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이죠.
눈부신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인간은 태양계 밖으로까지 탐사를 나가고
미세한 입자를 들여다보고
뇌 안의 정보를 통해 정신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성의 힘이 강력해질 시대에
신화적인 상상 들을 믿을 필요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이성적인 탐구라는 것을 시작했던
초창기 인물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아주 많은 신화적 미신들에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적인 논증을 통해서
불확실한 믿음들을 극복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어내는
학문적인 사고방식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요
그런데 막상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주 많은 신화적인 설명들 안에서
삶의 매우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지구의 비밀부터
삶의 의미와 사후세계까지
많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이성이 아니라 신화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때 소크라테스가 믿었던 신화적 세계관은
지금 우리가 믿는 과학적 세계관과는 얼마나 다를까요?
소크라테스가 머릿속에 그렸던 세계관은
기존의 그리스 신화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으면서도
당대의 수준에서 가질 수 있었던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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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는 둥근 모양으로 하늘의 중앙에 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의 중앙에 딱 균형을 잡고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구를 밑에서 받쳐줄 어떤 다른 힘도 필요하지 않죠.
어느 방향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았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지구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표면은 단순히 매끈하게 덮여 있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수많은 구덩이가 파여 있습니다.
서로 다른 크기와 깊이의 구덩이들이 무수히 존재하죠.
그리고 우리는 그중 하나의 구덩이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당연히 인간은 지구의 표면에 사는 것 같은데
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거대한 구덩이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 바다 아래에 사는 물고기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죠.
바다 아래 사는 물고기는
자신의 위쪽에 보이는 물이 곧 하늘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자신이 사는 바다의 바닥이
곧 지구의 가장 바깥쪽 표면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 물은 진짜 하늘이 아니고
바다의 바닥은 가장 바깥쪽에 땅이 아니죠.
진짜 하늘은 물 위로 머리를 내밀 때 비로소 보이게 되고
그제서야 보이는 땅이 진짜 바깥쪽의 땅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도 물고기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하늘이 진짜 하늘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늘 끝까지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정말로 하늘의 끝까지 올라가서 하늘 밖으로 고개를 내밀게 되면
그곳에 진정한 하늘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거죠.
또한 그곳에서 보이는 땅이 진정한 지구 표면의 땅이고요.
그곳에서 바다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하늘을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하늘 바깥에 펼쳐져 있는 세상이야말로
진짜 지구 표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곳은 신들이 사는 곳이고
본래적인 행복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죠.
그곳에 사는 일부 사람들도
이곳 세상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고
또한 지구의 진짜 겉면은 에테르라고 불리는 신성한 전기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테르가 퇴화해서 만들어진 찌꺼기들이
우리가 사는 구덩이 속으로 흘러드는데
그것이 공기와 물이고
또한 지구의 진짜 겉면은
우리가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색깔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놀랍도록 찬란한 자주, 경이로운 황금빛, 눈보다 더 흰 하얀빛 등
12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땅이 이루어져 있다고 하죠.
우리가 지금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광물들은
저 높은 세계에 있는 아름다운 땅의 파편들이
이곳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에는 많은 구덩이가 있고
각 구덩이의 모양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각기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구덩이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깊은 구덩이는 타르타로스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은 지구 최하층의 감옥과도 같은 것으로
신을 모독하는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죽 고나면
그들의 영혼이 이 타르타로스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패배한 티탄족들이
이곳 타르타로스로 떨어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기도 하죠.
지구에 있는 각 구덩이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고
구덩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강들을 통해 각종 물질이나 생명체들이
구덩이 사이를 오가는 게 가능합니다.
무수히 많은 강 중에서도
지구의 표현과 가장 가까운 곳을 흐르면서도
가장 거대한 강이 오케아노스입니다.
오케아노스는 대양을 뜻하는 Oceanus의 어원이기도 하죠.
또한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강으로 아케론이라는 강의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이 아케론강을 따라서 저승으로 출발을 하게 되죠.
저승으로 가는 길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흐르는 코퀴코스 강도 있으며
물이 아니라 불과 진흙이 흐르는 피리플레게톤이라는 강도 있습니다.
이 피리플레게톤의 지류들이 땅 표현으로 드러난 것이 화산이죠.
또한 가장 잘 알려진 강으로 레테와 스틱스도 있습니다.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기억들을 잃게 된다고 하며
스틱스는 죽은 자의 행선지가 결정되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건너는 강이죠.
이승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영혼을 어떻게 가꿨는지에 따라
죽은 자는 타르타로스로 떨어질 수도 있으며
저승의 왕국에서 살아갈 수 있고
우리가 살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이곳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으로 가서 살게 될 수도 있죠.
이것이 대략 소크라테스가 머릿속에 그렸던 신화적 세계관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계관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비이성적인 상상의 산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해서
지금 이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미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대기를 뚫고 올라가도
아름다운 신들의 세계 같은 건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그곳에는 우주라고 불리는 공간이 펼쳐져 있고
다른 행성들과 별들이 저 멀리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어
바다의 표면과 멀리 보이는 육지를 바라보는 물고기의 처지 불과한 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물고기가 물 위로 고개를 내밀어 바다 위에 모습을 본다고 해도
우주의 모습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주의 모습까지는 대략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지식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과학적 지식은
이 우주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시대를 되돌아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바닷속에 물고기처럼 무지의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마찬가지로 수천 년 후의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면
우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고대 그리스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은
인간의 앎은 한정되어 있고
자연과 세계의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신화적인 믿음을 통해
인간적 지식을 뛰어넘는 영역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감정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과학을 통해 세계의 많은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굳이 신화적인 믿음에 의존할 필요성도 없죠.
하지만 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영역은 여전히 매우 한정적이며
우리는 자연과 세계, 삶과 죽음에 대해 여전히 아주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화적 믿음의 단계로 되돌아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놀라운 규모와 깊이
수많은 비밀 앞에서
인간이라는 한 작은 존재로서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게
지성적으로 더욱 행복한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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