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미국에 사는 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가 저랑 동생을 키워주셨는데요.
유명한 대학교를 갔으면 좋겠다는 압박 아닌 압박이 스트레스입니다.
엄마 아빠보다 할머니가 더 그립고 좋아요.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도 감사한 마음만 가질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할머니에 대한 집착과 이제 불안함을 없앨 수 있을까요?//
엄마·아빠가 미국으로 이민 가고
애들 다 못 데려가니까
둘은 한국에 놔놓고 가서 할머니에게 컸고
크니까 엄마·아빠가 미국 가서 자리를 잡았으니까
“야, 들어와라”해서 들어가서 공부하고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엄마·아빠가 좀 좋은 대학에 가라, 지원해줄 테니까, 이런 얘기이고
할머니 떨어져서 있으니 할머니는 보고 싶고
요약하면 이렇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그게 뭐 큰일이에요?
내가 봤을 때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 유학 가기가 한국에서 10명 중에 1명꼴도 안되는데
자기는 미국에 유학 가서 살고
유학 가면 주로 집이 없어서 기숙사 생활하거나
혼자 생활해야 하는데
한국에는 할머니 있어서 잘 자랐고, 미국에 가니 엄마·아빠 있어서 또 잘 자랐고.
대부분 다 미국에서는 자기가 학비 벌어서 대학 다니는데
엄마·아빠가 지원해줘서 대학까지 다녔고
직장에 취직해야 하는데 대학원까지 또 갈 수 있게 됐고
내가 보니까 뭐.. 100명에 1명 정도, 젊은이 중에 있을까 말까 한 행운아인데
그래도 고민이 있어요?
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무 고민거리도 아니잖아요.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보고 싶은 것은
어릴 때 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그런 거예요.
엄마·아빠는 이름만 엄마·아빠지 자기가 어릴 때
자기 마음속에, 마음속에 엄마는
자기 의식이 형성되는 모델은 할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거예요.
이름이 할머니이지, 자기 마음속에는 할머니가 곧 엄마다, 이런 얘기에요.
어릴 때 자기의 의식이 형성되고 기억에 추억이 남고 하는 것은 할머니이기 때문에
할머니 보고 싶다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엄마·아빠를 보고 싶은 거와 똑같다.
엄마·아빠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면 더 슬픔이 일어나는 것은
할머니가 자기 마음속에 엄마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신적으로 분석하면.
그래서 그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거예요.
엄마·아빠는 생물학적으로 엄마·아빠고, 마음속에는 할머니가 엄마이고
지금 엄마·아빠는 언니나, 또는 오빠나 또는 이웃이
자기를 지금 경제적으로 후원해 주는 거와 같은 거예요.
요즘 경제적으로 외국 생활하는 걸 전적으로 후원해 주는 게 쉽지 않잖아요.
자기가 엄마라고 생각하니까 후원에 대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만약에 삼촌 부부라든지 오빠네 부부라든지 이웃이라든지
이러면 자기가 엄청나게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단지 그 엄마·아빠라는 이름 때문에 자기가 너무 당연시 해버려서 고마운 줄을 모르는 거고
만약에 이웃 사람이 이렇게 자기를 후원해 준다하면
좋은 대학에 가면 더 후원해준다하면
고맙겠지.
그러니까 엄마·아빠는 후원자 입장에서는
후원해 주는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게 낫겠어요? 못하는 게 낫겠어요?
그래, 후원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후원을 받는다고 다 후원자의 노예는 아니잖아요.
후원자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잖아.
‘후원자 마음은 그렇구나’하고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후원해 주신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능력이 안되면 못가는 거고, 그런 거지.
그렇게 저를 후원해지시고, 저를 더 잘되도록 마음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능력이 안되거나 내가 다른 생각이 있다면
그건 어쩔 수가 없죠.
