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요? (2025.01.14.)

Buddhastudy 2025. 1. 20. 19:29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연기법과 중도입니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발견하신 곳은 전정각산이고,

연기법을 깨달으신 곳은

바로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보드가야입니다.

 

부처, 해탈, 열반, 윤회, 이런 말은

원래 인도에서 있었던 말입니다.

인도 전통에서 말하는 용어와 불교에서 말하는 용어의 해석이 다를 뿐

모두 원래 있었던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고

불교만이 갖고 있는 새로운 용어가

바로 중도와 연기법입니다.

그런 불교의 독특함이 생겨난 곳이

바로 이곳 보드가야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전통적인 인간의 행복론인 쾌락주의도

해탈의 길이 아니고

신흥 사상가들이 새롭게 제기한 고행주의도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오직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었습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과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모두 욕망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새로 발견한 제3의 길은

두 길 사이가 아니라, 두 길을 버린 새로운 길입니다.

, 욕망을 다만 알아차릴 뿐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욕망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새로운 길인 중도를 발견하기 전에

부처님께서는 고행을 하셨습니다.

고행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몸을 돌보지 않기 위해

첫째, 먹는 음식은 거친 음식을 먹었습니다.

둘째, 부드러운 잠자리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에 사는 짐승이나 가축이 앉을 때 ,자리를 고르게 만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세수와 몸을 씻는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깨달으시고 난 다음

굳이 고행을 일부러 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냇가로 가서 목욕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수행을 포기하고 타락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을 데운 것도 아니고

물에 입욕제를 뿌린 것도 아니고

그냥 흐르는 냇물에 목욕을 하신 거예요.

짐승들도 더우면 냇가에 가서 목욕을 하잖아요.

이런 모습을 보면

수행의 원칙으로 삼았던 고행이

자연스러움보다 더 극단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부처님이 수자타가 끓여 온 유미죽을 받아 드시는 것을 보고

다섯 수행자는

이제 부처님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단정하고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 고행림으로 떠나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수행자에게 중도를 설명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혼자 남게 된 부처님은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새로 발견한 중도의 원칙에 따라서

긴장도 하지 않고,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편안한 가운데

깨어있는 선정을 닦을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수자타에게 유미죽을 공양받고

몸을 회복한 곳이

강이 Y자로 흐르는 곳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서 동편 쪽으로 갈지,

강을 건너서 서편 쪽으로 갈지 망설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전에는 둥게스와리 산신은

동편 쪽으로 오셔서 성도 하십시오하고 청했다고 하고,

천신은

강을 건너 서편 쪽으로 가십시오하고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망설이다가 강을 건너 서편 쪽으로 가셨는데

그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앉은 위치가 강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에요.

 

부처님은 이곳 보리수 아래에서

보리수를 등 뒤에 두고

동편으로 앉으셨습니다.

지금, 이 보리수와 대탑 사이에 네모진 돌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를 상징해서

후대에 돌로 새겨 놓은 것입니다.

 

불교인들이 제일 신성시하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자리라고 해서

금강보좌라고 합니다.

그래서 태국 불자들이

그 위에 금으로 집을 지어서 덮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보리수 밑에 양쪽으로 앉아서

전부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금강보좌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정진을 하기 위해

보리수를 등 뒤로 하고 동편을 향해서 앉고자 하는데

마침 그때 목동이 여기에서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풀을 베고 있는 목동에게

그 풀의 이름을 물어보니

쿠사라고 대답합니다.

 

쿠사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길상초예요.

부처님께서 목동에게 길상초 한 단을 얻어 자리에 깔고 앉으셨습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치면

그냥 땅바닥에 앉지 않고

볏짚 한 단을 가져와서 바닥에 풀어서 앉았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땅바닥에 볏짚을 좀 깔면 푹신합니다.

그것처럼 길상초를 깔고 앉으신 겁니다.

 

경전 기록에 의하면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하고 다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경전을 보면

고행할 때는 항상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긴장을 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깊은 명상에 들어가셨습니다.

 

전에는 깨닫기까지 7주가 걸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49일간 정진하신 것입니다.

49일간의 용맹정진 후 샛별을 보는 순간

모든 무지가 사라졌습니다.

마치 눈을 감고 있던

사람이 눈을 뜨고, 어두운 밤에 불을 밝힌 것처럼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고, 깨닫고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세상에 한없는 중생들이

나고 죽는 삶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인연이 모여서 형성되고

인연이 사라지면 흩어지는 수많은 존재들의 변화무상함을

한눈에 본 것입니다.

그리고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이 열렸습니다.

 

즉 인연을 지으면 그 결과를 아는 것을 천안통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일을 당했다면

이는 어떤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억울해할 일이 없습니다.

기꺼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받는 모든 것은

다 지은 인연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과거의 원인을 아는 것을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내가 인연을 지으면 미래의 과보가 어떻게 될지를 알고

과보를 받을 때는 과거에 어떤 인연을 지었는지를 알게 되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알아서

늘 현재에 깨어있는 것이 누진통입니다.

누진통이 열려야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