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 얘기를 합니다. 비구들이여. 딱~ 5명이에요. 다섯 명한테서 시작한 게 지금 전 세계적으로 큰 학원이 됐죠. 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색은 영원하냐? 색수상행식. 오온을 물어봐요. 자~ 요 물어본 게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가 제일 질문 많이 받는 게 하나가 제법무아인데, 니르바나도 법 아닙니까? 무위법도 법 아닙니까? 요것도 무아 아닙니까? 이분들은 뭘 착각을 하냐하면요, 이 번역이 좀 애매하게 되어서 일어나는 착각이에요. 무아라는 거는 아트만이 아니라 즉, 나라는 게 원래 원문은 ‘내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非我비아가 맞는데, 이걸 無我무아라고 번역을 해 놓으니까 나라는 건 애초에 나라는 실체는 없다. 영원히.
아트만을 반대한다. 나라는 건 아예 없다. 요렇게 번역이 되다 보니까 제법무아인데 제법엔 열반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럴싸해요. 이게 왜 엉터리 얘기냐하면요, 이건 뭐 반박할 가치도 없는 엉터리 얘기에요. 그런데 이런 말이 자꾸 어떤 좀, 그 좀 알만한 분들 사이에서 자꾸 얘기가 되니까. 제법무아라고 번역해 놓고, 이 법에는 무위법도 들어가니까 열반도 들어간다고 해버리면, 요게 전혀 코미디 얘기냐 하면, 부처님은 한 번도 제법 얘기할 때 열반을 넣은 적 없습니다. 불경 다 뒤져보세요.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이 열반을 무위법이라고 분류한 거는 훨씬 뒤에 부파불교에서 한 일이에요. 열반도 하나의 법으로. 분명히. 사법인 중에 하나니까요.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히 제법무아 제행무상 얘기할 때는요, 오온만 가지고 얘기해요. 절대 니르바나까지 얘기가 뻗어나가지를 않아요. 그리고 두 번째 절대 이 무아는요, 모든 법에 니르바나까지 포함해서 모든 법에 나라고 하는 건 애초에 전혀 없다. 이런 얘기 한 적이 없으세요. 요거는 비아라는 뜻이에요. 철저히. 오온은 내가 아니라는 얘기만 계속 하셨어요. 자~ 보세요. 그 증거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제가 요거를 한번 소개해 드리려고 뽑았습니다. “색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을 인정했죠. 자~ 제자들이 정확하게 인정을 합니다. 무상은 색은 무상합니다.
두 번째, “무상한 거는 괴롭냐? 즐겁냐?” 무상하니까 괴롭다는 겁니다. 괴롭다는 근거도 분명하죠. 무상하니까 괴롭다는 거예요. 고놈이 자꾸 나를 괴롭히는, 와서 괴롭히고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무상하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거는 반드시 변해버리니까. 괴롭죠.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두고, 내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자아이다라고 하면 옳은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자~ 요게 지금 나머지 수상행식에 대해서 동일한 법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해되시죠?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무상하니까. 제법무아에 니르바나가 끼지를 않아요. 두 번째 보세요. 또 한 번 다시 얘기합니다.
어떤 색이든 그건 과거의 거든 미래의 거든 색수상행식 중에서요, 색은 미래 것이 건 현재 것이건 안에 있건 겉에 있고 거칠건 섬세하건 열등하건 뛰어나건 멀건 가깝건 모든 색이란 놈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하고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된다라고 얘기를 또 수상행식에 걸쳐서 또 지루하게 얘기를 하십니다. 자~ 세 번째, 비구들이여 이처럼 보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자~ 여기까지가 중요해요. 자~ 무상고 무아를 알았다고 해서 해탈이 온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니르바나에 들어가야 해탈이 되잖아요. 요걸 분명히 하십니다. 무상고 무아를 알았다면 색을 싫어하여 떠나고, 반드시 싫어해서 버려야 해탈이 와요.