후원자하고 뜻이 안 맞으면 후원을 포기하고 내 갈 길을 가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에 어떤 학생에게
“너 승려되면 내가 대학졸업할 때까지 학비 대줄게” 이렇게 했는데
그래서 대학 들어가면 승려되겠다고 하고
중고등학교 학비를 받아서 다녀서 대학 들어가려는데
승려되는 대학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러면 서로 어떻게 해야 해요?
“그동안에 중고등학교 지원해준 것은 감사합니다마는
지금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도저히 승려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는 일반 상대를 가든, 공대를 가든 갔다.
이러면 저는 지원을 끊을 거고, 안 그러겠어요?
또 그 학생은 다른 후원을 받든지, 자기 노력에 의해서 갈 거 아니겠어요.
거기에 무슨 서로 원한이 맺히고 실망할 거는 없지 않습니까.
조건이 이렇게 갈 거를 생각해서 지원을 해왔고
그런데 내가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관계가 헤어지는 거지.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자기를 지원해 주는 대신에.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잖아요.
자기가 미국에 이민 와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살았는데
아들은 키워서 법대 가서 변호사가 되든지, 의대 가서 의사가 되면
부모는 고생한 보람이 있겠지.
“아이고 그래도 고생해서 아들 잘됐다”
“의사가 되었으니 너는 좋겠다” 이런 소리 듣고 싶은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나 내가 부모의 노예가 아닌데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내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 건 자기 자유에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부모를 미워하거나 부모가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다.
이런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분들의 생각이니까.
그거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하고
그러나 내가 20살이 넘었으니까 내 인생을 내가 살아야 하니까
엄마·아빠가 나한테 내가 승려가 되려는데 하지 말라고 말려도
엄마·아빠가 되지 말라고 그런다고 안 돼요?
내가 그 길을 가겠다 그러면 엄마아빠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도
“저를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저는 이 길을 가겠습니다”하고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후원을 받으려면 후원자에게 조금 잘 보여야 하겠죠.
타협해야 한다 이거요.
그런데 자기 갈 길이 분명하면 후원을 끊어야 하겠죠.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후원자의 요구를 내가 다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 갈 길을 선택하고, 내가 미리 후원을 끊을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오케이, 난 안 받을게. 내 맘대로 갈래.”
이럴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내 맘대로 결정해서 가버리면 후원자가 알아서 끊든지 알아서 하겠지.
내가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내가 미리 정할 필요가 뭐가 있나.
지원해주고 싶어서 지원해주겠다는데.
안 그래요?
내가 지원해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내 길을 가면서 후원은 해달라. 이건 안 되잖아요.
그건 윤리적으로 안 맞아요.
후원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게 지나치면 나는 후원자의 노예가 된다, 부모의 노예가 된다.
나는 내 길을 간다.
내 길을 선택했는데 부모가 보기에 또는 후원자가 보기에
마음에 안 들어서 끊는다고 원망할 필요는 없다
“그동안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길을 내가 개척해서 가야 하는 거고.
그런데 내가 미리, 자꾸 간섭한다고 탁 끊어버린다.
그럴 필요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손해만 나지, 득 되는 게 뭐가 있어요?
내 길을 내가 선택해서 가면
끊고 안 끊고는 누가 알아서 한다?
후원자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거라도 후원해 주자” 이럴 수도 있고
“아, 내 원하는대로 안되었으니까 후원 끊겠다.”
이렇게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라.
그분들의 요구를
“그런 말 하지마라, 요구하지 마라”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분들은 그 재미로 후원하는데
후원하면서 그 말도 못해?
“야, 너 의대 가면 어떠니? 치대 가면 어떠니?”
이런 말도 못하나?
그러나 나는 가고 싶지 않으면
“그 길도 좋지만, 저는 다른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또 앞으로 그분들은 자기 살아온 인생에서 지금 보니까
의대나 치대가 돈도 벌고 좋고, 안정적으로 보이지.
그러나 30년 지나면 의대나 치대나 변호사가 꼭 사회적으로 좋다, 이런 보장이 없겠지.
그러니까 내 길은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요즘은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애들이 어때요?
메타버스니 하는 이런 IT기업이 컴퓨터 게임에서 출발해서 올라온 거잖아요.
