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괴로움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법

Buddhastudy 2024. 8. 19. 19:44

 

 

재난, 갈등, 방황은 대표적인 괴로움이다.

우리는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원망함으로써 심리적 긴급 피난을 한다.

그러나 임시 천막이 집이 될 수는 없다.

오래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수용과 이해와 초월이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

문제를 자기 속에서 찾는 것(이것은 자책이 아니다),

그리고 이해를 통한 초월이다.

걸림돌이라고 생각됐던 일이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오늘은 괴로움에 대한 세 가지 대처 방법에 대해서

부처님이 어떤 얘기를 하셨는지 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대표적으로 얘기한 게 고집멸도의 첫머리가 고잖아요.

괴로움이 많다는 것이죠.

혹은 삶 전체가 괴로움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괴로움

뭐가 탁 가다가 막힐 때

나를 가로막는 것들에 직면할 때 생기죠.

그러니까 가난이라든지, 질병이라든지, 뜻하지 않는 사고라든지

이런 원하지 않았는데 찾아온 거

그다음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갈등이라든지

억울함, 모욕, 굴욕 이런 거

그다음에 내가 계획했던 것이 뜻대로 안 되는 것, 어긋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괴로움이죠.

 

그래서 사실은 살아가면서 괴로움이 많죠.

그리고 어떤 괴로움들은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비틀어버리는

그런 재앙을 겪을 수도 있죠.

 

그래서 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옛날부터

이거를 기도를 해서 제사를 지내서 또 어디 점을 봐서

뭔가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들이 많았지만

그게 다 정신 승리나 위로 정도고

실질적으로 마음이 평안해지냐 하는 거는

다른 얘기였다는 얘기죠.

 

그래서 고등 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런 어떤 빌어서 어떤 그런 것보다는

마음속에서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적으로 보이기에는 불청객처럼 보입니다.

내가 그거 초대한 적이 없어.

근데 나한테 찾아왔잖아.

그러니까 이거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니야.

그건 불청객이야.

밖에서 내게 들어온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두 번째 특징은 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단기적으로는 이걸 몰아낼 수 없으니까, 극복이 안 되니까

단기적으로는 혹은 장기적으로,

어쩌면 인생 내내

이거는 내 앞에 던져진 압도적인 현실이 된다.

그러면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나는 극복보다는 적응을 해야 되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두 가지

내가 청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찾아와서 나의 현실이 되어버린 거

이것이 괴로움이 가진 두 가지 속성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단계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그런 일이 생기면은 비교를 하게 되죠.

 

왜 나만 이러냐?

쟤는 괜찮고, 쟤는 더 잘 되고, 나만 왜 이러냐?

똑같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렇게 해서 제일 먼저 주변을 둘러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좀 빠진다 싶으면 원망을 하게 되죠.

진짜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든지

하여튼 뭔가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 원망은 대상이 크게 세 가지로 갈라집니다.

원망, 나쁜 일을 당해서 괴롭다는 생각이 들 때에

원망할 거리를 찾는 것은

뭐랄까, 심리적인 방어 기제의 초보적인 것일 수 있죠.

왜냐하면 긴급 피난은 되잖아요.

이게 다 뭐 때문이다이렇게 하면

조금 숨 쉴 수 있는 틈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우수한, 멋진 방어 기제는 사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부작용이 있으니까요.

 

어찌 됐건 우리가 뜻하지 않은 재난을 겪으면

우리가 마음속에서 왜 나만이라고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죠.

세상의 불공정함, 세상의 불합리,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원망하는 마음은 리액션으로 이어지는데,

에이, 세상 망해버려라, 전쟁이나 나버려라, 뒤집어 엎어져 버려라

이런 세상을 뒤집는, 불태우는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특정인을 원망하는 것이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그러면 원한이 생기겠죠.

그러면 그다음으로 리액션은 뭐가 있겠습니까?

마음속에서 너 되갚아줄 거야, 복수할 거야, 언젠가는 너도 똑같은 일을 당할 거야.

저주라도 할 거야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게 두 번째 타인을, 사람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될 때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드는 데가

사실은 자기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분리해서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내 니 그렇게 살 때,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탓이다.

이게 좋은 의미의 내 탓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못남, 어리석음, 게으름

이런 것들을 질책하는 겁니다.

 

근데 이 리액션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리액션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자기를 처벌해야 되는 거잖아요.

자기 처벌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책하지 말아야 된다.

