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은 그게 아닙니다.
상대를 보고 해달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형상과 내 형상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그 뜻도 또한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부처님이 내 몸과 둘이 아니고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해 달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네 마음을 먼저 알아야 내 마음을 알 수 있느니라.
그럼으로써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뒤에는
"만약에 네 마음이 전깃줄이라면
내 마음이 또 전깃줄이라면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치면 불이 들어올 뿐이지
거기서 ‘해달라 안 해달라’ 이런 게 붙지 않느니라.”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기복이라는 얘기가 지금 나오는데
부처님이 가르치실 때는 그렇게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네 마음을 네가 발견해서 깨달아서 자유롭게 살아라.
모두가 일체가 다 공(空)해서 돌아가느니라.
그러고 일체가 너 아님이 없느니라.
일체가 높고 낮음이 없느니라.
그런데 누구한테다가 해 달랠 수 있겠느냐.
네 마음 가운데도 도량이 있고, 부처가 있고, 법이 있고
그런데 어디에다가 해달라고 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런다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물론 농사를 지어서 벼를 다 추려서 까서 키질을 해서
이렇게 밥을 지어서 먹어야 먹어지는 거지마는
그거는 한 씨앗과 그 모든 경계를 거쳐 나오는 것뿐이지
결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갖다가 붙이면 붙어지고
불이 들어올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학생들 기도드리는 것도 그렇고
또 어떠한 고난이 있고 어떠한 애고가 있고 그래서
기도드리는 것도 있는데
기도드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두 여러분들이 자성(自性)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자성을 다스릴 수 있는
그 자성으로 인해서 자기 마음이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길러야 만이
정신계의 50%와 물질계 50%
정신계 50%를 알아야 물질계 50%로 나오게 해서
내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집을 지으려고 생각을 했다’
‘학교를 들리려고 생각을 했다’ 이럴 때
생각을 했다 할 때는
벌써 나는 시험을 봐야 하고 또는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필요하니까 설계도가 나와야 합니다.
나오면 집이 올라갑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마음이 아니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마음을 내지 않고
어디서 해달라고 자꾸, 그러는 것도 마음 내는 거지만
그거는 물 한 모금 쪽박에 얻어 쓰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거는 복을 비는 건데
복을 좀 얻어 쓸 수야 있겠지마는
이건 내 생각입니다.
얻어 쓸 수야 있겠지만 본래의 타개는 못 합니다.
자기가 명석해질 수도 없고
물리가 터질 수도 없고
항상 얻어먹는 노예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공부하는 사람들도
부모가 이런 데를 다니면
시험보는 학생들한테도 이 관(觀)하는 법을
아주 간단하게 그렇게 가르쳐 줘라 그러는 겁니다.
자기만이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켤 수 있는 거니까요.
자기가, 자기만이 하는 거지
누구가 해주는 겁니까?
시험을 봐주는 겁니까?
신이 있으면 신이 와서
나를 시험을 보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신이,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나가는 거죠.
어리석게 그렇게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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