거기 재능이 오히려 아주 중요한 재능이 되기도 한단 말이오.
우리가 그걸 알 수가 없잖아.
옛날에는 중고등학교 때 고적대하고 음악하고 이러면 딴따라라고 그래서
아주 그냥 공부 안하고 농땡이 치는 애들이 한다.
체육한다 그래도 공부하는 거보다 낮게 쳤지만
지금은 스포츠니 예술이니 이런 게 오히려 더 높이 쳐주잖아, 그죠?
사회가 변하는 거예요.
지금 질문자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은 20년 30년 후에요.
그때는 어떤 세상이 될지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려워.
왜?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그러나 부모는 과거의 개념에 기초해서 조언할 수밖에 없잖아요.
달리 아는 게 없으니까.
그러면 저같이 어릴 때는 부모님의 조언이 뭐에요?
“공부하지 말고 농사지어라” 거든요.
그분은 평생 농사 열심히 지어 논 사서 애들 공부시키고 집 짓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괜히 딴짓하지 말고 농사 열심히 해라.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 제가 학교 갔다 와서 숙제한다고 마루에 엎드려 있으면
저희 아버님은 작대기로 갖고 마루를 때리면서
“야, 이놈의 자식아, 공부하면 돈이 생기나? 밥이 생기나?”야단을 친단 말이오.
그러면 얼른 책 던져 버리고, 망태기 메고 소 풀 베러 간다든지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냐?
아니다.
그분이 살아온 경험에서 조언을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의 세상을, 농사짓던 사람이 산업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은 또 이후에 10년 20년 뒤의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거요.
여러분들은 약간 눈치를 채고 변화를 낌새채지만
부모님은 한국에서 어려워서 미국에 이민 와서 장사하면서 대부분 살았을 거 아니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한국이든 미국이든 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이 제일 잘 나가잖아.
그러니까 우리 딸이 공부를 아예 못하면 기대를 안하는데
공부를 좀 하긴 하나 봐요, 엄마·아빠가 그런 기대를 하다 보니까.
미국은 돈만 많이 주면 좋은 대학에 가잖아. 그죠?
내가 돈은 얼마든지 대줄 테니까 한번 해봐라.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아빠를 고맙게 생각해라 이 말이 아니라.
엄마·아빠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라는 거에요.
그대로 살라는 게 아니라.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감사하다고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건 아니에요.
내 인생이니까 내 길은 내가 선택을 해서 가면 된다.
그걸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마라.
이해가 안 되니까
따라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자꾸 이렇게 생각하니까
심리적으로 부담이 생기고 저항이 생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고맙다 그랬다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미웠다.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된다.
그러니까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러나 그분들은 그분들이 인생에서 얘기하는 거지.
그건 내 인생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들어보고
“오, 괜찮겠다” 하면 그 의견을 따르고
내가 봐서 “그건 내 길이 아니다” 하면
“노땡큐”
미국에 있으면 노땡규 있잖아.
“그렇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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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할머니가 그리운 것은
어릴 때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보통 사람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모든 유학생들이 외국에 가서 살면 고향에 있는 부모 그리워하죠.
그와 똑같은 심리에요.
심리적으로는 누가 어머니다? 할머니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걸 알고 전화해서 가끔 인사도 하고
편찮으시다면 한번 방문도 하고
돌아가셨다 하면 장례를 치러드리고 이러면 되지
그걸 너무 집착하게 되면 어렵다.
그러니까 엄마 같은 그런 할머니는
내 마음속에 엄마와 같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할머니가 자기 걱정하는 건 뭐요?
건강하게, 일을 하든 공부를 잘하라, 이게 할머니가 키운 보람이지
늘 할머니 생각하고 울면서 공부도 안 하고 잠 못 이루면
그게 할머니를 생각하는 게 아니잖아.
할머니를 걱정 끼치는 일이지.
그것도 결과적으로 잘못된
할머니를 오히려 걱정 끼치는 행동을 지금 하고 있다.