자기 연민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의 이유가 뭐냐 하면은

자책을 하게 되면 자기 처벌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처벌은 두 가지로 하는데

-첫 번째는 너는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또 두 번째는 그렇기 때문에 너는 행복하면 안 돼, 이 괴로움 속에 있어야 돼, 고통 속에 있어야 돼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그래야 자기가 느끼는 박탈감 결핍과 나의 행복 사이에 밸런스가 맞아지기 때문에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자신을 파괴하고, 괴롭혀서

그 밸런스를 맞출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원망 중에서도 자기 원망이 가장 좀 위험하다, 나쁘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우울로 가고

자기 자해, 이런 것으로 갈 수도 있겠죠.

여기서 자해라고 하는 것은 신체적인 괴롭힘뿐만 아니라

스스로 삶을 약간 포기해 버리는

이런 것까지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일을 겪었을 때

일단은 그것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원망하는 마음은 반드시 그에 따른 리액션을 가져오고

그 리액션이 매우 파괴적이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잖아요.

그래서 거기까지는 됐는데

하지만 그다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냐? 결과가 뭐냐?

하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원망하면

원망하는 것은 당분간은 멘붕에 빠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원인을 그쪽에 갖다 붙이니까

근데 그걸 계속 갖고 있으면

그거는 오래 없어지지 않는 상처와 같죠.

그리고 그 상처는 계속 커져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를 상기시키지 않으면

지금 나의 괴로움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게 다 이것 때문이야라고 하는 것을 계속 주지시키고

거기에 물을 줘야 되거든요.

그렇게 하면 점점 더 커지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장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헤쳐야 하고

자기 자신을 파괴해야 되고

그다음에 당연히 세상을 해치고 파괴하게 되겠죠.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 삶을 미움, 원망, 파괴적인 행동에 뺏기는 겁니다.

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 내 에너지 이런 중요한 나의 생명인데

나의 생명을 그쪽에다가 뺏기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죠.

 

내가 나중에 그걸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진짜 진짜 미친 짓을 했구나

괴로운 일을 당한 것도 엄청난 재난인데

내가 내 스스로를 거의 파괴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나중에 정신을 차리게 되죠.

 

그리고 이거는 심리적으로 보면 뭐냐 하면

우리는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잖아요.

쓰면 뱉는다는 거, 대단히 중요한 자기방어기제거든요.

 

근데 상처는 쓰라리지 않습니까?

근데 내가 이 상처를 계속 갖고 있으면서

기억하고, 상기하고, 잊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걸 키우는 이거

이거는 뭐냐 하면은

쓰면 뱉는다라고 하는 자기방어기제가 어떻게 됐습니까?

스톱,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단히 위험한 상태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이유가 있겠죠.

그렇게라도 자기를 망가뜨려 가면서까지 해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괴로움하고 밸런스를 맞추면서 살아갈 수 있겠다

이런 거 하고도 상관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절대로 건강한 것이 아니죠.

 

그래서 꼭 부처님이라기보다는

불교에서 어떤 지혜를 제안하는가 하면

단계적으로 내가 어쩔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하면

한 세 가지 정도에 대해서 검토해 보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수용이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해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초월입니다.

 

그 수용하고 이해하고 초월해 봐라

거기에 대해서 검토해 봐라

하는 것이죠.

 

첫 번째는 수용입니다.

수용은 뭐냐 하면

현실을 부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현실을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병으로 가는 고속도로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그걸 인정 못해라고 하면

인지해서 막아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은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거는 그 뒤에 나타나는 과정들은 매우 더 나쁘게 되겠죠.

그래서 이건 정신 이상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우리가 심리적인 단계들이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는 현실부정

이게 사실일 리가 없어, 알아보겠죠.

그다음에 그 사실이 잘 안 움직여지니까

그다음에 분노하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분노하고, 슬퍼하고, 그다음에 타협하고

그러고 나서 아이고 참 인생 참 재미없다라고 우울해지고

이런 심리적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제일 먼저 첫 번째 하는 게 우리가

그럴 리가 있나라고 부정하는 것이거든요.

근데 이것이 오래 가거나 이것이 고질화 되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모든 길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안 좋다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일어난 일은

오케이,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더 좋다. 하는 겁니다.

이게 쉽지는 않지만 생각해 보라 이거죠. 제안이니까

 

두 번째 제안은 뭐냐 하면 [이해]해 보라는 겁니다.

이해해 보라는 겁니다.

보통 이해는 이것이 세상의 어떤 구조적인 모순이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음해하거나 해코지해서 생긴 불행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교가 제안하는 이해하라고 하는 것의 독특한 점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거는 외부에 대한 문제 분석은

과학이나 사회학이나 여러 가지로 잘 되어 있죠.

