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반야3] 은사 불심도문 스님의 반야지혜, 진짜를 보는 지혜,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

Buddhastudy 2023. 6. 26. 18:24

 

 

 

지난번, 마하에 대해서

반야심경의 첫 제목, 첫 글자죠.

마하에 대한 설명을 좀 드렸었고요

거기에 대해서 잠깐 좀 정리를 하면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반야심경의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 심경]인데요

크나큰 지혜로써 그 바라밀다하는

즉 바라밀다라는 것은

이 차안에서 저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즉 이 중생의 세계에서 저 깨달음의 세계로

이렇게 건너간다는 어떤 방편을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중생의 언덕에 있는 우리가

저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가는 어떤 반야의 지혜

그 핵심만을 설한 경전이 이 반야심경이라고 했고요.

 

[바라밀]이라는 방편은

여기서 저기로 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가지 않습니다.

 

가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이 중생이 부처로 간다라는 방편을 썼지만

사실은 이대로가 그 완성되어 있다.

혹은 뭐 제법이 실상이다, 촉목보리(觸目菩提,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깨달음이다)이다.

이런 표현에서 보듯이

 

자신의 본래면목,

우리 선에서는 본래면목, 자성, 본성 이런 표현을 쓰는데요

진정한 자기라고도 할 수 있고요

혹은 이걸 마음이라고도 표현을 해요.

 

마음을 안 쓰고 사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자기가 본래부터 이미 갖추고 있고 본래 쓰고 있던 자기의 본래성품

본래부터 있던 거라는 거죠.

본래부터 있던 것일 뿐 아니라 자기의 살림살이에요.

집에 살림살이 같은 가재도구가 없으면

밥도 해 먹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살림살이를 가지고 우린 지금까지 내 인생을 살아왔단 말이에요.

인생을 살았다라는 것은

자기 살림살이가 있다는 얘기란 말이죠

 

즉 이 법이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면목이라는 것은

누구나 각자 자기가 이미 쓰고 있는 자기의 살림살이란 말이에요.

자기에게 구족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원만구족이라고 합니다.

 

이미 부처님만 원만구족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본래 원만구족이라는 거죠.

 

그런데 다만 우리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오랜 습, 업습, 분별의 습관 때문에

분별심이라고 하는 분별의 습관을 가지고만 현실을 해석하고 판단하면서 살아왔다 보니까

분별밖에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별 이전에 이 무분별지라는 이 반야지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죠.

근데 또 사실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기에는 또 어려워요.

늘 이걸 쓰고 있으니까.

 

근데 이 반야심경에서는

이 마음, ,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본성이라고 하는 이 자리에 대해서

첫 글자부터 끊임없이 힌트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게 반야심경 공부를 하면서

마치 우리가 스무고개 게임을 하듯이

스무고개 할 때는 저 사람은 뭔지 아는데 나는 몰라요.

내가 질문을 하면 저 사람이 맞다 틀리다 이렇게 얘기를 해주거나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즉 힌트를 하나씩 주면

우리는 힌트를 하나씩 좁혀가면서

거기에 대해서 결국에 가서는

. 이거구나하고 스무고개 할 때 보면

어떤 사람은 10고개 15고개 쯤 됐을 때 힌트를 딱 내자마자

15고개까지는 죽어도 몰랐는데

그거 16번째 힌트를 하나 딱 주자마자 문득 알아차리잖아요.

그래서 알았다하고 이거다하고 이렇게 답을 하잖아요.

 

15번째 고개까지 오면서 축적되는 것이 있지만

이걸 문득 아는 것은 단박이란 말이에요, 단박.

선에서도 돈오라는 표현을 쓰죠.

 

반야심경의 여행에서는

끊임없이 마음이 무엇인지 힌트를 주고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힌트를 듣고 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걸 머리로 헤아려서 알려고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아까 20고개는 힌트를 조합하고, 짜 맞추어서, 점점 지식을 짜 맞추어서

조각 퍼즐을 맞추는 거란 말이죠.

분별이 하는 일이란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 그 어떤 학문, 종교, 사상, 철학, 과학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분별을 가지고

원인을 제공해서 결과를 얻는 것

공부해서 지식을 얻거나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고

열심히 만들어서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이 인과적인, 유의 조작의 방식이란 말이죠.

 

근데 딱 하나

이 세상천지에 이 딱 하나

이 법 하나만은, 자기를 깨닫는 이 소식만은

이걸 그래서 출세간이라고 합니다.

