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과하게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중독으로 이어져서
결국 현대 문명에서는 소비주의로 표출된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주의로 인해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토회에서도 환경을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적게 쓰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소비주의가 붓다 담마와 어떤 측면에서 대치가 되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토회에서 하는 실천 활동들이
붓다 담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다 욕구가 있어요.
먹고 싶은 욕구, 자고 싶은 욕구 등
욕구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구를 가진 존재들이 사는 세계를 욕계(欲界)라고 합니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긴 거예요.
그래서 욕구를 좋다 나쁘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욕구는 그냥 욕구일 뿐입니다.
욕구는 어찌 보면 우리 삶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욕구에 지나치게 집착했을 때는
괴로움이 생깁니다.
‘먹고 싶다’ 하는 욕구는 괜찮지만
‘꼭 먹어야 한다’ 고 집착하면
못 먹게 됐을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갖고 싶다’ 하는 욕구가 있으면 가지면 되지만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꼭 갖겠다’ 하고 집착하면
내 뜻대로 안 되는 문제로 인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욕구가 문제가 아니라
욕구에 대한 집착, 즉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하셨습니다.
밖에 있는 백만 명의 적을 이기는 일보다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큰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 자신’이란
욕망, 카르마, 습관을 말합니다.
욕구를 따르는 일이 습관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말씀하셨습니다.
과소비하던 왕자 생활을 버리고
음식은 걸식해서 먹고, 버린 옷을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소비를 하셨습니다.
욕망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 모습은 극빈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조건에서 사는 것은
괴로움의 극치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좋은 집에 서 살아야 하는 등,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욕망이 끝나지 않습니다.
요즘은 특히 SNS나 TV를 통해서
‘먹방’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면서
먹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디를 가든 먹는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립니다.
어디 가서 뭘 먹었는지, 커피는 어디가 맛있는지,
빵은 어디가 맛있는지와 같은 정보를 공유합니다.
입는 것은 또 어떤가요?
‘입는다’ 하는 말 속에는 옷만이 아니라
가방도 들어가고, 액세서리 착용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명품을 구매하는데 많은 돈을 들여가며
입는 것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자는 집도 마찬가지예요.
집은 그냥 잠자는 공간일 뿐인데 너무 고급화하다 보니
수십억짜리 아파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마치 소비의 극치를 달리는 것 같습니다.
차나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 돈을 주고 소비하고,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석을 사 모으고
자전거나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몇억씩 들여서 차를 타고 다닙니다.
동호회를 조직하여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면서
세뇌가 됩니다.
이게 바로 소비 중독 증상입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첫째, 많이 소비하는 문제가 있고,
둘째, 소비가 점점 고급화되어가면서 엄청난 경비를 지불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소비에 따른 CO2 배출량이
보통 사람의 몇십 배에 달하는 것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이런 사람은 중범죄자에 속합니다.
수많은 생명을 살생하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기후 위기를 걱정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부처님은 과소비할 수 있는 조건인 왕자의 지위를 스스로 버렸는데
우리는 왕자도 아닌 주제에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소비할 수 있는 조건에 있음에도
검소하게 살며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텐데,
소비할 수 없는 조건에서도 소비하고 싶어 껄떡거리니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 결과 스스로 소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회가 하고자 하는 새로운 운동은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욕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둘째, 적게 소비해서 남은 재화를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적게 소비함으로써 CO2 가스를 덜 배출하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삶을 살 수가 있고
서로 가지려고 싸우지 않고 베풂으로써
각박한 시대에 평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개인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기본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현재 인류가 처한 환경 위기, 전쟁 위기
그 외 많은 갈등들을 해소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많은 갈등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거나
자기 욕망대로 하려는 데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길은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의 많은 문제와
나의 괴로움을 동시에 해결하는 길입니다.
인간관계에 평화를 가져오고
동시에 자연을 보호하며
또한 극빈자를 돕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삶입니다.
정토회가 부탄에서 하려는 사업도
바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도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개발입니다.
사람을 돕겠다고 환경을 파괴하면
결국은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만 했다면
요즘은 환경적 가치를 바탕에 두고 환경이
파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원 활동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인간적 가치만을 논했다면
이제는 환경적 가치를 더해서
자연 생태계의 순환 원리를 고려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사람과의 관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살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환경적 가치까지 포함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를 살펴보면
개가 새끼를 낳으면
털이 흰 것도 있고, 검은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들 사이에서 털 색깔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잖아요.
개들끼리 어울릴 때 암수 성별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피부 색깔로 차별하고,
성별로 차별하고, 계급을 나눠서 차별합니다.
그 말은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 차별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잘못된 의식이 만들어 낸 왜곡된 가치관이
문화로 형성된 거예요.
왜곡된 사실을 깨우쳐서 바로 알고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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