아까 호흡 16법 중에 마지막에 했었죠. 호흡이라는 거를 버렸죠. 여러분이 내려놓음. 집착을 소멸시키고 버렸어요. 오온을 버려야 됩니다. 수를 싫어하여 떠나고 상을 싫어하고 떠나고 행을 싫어하여 떠나고 식별을 싫어하여 떠나면, 떠나서 집착이 소멸함에 해탈한다. 아까 여러분이 해탈을 체험하신 거예요. 그렇죠? 이렇게 해탈하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나는 해탈했다.” 즉 보십시오. 여기도. 나는 해탈했다. 그러면 해탈한 나가 있죠. 나가 있어요. 이 나가 진아라는 거예요. 왜냐? 열반도 내 마음이니까요. 해탈한 내가 있어요. 해탈한 마음이 있어요. 나라고 하면 또 오해가 생기니까 해탈한 마음이 여러분한테 있어요.
그거를 나라고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고, 본래 면목이라 하는 겁니다. 열반은 실체입니다. 열반이 실체가 아니라는 둥, 열반은 의식이 아니라는 둥, 도대체 그럼 뭐로 무의식 상태입니까? 기절을 하셔야 해탈하나요? 해탈하려면 한 대씩 맞고 쓰러져서 “어, 정신을 잃었습니다.”이게 해탈인가요. 이런 게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색수상행식이 무상고 무아인줄 알고 버리는 사람 마음에만 일어납니다. 이해되시죠? 자~ 이렇게 해서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기고요,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을 이루어졌다. 누구한테요? 나한테요. 그 마음에 이루어진 거예요. 그분 마음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온을 버렸기 때문에. 나는 오온이 윤회하는 거기 때문에 나는 윤회를 초월했다. 이 말이 나오는 겁니다. 예. 그런데 대승은 그게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고 그 오온이 어디 가는 거 아니라고 입장을 펴는 겁니다. 이게 뭔 얘기냐 하면 반야심경에서 첫말에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주장하는 이유에요. 요게 소승 주장을 뒤엎는 거예요. 색이 공하다라고만 알았느냐? 아니다. 공이 곧 다시 색이다. 즉 니르바나를 여러분이 니르바나에서 떠날 수 없다면, 니르바나는 내거죠. 니르바나에 존재하는 한은 색수상행식도 같이 일어난다라는 걸 주장하는 겁니다.
대승은요, 색수상행식 자체도 청정하다고 봐요. 니르바나에서 나타나는 거기 때문에 여러분의 순수한 니르바나, 순수한 알아차림에 의존해서 색수상행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도 결국은 바다가 청정하면 파도도 청정하는 입장을 반야심경이 주장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색수상행식에서 떠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게 대승이에요. 그럼 뭐 해야 될까요? 색으로. 좋은 여래의 몸을 만들고, 수로 여래의 자비심을 만들고, 상으로 여래의 지혜를 만들고, 행으로 대원을 세우고, 식으로 지혜를 얻는 겁니다. 이게 여래에요. 대승에서 생각하는 여래에요. 그래서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 나와요. 니르바나에 들어가지를 않아요.
들어갈 수도 없어요. 대승에서는. 부처님 생각이랑 틀려요. 석가모니 생각이랑 대승은 전혀 다릅니다. 대승은 더 나갔어요. 석가모니는 그래도 법구경 숫타니파타 보면 열반에 들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대승은요, 열반에 들지 않는 부처나 보살을 이상형으로 세워야 되니까, 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이라는 기존 불교에 없던 분을 세운 거예요. 그분들은요, 니르바나에 들어가지를 않아요. 더 좋은 색, 더 좋은 수, 더 좋은 상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러 다녀요.
'윤홍식 > 윤홍식_즉문즉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87. 사랑이란_윤홍식 (0) | 2014.01.26 |
---|---|
86. 초기불교의 핵심 - 오온(五蘊)이란_윤홍식 (0) | 2014.01.19 |
84. 창조성을 끌어내는 비결_윤홍식 (0) | 2014.01.12 |
83. 수운 최제우의 좌잠(座箴)-윤홍식 (0) | 2014.01.05 |
82. 윤홍식의 즉문즉설 - 양심과 유사한 양심(문화, 인습)과의 구분은 (0) | 2013.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