세간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불교공부 있잖아요, 마음공부, 이 불교 깨달음 공부

이거 하나는요

타고난 자질이 필요가 없는 공부예요.

머리가 좀 타고나야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잖아요.

운동신경이 좀 있어야 그 운동을 통해서 거기서 금메달을 딸 수 있거든요.

 

이 공부는 놀랍게도

공부를 많이 했다고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

똑똑하다고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오래 앉아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더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을 빨리 쉴 수 있어야 해요.

근데 우리는 한 번도 분별을 쉬어보지 못했단 말이죠.

 

그래서 이 공부는 누구나 다 가능한 공부다.

딱하나 이 공부만 그래요.

? 자기가 늘 쓰고 있는 걸 그냥 확인하는 거니까.

이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전부 다 부처를 이미 쓰고 있는 거예요.

자질이 100% 갖추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힌트가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이 힌트에서 내가 탁 알아차릴 수도 있단 말이에요.

법의 성품을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 가능성은 안고 법문을 들어야 하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머리로 알려고 헤아리고 판단하고 분별해서 이해해서

이해하다가 어느 날 탁 알게 될 순 없습니다.

그럼, 분별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가슴이 답답한

내가 저게 뭔지를 알고 싶다

마음이 뭔지를 내가 정말 확인하고 싶다

그런데 머리로는 안 되고 방법을 써서도 안 되니까

이거 인과적인 유의 조작이 아니니까 무위법이니까

방법으로 안 된다 하니까

답답하고 갑갑해서 뭔가 꽉 막힌단 말이죠.

그게 화두가 저절로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초기 조사선의 스승들은

법문을 통해서 저절로 화두가 딱 동반되도록

화두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 진실이 뭔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이렇게 샘솟도록 이끌어 준단 말이죠.

그게 선의 법문입니다.

 

그래서 선법문을 바르게 듣기만 해도 언하대오라고 해서

말끝에 깨닫는 일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던 것이

선의 황금기라고 불리고 있는

당나라 그 선의 황금기 때의 실질적인 현상이었어요.

깨달음이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현상들이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지난번에 나온 게 첫 번째 힌트였어요.

그게 바로 마하의 힌트였습니다.

마하의 힌트에서는 두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줬다고 했어요.

 

첫 번째는 이것은 마하, 크다라고 했는데

이게 우리 말뜻을 따라가면 큰 지혜니까

작은 지혜가 아니고 큰 지혜구나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 법의 안목에서 본다면

마하가 바로 이 법을 설하고 있는 거예요.

반야가 법을 설하고 있고

바라밀다가 법을 드러내고 있고

심이 법을 드러내고 있고

경이 법을 드러내고 있어요.

다 이 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힌트란 말이죠.

이 법의 특성이 바로 [마하]입니다

크다란 말이에요, 크다.

 

근데 그것은 상대적으로 큰 게 아니에요.

상대적으로 큰 것은 분별의 길이잖아요.

작은 거에 비해서 크다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이것은 상대가 없는 큰 것이다.

그럼, 요거 하나만을 빼고 나머지 전체를 얘기해도

이게 나머지가 있으니까 그것은 상대적인 큰 거잖아요.

 

이렇게 상대적인 큰 게 아니라

이 말은 뭐겠어요?

전체라는 거죠.

불이법이라는 얘기죠.

 

이 우주법계 전체

말하자면 허공 전체를, 허공법신 전체를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허공 법신 이것을 크다고 이름 할 수도 있겠죠.

근데 이걸 굳이 크다고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작은 거에 비해 크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없는 큰 것은 크다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거죠.

 

나는 지금,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내 몸은 요만한 사람이었어요.

나는 177이 내 키다, 160이 내 키라면, 나는 요만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큰지 작은지는 남들하고 비교해서

저 사람들보다 내가 커혹은 내가 작아

요것만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느끼며 살았단 말이에요.

 

근데 이 본래면목이라는 게 뭐예요?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

나 뭣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공부잖아요.

 

그런데 이 진정한 자기는 뭐라는 거예요?

첫 번째 힌트가?

마하란 말이에요, 마하.

크다는 거예요, 상대할 수 없게 크단 말이죠.

그 말은 뭐겠어요?

몸이 내가 아니라는 뜻이죠.

몸은 제한되어 있는, 다른 것과 이 몸은 구분되잖아요.