그렇지만 내면의 분석은

좀 포커스가, 방향이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과적으로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제공자가 나일 수도 있다.

정확하게는 뭐냐 하면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일어나서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그 사건이 나에게 괴로움으로 괴로운 일로 경험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네가 뭔가 세상에 대한 생각과 감정의 잣대가

조금 굴절이 있을 수 있다,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중생은 모두 다 그런 것을

자기만의 굴절률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죠.

 

적어도 어쨌든

세상과 타인에 대한 원망보다는

자기 이해

그중의 핵심이

자기가 세상을 인식하는 굴절, 왜곡, 편견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 행동을 자책하라 하라이런 말이 아니고

내가 사물을 인식하는 구조를 이해하라이런 뜻이거든요.

 

제가 옛날에 길에서 포장마차 하시는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아주머니가 항상 되게 밝고, 명랑하게 일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겨울이나 여름에는 춥고 덥고 하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여기 하나도 힘들지 않다.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다는 거

왜냐하면 나 이거 해서 자식들 다 키웠고

우리 자식들이 다 공부 제대로 하고, 취직해서 지금 반듯하게 살고 있다.

나는 이것, 즉 포장마차를 2030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얼굴이 되게 밝아요.

 

그러니까 내가 어쩌다가 이 먼지 맡아가면서, 손님 상대해 가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포장마차는 하고 있으면서

진짜 내 팔자가 와 이렇노

이렇게 생각 안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똑같은 포장마차

포장마차를 자꾸 들어서 죄송한데

하더라도 그 사람이 포장마차에 대해서 가진 생각 감정이

이것을 괴로움으로 경험하느냐

이것을 감사함으로 경험하느냐를 갈라버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적어도 절반 이상의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이런 측면이 있다.

이거를 이해해 보자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구조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구조적인 나의 인식 체계, 감정 체계를

감정 체계는 뭡니까?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를 구조를 갖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 체계를 이해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조적인 이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러니까 구조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내 마음의 욕망, 내 마음의 분노 이런 것들을 내가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욕망을 불교에서는 탐이라 그러고

분노를 진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욕망이나 분노는 똑같은 표현이 있죠.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 다음에 분노에 눈이 멀어서

즉 뭡니까?

욕망이나 분노라고 하는 한쪽으로 감정이 강하게 움직이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것을 어리석음, 치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탐과 진이 일어나면

치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니까

치가 결과적으로 가장 최종적인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음으로 눈이 멀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판단의 착오가 일어나죠.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하면 행동이 나쁜 결과를 불러오겠죠./

 

그렇게 해서 악순환이 일어난다 하는 것이

우리가 이런 걸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이런 얘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인지 구조가, 우리의 감정 체계가

점점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

이거를 이해하라는 것이죠.

 

그러지 마라거나, ‘그러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걸 정확하게 보게 되면

이거 진짜 큰일 나겠네이런 상태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거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thinking이 아니고 see 보게 된다, 봐라

이런 뜻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이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어떤 삶을

가로막는 방해물이고 좌절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되면

그게 현대 용어로는 스트레스고

옛날 용어로는 괴로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걸 다 악이다, 나를 가로막는 악이다

이렇게 악으로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한탄하거나 원망하는 식으로 흐르게 되고

아까 얘기한 구조적으로 이해하라는 얘기는

이게 이런 식으로 되는 거구나.”

그래서 한탄하고 원망하게 되면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겠구나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을

이거 진짜 심각하네라고 절박하게 느끼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가 올바른 행동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탐심과 진심,

즉 욕망과 분노가 일으키는 결과들을 보게 되면, 인식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욕망과 분노라고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욕망과 분노를 싫어하면서 그 욕망과 분노에서 떠나게 되고

그러므로 해서 욕망과 분노라고 하는

욕망의 좌절이 분노니까요.

같은 얘기거든요. 사실은

 

그래서 욕망과 욕망의 좌절이 일으키는 분노라고 하면 이런 감정에서

떠난 거, 풀려난 거

이거를 불교적으로는 해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해탈이 엄청난 사건이 아니고

이 욕망의 좌절로 인한 분노가

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거구나라고 하는 것을

내가 인식하는 순간에

나는 그걸 멈추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게 된다 하는 것이

해탈의

해탈이라고 하는 게 풀려난다는 뜻 아닙니까?

그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수용]하라

-그래야 문제 해결의 길이 보인다.