자기는 할머니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할머니를 걱정 끼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도 도에 지나치면 집착이라 그래서
그것은 도리어 손실이 생긴다, 좋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랑도 너무 집착을 하면, 편집증이 생기면 부담이 되고
그래서 많이 헤어지고 그러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결론적으로
별일 아니다.
엄마도 할머니 문제도 별일 아니고
자기 일에 지금은 부모님한테 감사합니다하고
할머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고
자기 일에 집중하고
할머니 편찮으시면 자주 전화해 드리고
들어올 형편이 나중에 되면 들어와서 인사드리고
돌아가셨다 하면 너무 울지 말고, 하루쯤 울고 장례 치러드리고
다 할머니가 고생한 거는 할머니 보살피라고 고생한 게 아니라
너 잘 살라고 고생한 거다.
자기가 잘 살아주는 게 할머니한테도 어머니한테도 부모한테도 가장 큰 효도다.
자기가 잘 살아주는 게.
...
부모 입장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무 기대가 크면 자녀들한테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못 견뎌서 집을 뛰쳐 나가거나
아니면 집에 있어도 저항을 하거나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하나같이 다
“내가 뭐, 나를 위해서 그러나? 너를 위해서 그러지. 너 잘되라고 그러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누구를 예뻐하는 것도 상대가 싫다는 데 예뻐하면 요즘 다 성추행 되잖아.
성추행해놓고,
“내가 너를 좋아해서 내가 예뻐해서 그러지 내가 너를 때렸나? 손해를 끼쳤나? 왜 문제고?”
이러면 요즘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자녀들에게 집착하는 것은 거의 성추행 수준이다.
이런 얘기에요.
지나치면, 어떤 것도 지나치면
좋은 것도 많이 먹으면 독이잖아요.
운동도 너무 많이 하면 독이고.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에게 삶의 무거운 짐을 주고, 심리적 부담을 주는 그런 지나친 관심,
이게 자녀를 해치고 있다 하는 거를 부모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어릴 때 좀 따뜻하게 보살펴주라니까 그때는 팽개쳐놓고 딴짓하고
커서 자기가 알아서 살겠다는데
이제 옛날 거 뉘우치고 반성하고 하겠다.
그래서 내가 늘 비유하잖아요.
겨울에 불 때 주라니까 불 안 때 주고, 애가 냉방에 자게 해놓고
이젠 뒤늦게 반성해서 여름에 불 땐다고 난리를 피운다고.
그래서 애가 방에서 더워죽겠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옛날에 못 때준 거 지금 때준다 그러고.
이런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옛날에 못 떼준 거는 못 때준 거고
지나가 버린 거는 버리고
지금 한두 개 때야 하면 때고
안 때주는 게 나으면
옛날에 못 때준 거하고 관계없이 지금은 안 떼주어야 한다.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해.
엄마·아빠가 더 집착을 하는 거는
어릴 때 떼어놓고 왔고, 돌보지 못한 심리적 부담도 있고
내가 여기 와서 이 고생한 거는 다 너희를 위해서 이 고생했는데
이 고생한 보람이 나타나야 할 거 아니오.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더 집착을 하게 되는
부모들의 자식에 집착은
대부분 자기가 성취하지 못한 거를 성취해줬으면 좋겠다는
대리 만족적 요구가 많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떻게
예를 들면 탁구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 못 따서 자식을 그렇게 한다든지
피아노 하신 분이 그렇게 한다든지 이래서
가끔가다가 성공한 경우가 있지만
그거는 100에 1명이고, 99명은 다 사람들이.
아이들이 자기의 재능으로 자기의 수준에 맞게끔 자라게 안 해주고
자꾸 부모가 강요를 해서
바깥으로는 유명해졌다고 좋아할지 몰라도
이런 사람들 제가 상담해 보면
다 심리적으로 너무너무 힘들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생의 가치를 뭐로 두느냐가 중요하다.
삶이 마음이 가볍고, 자유롭고, 행복한 게 중요하지
외형적인 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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