구분되는 것은 마하가 아니잖아요.

몸은 마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몸이 내가 아니란 말이죠.

진정한 자기는 이 몸에 갇혀 있지 않다는 걸 뜻해요.

 

그렇게 해서 이 마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이 첫 번째 어떤 힌트는

, 이렇게 제한된 어떤 이런 것이 아니구나, 진정한 자기는

마하구나, 마하

툭 트여서 어떤 한계도 없는 무량수 무량광에

큰 제한이 없고 한계가 없는, 나머지가 없는 전체를 마하라고 하는구나.

이것을 마음, ,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거였구나 하는 것을

첫째 힌트로

한번 사무쳐 보는 거예요.

도대체 뭘까? 그게 도대체 뭘까?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화두 아닌 화두를 하나하나 들어간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반야바라밀다의 여행을 떠나보는 거예요.

그럼 [마하 반야]했습니다.

오늘은 반야를 시작을 좀 할까 하는데요

 

[반야]라는 것은

뭐 이걸 뭐 그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뭐 이런 게 아니라 전부죠.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죠.

 

그러니까 반야심경이란 이름도 반야심경이 됐겠죠.

반야라는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반야라는 지혜가 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저희 은사 스님 이야기를 좀 잠깐 드릴까 하는데요

얼마 전에 설이라 은사 스님께 세배드리러 갔더니

여전하시죠, 늘 뵐 때마다 여전하시지만.

 

이번에도 탁 보자마자

그냥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공부 얘기신 거예요, 공부 얘기.

법상스님이 BTN에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촬영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반야심경 강의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시면서 반야지혜가 뭐냐? 도대체.

반야심경을 강의할 텐데 반야지혜가 뭔지를 알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이런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처음에 그 용성진종 조사스님을 은사로 마음으로 모시고

그러면서 동헌완규 스님이라고 당신의 은사 스님을 뵈러 가셨을 때

그때 딱 질문이 그거 했다는 거예요.

동헌완규 스님께서 저희 은사 스님께

반야지혜가 뭐냐?

반야심경을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고 해서

반야심경을 모든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도대체 반야지혜가 뭐냐?

너가 용성스님을 그 마음으로 모신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제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을 해야 될 거 아니냐?

너가 반야지혜에 대한 안목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내가 알아야 되겠다

뭐 이런 질문하셨다는 거죠.

 

그렇게 스승님께서도

그 반야에 대해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시면서

반야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저에게 요말씀하셨어요.

 

 

[관자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을 건너셨다]

이런 식의 우리가 해석을 다 하고 있어요.

 

근데 은사스님께서 관자재보살이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이게 제일 중요한데

그냥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고 하면

이게 깊은 반야란 말이에요, 깊은 반야.

바라밀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이야기니까

뭐가 도대체 깊은 반야냐? 하는 어떤 것이죠.

 

그 뭐가 깊은 것이냐? 도대체

그리고 뭐가 반야냐? 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좀 구체적으로

약간이라도 좀 해준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과 어떤 용정스님과 동헌완규 스님의 어떤 해석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뭐냐면

이 깊은 반야를 조금 더 첨가하신 거죠.

 

이게 무슨 반야냐 하면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인 깊은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이죠.

 

우리가 봤을 땐 언뜻 느끼기에는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

뭐 이걸 굳이 붙이냐 안 붙이냐가 뭔 차이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안목에서

이 반야지혜는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라는 이 사실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보통 법화경의 핵심 사상이 무엇이냐라고 할 때

제법실상이라고 하거든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공부할 때, 불교학 공부를 할 때, 법화경 강의를 들을 때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제법 실상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제법이, 이 삼라만상 모든 것

제법이라는 건 모든 것들 이런 것을 얘기하는데

모든 것이 그대로 실상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 말을 듣고

저는 그 당시에 제 안목으로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다 실상이지?

그리고 또 이 모든 것이 실상이라는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이라는 게

그렇게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 당시.

그 실상이라는 말이 그렇게 와닿지를 못했었습니다.

 

근데 이 실상이라는 말이 이 경전에서 반야경에서도 불교에서도

아주 어찌 보면 참 중요한 방편에 그 마하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반야지혜가 열렸다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우리는 왜 실상이 중요하냐면

우리는 뭘 보고 사느냐?

분별을 해서,

분별한다는 건 뭐냐면

이것과 저것을 둘로 나누어서 구별하는 거예요.