두 번째 구조적으로 [이해]하라 하는 거고

그 위험성을 알면 멈추게 된다는 거고요.

-세 번째 있는 것이 [초월]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 승리를 하라 하는 이 당연히 아니겠죠.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간 매개체로 연기법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는데

하나는 인과론이잖아요.

이렇기 때문에 저렇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모르긴 몰라도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해서 최종적으로 나타난 것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

우선 뭔가 다 이해는 못 해도

이게 어떤 특정한 조건들의 결합으로 인한 결과다라고 하면

좀 누그러지는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나아가서 인과론이 아니고

이것저것 법칙이라고 하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대칭성에 관한 것이죠.

 

아까 그 괴로움은 어떻게 생기냐면 욕망의 좌절에서 생기거든요.

분노라고 하는 것은 욕망이 없으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면 분노가 생기지 않을 거 아닙니까?

항상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함께 생겨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욕망이 있으면 욕망의 좌절, 분노도 함께 생겨난다.

그다음에 그러면 욕망이 없으면 욕망의 좌절인 분노는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소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연기법의 두 번째

이것저것 법칙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좀 생각해 봐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괴롭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라는 거죠.

그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어요.

 

뭘 할 때도 건성으로 하고

그 생각에 사로잡혀 붙잡고 있다라고도 할 수 있고

사로잡혀 있다, 수동태로 표현할 수도 있어

어쨌든 그게 내 삶을 장악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부자연스러운 것이죠.

이런 상태를 좀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어떤 것을 딱 붙잡고 있다는 얘기는

다른 것을 밀어내고 있다는 거거든요.

나는 이게 좋아” “저건 싫어

그러니까 애라고 하는데, 십이연기 중에 애라고 하는 게 촉--애잖아요.

애라고 하는 게

어떤 걸 좋아하고 좋아하는 걸 반드시 싫어하는 것도 있겠죠.

그래서 애와 오가 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좋아하고 이것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붙잡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고

이것이 내적인 투쟁이죠.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인데

그럼 이 문제는 왜 생긴 거냐?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이야기해

무명

근본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생긴다는 거잖아요.

 

어리석음의 내용이 뭐냐?

뭐가 어리석다는 거냐?

/이것과 저것이 똑같다라고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죠./

 

이것이 저것보다 더 좋다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이걸 잡으려고 하고 저것을 밀어내려고 하겠죠.

더 좋은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인데

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근본 무명,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 최고의 깨달음은 무상정득정각 아닙니까?

그래서 정등, 다 똑같다는 것이죠. 차별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차별하는 모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적 기능이 차별, 구분이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생각하지 마라, 분별하지 마라

뭐 이런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래서 다 똑같은 게 아니고

이것보다 저것이 더 좋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생각은 구분하는 속성을 내재화해서 갖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구분하게 된다, 이렇게 되고

그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세 번째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에서 넘어서 보라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다.

세상에는 좋고 나쁜 게 없고

그냥 팩트만 있다.

그리고 이건 좋은 거다, 이건 나쁜 거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나의 마음의 굴절률에 존재하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아프다,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면

그 자체는 불행이지만

또 변방에 징집 당해서 군대에 가야 되는데

다리가 부러져서 군대에 못 갔다.

그럼 그것도 그게 괴로움 아니고 기쁜, 좋은 일일 수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고

내 판단과 기준과 나의 호오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그걸 우리는 절대시하는데

그게 상당 부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식과 태도에 달려 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과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이런 것이다.

 

우리는 전부 돈, 그다음에 지위, 명예, 사회적 명망,

그다음에 라이프 첸스, 삶의 기회

이런 것들이라고 선망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그게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게 있다라고 섬씽 스페셜이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근본 문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수용과 이해와 초월에 대해서

불교는 제안하는 것이고

이런 것들은 현실에서 어떻게 보면

불굴의 의지로 와신상담하면서 문제를 극복하고

찬란한 어떤 서사시를 써나가는 영웅적인 스토리는 아니죠.

 

그래서 불교가 어떻게 보면

좀 찌그러져 있는

그렇게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는 것이지만

어찌 됐든 지금 괴롭다면

-수용해 보라,

-그다음에 구조적으로 이해해 보라.

-그리고 연기법을 가지고 초월해 보라라고 하는

세 가지를 얘기하고 있고

그 세 가지는 사실 알다시피

이렇게 서로 분리하기가 어렵게 엮여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 됐든 시작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하는 겁니다.

오케이 그렇게,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나에게.

오케이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괴로움에 대한 세 가지 대처 방법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