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맹인들이 사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시력이 없는 그들은 평생 상상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런 처지를 비관한 사람들은 어떡하든 눈을 뜨기 위해
소위 말하는 수행이란 것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십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눈을 떴다고 정평이 나 있는 A라는 수행자가
앞마당을 서성이면서 뭔가 고심에 찬 표정을 잔뜩 짓고 있었습니다.
“내가 작고하신 D대사님으로부터 눈을 떴다고 인가를 받은 지가
어언 200년이나 지났군.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인가를 해준 제자도 하나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야.”
수행승 A는 법통을 전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안색이 어두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B라는 제자가 매우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A를 찾아왔습니다.
“스승님, 제가 수행 중에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긴 코와 나풀거리는 귀까지 상세히 보았습니다”
”코끼리의 코가 어느 정도의 길이더냐?“
”양팔을 벌린 것보다 조금 더 길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코끼리의 꼬리도 보았느냐?“
”네, 그것도 봤습니다.
꼬리가 한 아름이나 되는 엉덩이를 타고 내려와
마치 진동 추처럼 좌우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스승인 A는 코끼리에 대해 몇 차례 더 물어보고는
B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기특하도다, 내가 법통을 잇지 못하고 입적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년에 눈을 뜬 제자를 얻게 되다니“
A와 B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제의 깊은 정을 나누었습니다.
해가 서산에 떨어질 무렵이 돼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먼저 A는 주변을 더듬거려 간신히 지팡이를 찾아냈습니다.
B는 아직 정신이 덜 돌아왔는지 문지방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조심해서 마당에 내려온 A와 B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대문을 나섰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상쾌한 바람이 쌕쌕 불어오고 새소리도 청명하게 들려옵니다.
A는 숨을 한껏 들이쉰 뒤에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돈오점수가 아니더냐.
이제 눈을 떴으니 전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시기할 수 있으니 때가 되기 전엔 법통을 이었다는 말은
절대 삼가도록 하여라“
A는 자신의 법통이 B에게 전수됐음을 다시 한 번 천명했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B의 가냘픈 눈매에서 비장한 결의 같은 것이 번득였습니다.
자신이 눈을 떴다는 사실을 인가해 준 스승님이 너무나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론 이렇게 귀중한 법을 후대에 전할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A와 B는 지팡이를 열심히 더듬어 돌부리나 나뭇가지를 피해 오솔길로 접어들었고
서산의 붉은 노을은 물감처럼 번지며 땅거미 속으로 감겨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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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맹인 세상에서 펼쳐지는 법통에 관한 얘기입니다.
눈을 뜬 사람이 없다면 어떤 상태가 눈을 뜬 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설령 눈을 뜬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다른 맹인들은 그 사람이 눈을 정말로 떴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종의 테스트를 거쳐 눈을 뜬 사실을 확인하는 이상한 풍습이 생겨난 것입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맹인 수행자들의 법통은 기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뜬 것을 심사해서 인증해 준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 같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러니 깨달았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던가요?
이처럼 법통을 바통처럼 전달하는 문화는
달마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육조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목면가사를 전해 받아
법통을 잇게 되면서는 고질적인 문화로 정착됩니다.
이는 마치 선왕으로부터 옥쇄를 받아야 왕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오랜 세월에 걸쳐 법통의 족보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계보를 이으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깨달음의 인가는
어쩔 수 없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깨달음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
수행승들이 너나할 것 없이 깨달았다고 외칠 수 있고
그러면 불교가 시장바닥처럼 매우 혼란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법통을 세워 질서를 잡고, 조직을 강건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할까요?
맹인이 눈을 떴을 때 그것을 누구에게 인가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눈을 떴는지에 대한 여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맹인 수행자들은 눈을 뜨는 것보다는
눈을 떴다는 평가를 받는 것에 집착했고
그래서 앞의 일화와 같은 희극이 펼쳐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수행자들 역시
붓다가 되려는 목적보다는 깨달음을 인가받아 존재감을 한껏 높이는 데에 주안을 둡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가 제도라는 이상한 풍습을 고집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수행이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일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비롯해 불법과 여타 사상들은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군집일 따름입니다.
그런 정보 따위에 연연하거나 휘청거리면 수행의 중심을 잡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들이 인가를 받고 법통을 이으려는 것은
어떤 권위에 의지해 깨달음을 뽐내녀는 아상에 불과합니다.
법통은 이미 당신 마음속에 있고
그래서 인가는 당신 스스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닫는 건 남이 해줄 수 없으니까요.
싯다르타가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 인가해 법통을 세운 것처럼
수행의 세계는 절대적으로 홀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이지요.
당신은 아직도 깨달음을 인가 받아 법통을 잇기를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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