이거는 컵이고 이건 컵 뚜껑이야라고 둘로 나누어서 이렇게 분별하잖아요.

이 사람은 남자고 저 사람은 여자야

이 사람은 잘났고 저 사람은 못났어

이렇게 분별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크고 이 사람은 작아이렇게 분별을 하는데

그 분별이 진실이냐 말이에요.

이 사람은 아름답고 저 사람은 추해이렇게 얘기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아름다울 수도 있거든요.

또 어떤 곳에서는 이런 사람이 큰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이런 사람이 부자일 수 있고

확실히 알 수 없단 말이죠,

제가 키가 큰지 작은지를 알 수 있단 말이에요.

우리는 크다라고도 할 수 있고 작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우리가 괴로운 이유가 뭐겠어요?

실상을 모르고 허상을 실상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에요.

진실이라고 허상을.

 

나는 가난해,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키가 작아, 난 외모가 볼품 없어

이게 전부 다 자기가 이미지 그려놓은 자기에 대한 상이잖아요, 허상이잖아요.

실제 실상이 드러나 있는데

우리는 실상을 보지 않고 내 이미지

이미지로 그려놓은, 상으로 그려놓은 허상을

실제라고 착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 병은 뭐냐면 실상을 보지 못하는 병이에요.

허상을 실상이라고 착각하면서.

허상을 쥐고 있으면서.

그래서 허상을 실재라고 믿어요.

이걸 집착해 취한단 말이죠.

 

그리고 그걸 믿고 있으니까

나는 능력 없어, 근데 남들은 능력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남들보다 나는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어.

이런 식의 괴로움이 생겨난단 말이에요.

허상을 쥐는 것 때문에.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그러죠.

[범소유상 개시허망]

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

만약에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본다면

그게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허상임을 바로 보는 지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바로 꿰뚫는 지혜

그게 바로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예요.

 

실상무상이라고 해서

실상은 뭐가 실상이냐

본래 상이 없다라는 무상, 그것을 깨닫는 게 바로 실상입니다.

 

이 분별이 허망하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 아상인상중생상수사상이라고 하는 이 모든 상이

허망하다라는 사실을 바로 꿰뚫어 보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자기 마음, , 본래면목, 주인공 하는

자기 본래면목, 이걸 실상이라고도 해요.

이곳을 비춰보는

우리는 지금까지는 허상만을 비춰보고 살았다는 말이에요.

 

이걸 보자마자 컵이구나

사람을 보자마자 호감형이구나별로구나

이런 식으로 분별을 하면서 그 사람을 분별의 필터를 가지고 색안경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고, 자신을 보고

모든 것을, 분별을 가지고 보면서 살았단 말이죠, 그동안은.

분별만 비춰보고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이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진정한 반야다.

이게 [비춰본다]라고 표현을 했어요.

왜 비춰보는 거겠어요?

거울은 우리 마음, 거울이라는 표현을 써요.

마음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느냐?

거울의 특성

마음, , 본래면목은 거울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 자기 본래면목을 고경, 옛 거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본래부터 옛날부터 늘 있었던 거울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마음에 거울의 측면이 있단 말이에요.

 

거울은 어때요?

이게 거울이라고 봤을 때 거울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렇게 비춰 줘요, 비춰요.

거울은 비춥니다.

 

우리는 우리가 비춰볼 때는 우리가 이 눈이라는 분별의 도구를 가지고 비춰볼 때는

어떻게 비추냐 하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걸 정견]이라고 하고

그걸 바로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라고 합니다.

이게 [반야지혜]이고.

 

그런데 우리는 실상을 비춰보지 않고 보자마자 해석하는 거예요, 자동으로.

근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거울은 세상을 비출 때

거울 앞에 똥을 비춘다고 해서 거울이 인상을 찌그리지 않죠?

금은보화를 비춘다고 해서 막 기뻐하지 않죠, 거울은.

그냥 비출 뿐이에요.

똥도 분별하지 않고 금은보화도 분별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경전에서는 마치 그 갠지스강의 모래알에

누가 와서 똥을 싼다고 해서 모래가 그걸 수용하지 않고

왕의 행차가 지나간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것과 같이

모든 것을 다 허용하고 포용하고 받아들인다, 이런 식의 비유를 들기도 했단 말이죠.

 

이처럼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는

판단 분별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과도 같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비춰보는 거예요.

