속한다고 예를 들었습니다.

 

그 두 천재보다 도덕적 천재. 행실이 바르고 마음이 올바른 사람, 이런 사람이 각계각층에 많이 있어야 인류사회가 공영의 길을 갈 수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삼학, 이것은 사람의 인격이 완성되려면은 세 가지의 덕목이 골고루 갖추어져서 참~ 고귀한 인격을 누구나 갖출 수 있다. 이런 뜻이 들어있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오늘은 그러면 시간이 다 돼서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