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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 (1) 동호 두뭇개

Buddhastudy 2021. 11. 10. 19:25

 

 

 

 

세종 1, 한강 동호 두뭇개에서

대마도 정벌군 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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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1(1419) 518

세종과 상왕 태종이 도성 밖 동남쪽 5리 거리에 있는 동호 두뭇개에서

이종무 장군을 사령관(삼군도체찰사)으로 임명하고

대마도 정벌군의 여덟 장수와 병사들을 전송했다.

 

당시 군권을 쥐고 있던 태종이 장수와 군관들에게

활과 화살을 내리고, 환관에 명하여 술을 치게 했다.

현재 옥수역 인근이 두뭇개이다.

두뭇개는 두 물이 만나는 곳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1389(고려 창왕 1) 1월 박위 장군의 1차 대마도 정벌,

1396(태조5) 12월 김시형 장군의 2차 대마도 정벌에 이은 제3차 대마도 정벌이다.

 

태종과 세종의 명을 받든 이종무 장군을 전함을 타고 서해를 거쳐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에 도착한 후

대기 중이던 병선 227, 병사 17000명을 지휘하여 대마도를 정벌했다.

왜국은 큐슈의 제후들을 동원해 대마도 방어진에 나섰다.

 

조선 원정군은 620일 대마도에 상륙하여 첫 전투를 벌였다.

629일까지 왜군을 크게 무찌른 후 71일 거제도로 귀환했다.

기해년의 정벌이라하여 기해동정으로 불린다.

기해동정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양국의 평화적 왕래가 이뤄지게 되었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의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평 두물머리에서 합쳐진 후 서해로 흐르는 한강은 조선의 젓줄이다.

수많은 배들이 한강을 타고 한양 남쪽 포구로 몰려들었다.

 

우리 선조들은 용산 지역의 한강을 남호, 마포 지역의 한강을 서호로 불렀고

중량천과 한강이 만나는 두뭇개 지역의 한강을 동호로 불렀다.

동호 두뭇개에는 한강을 대표하는 포구가 조성되어 수상 운송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두뭇개는 주로 한강 상류의 강원도와 경상도 내륙의 생산물이 집결하는 곳이었다.

 

동호는 특히 풍광이 아름다웠다.

중량천이 한강과 합수되는 곳이라 강폭이 한양도성 인근의 한강 중에서 가장 넓었다.

사시사철 물결이 푸르고 잔잔했다.

두뭇개에는 한강 상류와 중량천에서 흘러내려오는 모래들이 퇴적된 모래섬인 저자도가 있었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저자도는

1970년대 초반까지 존재하던 한강섬이었다.

 

하지만 저자도는 박정희정권이 강남개발에 필요한 모래를 채취하면서 긁어가버려

사라진 섬이 되었다.

다만 지금도 가만히 두면 퇴적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수십 년 후에는 저자도가 부활할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권문 세도가들이 동호와 저자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놓칠 리 없었다.

조선의 이름깨나 날린 사대부들이 두뭇개 인근에 정자와 집을 짓고 동호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폭군 연산은 황화정을 지어 연회를 즐겼으며

중종 시대 권세가 김안로는 보락당이라는 호화저택을 지어 풍광을 즐겼다.

 

한강의 남쪽에 정자를 지어 풍광을 즐긴 사대부도 있었다.

세조의 책사 한명회는 두뭇개 남쪽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어

한양도성과 삼각산 도봉산을 느긋이 조망하며 노후에 권력을 즐겼다.

현대아파트로 상징되는 강남 부촌의 기원이 되는 압구정은 그런 연원이 있다.

 

 

동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왕과 권문세도가 독점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청년 사대부의 학문 연마를 위한 공부장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세종은 1426년부터 문재가 뛰어난 청년 사대부에게 휴가를 주어

공부에 전념토록 사가독서제를 시행했다.

과거 급제한 문신들 중 문재가 뛰어난 자를 선발해 유급휴가를 주는 제도였다.

제도 시행 초기 사대부는 자신의 집에서 독서휴가를 보냈다.

 

1442년 세종은 성삼문 신숙주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독서휴가를 명하면서

현재 구파발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진관사를 공부방으로 내주었다.

독서당의 시작이다.

 

유교 사대부가 절에서 공부한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성종 23(1492) 용산에 남호독서당을 열었다.

연간군은 1504년 갑자사화 이후 남호독서당을 폐쇄했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후 왕위에 오른 중종은

1507년 동대문 인근의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을 독서당으로 삼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이곳은 번화한 곳이라 한적한 곳에 독서당을 개설하기로 하였고

중종은 1517년 두뭇개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을 설치했다.

 

현재 지하철 옥수역 6번 출구 극동아파트 정문(옥수동 428)에 동호독서당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가독서제는 세종부터 숙종까지 48회에 걸쳐 320명의 젊은 사대부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사가문신은 사대부의 큰 영예였다.

학문이 높은 사대부가 주고 임명되는 대제학엔 대개 사가문신 출신 사대부의 몫이었다.

사가문신의 대표적인 인물은 성삼문, 율곡 이이 등이다.

 

# 한강걷기 추천: 옥수여 세빛둥둥섬 (거리 5km)

지하철 옥수역에서 내려 한강둔치에 진입한 후

둔치길을 따라 잠수교를 건너

반포대교(잠수교) 남단 세빛둥둥섬에 도착하는 한강걷기 길이다.

이 길의 특징은 강변북로의 고가도로가 둔치길에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한여름철 걷기에 좋은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