그게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입니다.

 

그 얘기는 조금 더 해나가면서 좀 더 하기로 하고요

이렇게 첫 번째 나오는 이 지혜는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인 깊은 반야바라밀다이면서

이것은 바로 자리의 지혜다

 

이 불교는 우리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듯이 자리이타의 종교라고 하잖아요.

먼저 자기 자신이 먼저 깨달아야 한단 말이죠.

자기를 이익되게 한다,

즉 자기가 먼저 깨닫는다는 거죠.

 

자신의 본성이 거울과도 같이 실상을 늘 비춰보는 이 성품이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게 바로 자리의 지혜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이익되게 해야

이 실상을 먼저 자각하는 지혜가

시상을 비춰보는 지혜의 반야지혜가 먼저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의 지혜가, 방편의 지혜가 드러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 반야심경의 첫 번째 이 깊은 반야라는 것은

바로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인 깊은 반야라는 것이

정확한 어떤 뜻으로 봤을 때, 번역일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말씀을 하시고 두 번째는 뭐였냐면

중간에 본문이 쭉 나가다 보면요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라고

우리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 위 없는 올바른 깨달음인 정각을 이루었느니라]라는 것이 조금 더 이렇게 바른 번역이라고 당신께서 말씀을 하셨고요.

 

그 다양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가

화엄경 첫 세주묘원품 첫 품 첫머리에

이 시성정각이라고 해서, 이 정각이라는 말을 딱 하고 있고

그게 아주 그 화엄경의 첫머리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미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반야심경에서도 그냥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

[위 없는 올바른 깨달음인 정각을 이루었느니라] 이렇게 하는 번역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세 번째는 뭐냐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험 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여기에서 여기 한 번 더 지혜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실상을 여실히 아는 지혜로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라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뜻으로써 완벽하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것이

아까는 자리의 지혜로써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로써 자리의 지혜로써

문득 돈오한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자기자신의 성품을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 그냥 자기만 깨닫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해야 하는 것이죠.

 

법을 전할 때는 실상은

우리가 보통 돈오후점수라고 하듯이

문득 자기 자신의 성품을 확인했다 할지라도

점수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보다 이 성품 자리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게 되고

그러고 났을 때 실상을 여실히 아는 지혜란 말이에요, 이 때는.

그래서 이 여실히 아는 지혜가 있어야만

이 실상을 여실하게 분명하게 여실하게 아는 지혜

이것은 자리의 지혜가 아니라 이타의 지혜라는 겁니다

 

즉 이렇게 많은 공부인들이 수행자들이 또 깨달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로써 자기 자신을 이익되게 한 뒤에는

반드시 실상을 여실히 아는 지혜를 가지고

이타적인 이타의 지혜를 가지고, 반야의 이타적인 측면의 지혜를 가지고서

혼자만 깨달았다고 끝내선 안 된다.

일체 중생에게 이 여실히 본인 스스로 깨닫게 된 여실히 아는 지혜를

일체중생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거죠.

회향하고 나누는 이 지혜가 없다면, 이타의 지혜가 없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지혜밖에 되지 못한다.

 

다시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부처님께서 처음 깨달음을 얻고

60명의 제자들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바로 깨달음이 어쩌면 우리 선으로 말하면

돈오후점수가 좀 부족했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깨달았을 때 그 아라한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한 길로 두 사람이 함께 행하지 말고

전법의 길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이타적인 어떤 실상을 여실히 아는 지혜를 가지고

이타의 지혜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그런 어떤 그 두 가지 측면의 어떤 지혜를 설하고 있다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그래야지만 이렇게

시상을 여시라는 지혜를 가지고

이타적인 마음으로써 이 반야를 펴야지만

온갖 괴로움

내 괴로움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들

그것을 전부 다 없애줄 수 있다는 거죠.

그것이야말로 진실해서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씀이신 겁니다

 

그러면서 그러면 이 반야심경을 어찌 보면

그 어떤 결론적인 이야기가 없는데

그 결론은 그 무엇이냐라고 한다면

그 결론은 바로

이렇게 진실이 드러나 있는 경전, 반야심경이라는 진실, 진리가 탁 드러나 있는 경전

이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실천해야 되느냐 말이죠.

그 결론이 빠져 있다는 거죠.

그것은 뭐냐?

단순하다는 거죠.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가장 단순한 실천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 반야심경이라는 이 놀라운 경전을

어떤 결론이냐?

