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컴퓨터 프로그램이 만든 가상공간에 익숙해져 갑니다.
특히 게임 속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얼마 뒤엔 인간의 뇌 속에 칩을 심어 현실 같은 영상을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
게임에 몰입하게 되면 누구나 레벨에 목숨을 겁니다.
레벨이 높을수록 파워가 증강해 더 많은 권력과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게임 속에서 전투만 하는 부류 외에 수행자 그룹도 있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요?
게임 속 수행자들의 목적은 당연히 게임에서 탈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떡하든 게임을 로그아웃 하든지
아니면 아예 컴퓨터 전원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레벨을 최상승으로 높이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어떤 수행자는 일반 게이머들이 쓸 수 없는 능력을 다양하게 구사합니다.
게이머들의 과거의 이력을 알 수 있는 능력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게이머가 장차 구사하려는 전략도 간파합니다.
어떤 때는 공간을 비틀어서 게이머들의 공격도 막아내고
가끔은 다른 방에 있는 상위 레벨의 게이머를 불러들여 전투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게임 세계의 수행자들이 이런 능력을 자유자재로 행사하면
다들 우러러보며 경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탁월한 능력과 게임에서 탈출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
자, 이제 현실세계로 돌아옵시다.
우리가 사는 곳을 불교에서는 “윤회로 얼룩진 고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어떡하든 윤회를 끊어 탈출하려 합니다.
온전히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만 유효합니다.
첫 번째는 생각을 로그아웃하는 방법으로 ‘그냥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삼라만상이 부팅된 시점을 찾아 전원을 꺼 버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1원인’을 찾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풀어야
우리는 차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이 두 가지 방법을 외면하고 현실 세계에서의 레벨을 높이려고 합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능력을 얻어 자신의 레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신통력입니다.
신통력이란 신神과의 정보 교류를 통해 얻어지는 특별한 능력을 총칭합니다.
사실 신통력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드뭅니다.
이것이 얼마나 매력적이면 사탄이라고 담을 쌓던 교인들마저도 점집을 찾으니까요.
신통력은 무속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커다란 위치를 차지합니다.
어느 스님이 신통력이라도 좀 부릴 줄 알면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리게 됩니다.
이렇게 신통력은 대중의 인기가 높아
깨달음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가령 사명대사가 신통력을 부린 일화는
그를 어떤 검증도 없이 깨달음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달마대사의 신통력이 꽤 유명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역시 세존만 한 신통력도 없습니다.
<불본행집경>에 보면 세존은 스스로 닦아 얻게 된 신통력으로
외도들을 굴복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붓다에 대해 신심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이 주로 구사하는 신통력은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이라고 하니 신통력의 대가인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이렇게 신통력이 깨달음의 조건처럼 여겨지다 보니
타 종교와의 신통력 경쟁도 치열합니다.
예수가 떡 7개와 생선 2마리로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고 하자
세존은 자신의 밥 한 그릇으로 500여 명의 비구를 먹이고도 밥이 남았다고 대응합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신통력 대결을 통해 세존이 예수보다 한 수 위라고 주장합니다.
이러다보니 수행자들이나 신자들은
신통력에 대한 집착이 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찰마다 산신각을 짓고 그 안에 신통력의 1인자라는 나반존자를 모셔 놓은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신통을 하기 위해 산신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힌두교의 차크라 수련이나
선도의 기 수련을 통해 유체이탈을 배우기도 합니다.
심지어 도교에서 행해지는 육경신통을 시도하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티벳 밀교에서 송과체를 자극해 영안을 여는 수행을 행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에 있어서
신통력은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통력은 앞서 말한 게임의 세계에서 더 높은 레벨의 능력을 구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그아웃하거나 전원을 끊어버리는 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그 정도면 다행인 것이 오히려 수행에 역행해서 더 높은 아상과 집착에 빠져버립니다.
한마디로 신통력의 대부분은 깨달음의 반비례하는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물론 혹자는 신통력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깨달은 뒤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망자들과 소통하고 사자들의 힘을 빌려 모종의 능력을 구사하는 것이
왜 깨달음의 증거여야 할까요?
물론 산신을 부리고 더 높은 천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법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세계는 법력만 높다고 신들이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세계처럼 친분 관계가 더 중요하고
그렇기에 신통력과 법력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신통력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 현실세계의 난제를 푸는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과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수학의 미분 적분을 풀고,
더 나아가 리만가설을 해결하라고 하면 어떨까요?
내친김에 오늘날 현대물리학의 난제들도 한꺼번에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물론 모든 불치병의 치료제도 서비스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더 좋겠고요.
제아무리 뛰어난 신통력을 구사해도
인간의 역사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발휘됩니다.
그래서 점술에 의지한 정치의 결말은 늘 패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 와서는
신통력이라는 건 돈이 부리는 능력에 비하면
그저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돈이 제갈량이라고 모든 능력과 술수는 재력이 만들어내니까요.
그러니 이제 신통력에 대한 환상을 깰 때도 되지 않았나요?
대저 신통이란 차원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다 다양한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무인도에 갇혀 살던 부족이 경계를 틔어 다른 나라와 교류하면
그만큼 얻어지는 정보가 많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통이 열리면 또 다른 차원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신통력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신통력에 집착해 이것을 깨달음에 연관 짓는다면
수행은 오히려 거꾸로 가게 됩니다.
혹부리영감처럼 혹 하나를 떼려다가
훨씬 많은 혹을 붙이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비한 현상이나 체험, 남 모르는 비법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모든 것을 정보로 치환하여 무소의 뿔처럼 홀로 나가야 합니다.
지금도 당신의 시선을 끌어당기기 위해
오묘하고 신비로운 상품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독버섯 같은 화려함에 한눈을 팔지 않을 자신이 있으신가요?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명상, meditation 그리고 참선 (0) | 2022.02.21 |
---|---|
[Danye Sophia] 깨달음(견성)의 인가! 한국불교의 오래된 병폐인 이유 (0) | 2022.02.17 |
현덕마음공부_ 감정조절을 위해 전두엽을 강화하는 방법 (0) | 2022.02.15 |
현덕마음공부_ 치유를 위한 자기표현 (0) | 2022.02.14 |
[Danye Sophia] 괴로움을 없애려고 수행한다고? 수행의 방향이 틀어진 근본적 이유! (0) | 2022.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