반야심경을 끊임없이 수지독성하고, 염송하고.

수지독성이라는 말 자체가

수지, 잘 받아 지녀서 반복해서 읽고 외우고 이 뜻을 참고하고

그래서 이것이 내 소식이 되도록.

 

그러면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일체 고액에서 건너는데

그걸 혼자만 걷는 거나

이게 말만 이렇게 건넜다고 했지

실제 자기가 건네지 못한다면

실제 효과가 없고 공덕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바른 지혜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바른 지혜로써 자기에게 효과를 가져다주고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그 힘이 되려면

끊임없이 반야심경을 그냥 입으로만 염송하고 독송할 것이 아니라

이걸 진심으로 가슴으로 공부해야 한단 말이죠.

염송하고 독송하고 공부하고

그래서 이것이 자신의 공부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이 반야심경이 그냥 허공에 떠도는 글자만이 되어선 안 되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 반야지혜가, 이 반야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 실상을 여실히 하는 지혜가

나에게 정말 그 실상을 깨닫게 하는 지혜로써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나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게 진짜 바른 지혜가 될 수 있냔 말이죠.

 

근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야심경 속에, 이 짧은 경전 속에

84천 대장경에 모든 말씀이 다 함축되어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계속해서 이 법을 자꾸 접하는 거죠.

자꾸 염송하고 독송하고 경전 강의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위타인설하고 수지독성하는

즉 이 경전의 말씀을 계속해서 매일 같이 자등명 법등명하는 거예요.

자기를 비춰보듯 이 법등명,

이 법을 등불로 삼아서 늘 이 공부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한단 말이죠.

이게 사실은 공부의 핵심입니다.

이게 바로 공부의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그러니까 이 반야심경을 끊임없이 염송하고, 독송하고

끊임없이 이것을 가까이서 공부해야 한다는 그 결론을 말씀하시면

그게 빠지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하셨거든요.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요,

여러분 어떻게 깨닫겠어요?

사홍서원 할 때 보세요.

항상 법회 끝나면 회향으로 사홍서원 하잖아요.

[중생을 다 건지 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 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 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 오리다.]

 

법문을 듣고 법을 가까이 하는 삶

경전의 가르침을 항상 수지독송하고 염송하는 삶

이것을 가까이하는

그리고 이런 법문을 자꾸자꾸 듣는 삶.

 

그래서 법문 듣고 깨닫는 거예요.

그 부처님도 끊임없이 법문을 평생 다니면서 길을 다니면서 법을 설하신 분이고

초기 선에서는 법문 듣는 것만이 수행의 깨달음, 오도 시스템의 전부였어요.

 

주요 전공필수 과목이라고 하면은 세 가지가 있었다 그래요, 초기 선불교 선방에서.

-첫 번째는 법문 듣고

다양한 법문이 있었어요.

뭐 조참, 만참, 전기법회 다양한 법문들을 통해서 법문 듣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가 탁마하는 거죠, 스승을 찾아가서.

둘이서 점검받는

 

세 번째는 청익이라고 해서

보충수업처럼 이익을 청한다

내가 모르는 것들을 또 가서 여쭤보는

 

즉 끊임없이 법을 탁마하고 주고받는 거예요.

은사스님께서 세배하러 이렇게 가서 절을 하고 일어났는데

그 자리에 탁 일어나자마자

반야심경에서 반야지혜가 무슨 지혜냐?’ 하고 물으시듯이

오로지 그 법 하나만 그냥 당신에게 중요하신 거예요.

공부, 이것이 중요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그 뭐랄까

법납이나 세납이 너무 높으신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뭐랄까

그 정말 왕성한 그 에너지로 공부 얘기만 하신단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반야심경이라는 어떤 가르침을

조금 더 어르신의 어떤 그 높으신 안목을 가지고 이렇게 하신 말씀을

제가 한번 꼭 좀 소개해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러는 것이 또 제자의 도리라는 생각도 들었고

너무 또 아주 아름다운 그런 말씀이셨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저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셔요.

법회를 하고 포교를 하고 또 경전을 강의하고 사람들을 이렇게 교화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세 가지 방편을 아울러 써야 한다.

 

옛날에 냄비 다리가 3개가 있었다 그래요.

그중에 하나만 부러져도 무너지잖아요.

세 가지가 균형 잡힌 어떤 법문과 균형 잡힌 전법교화에 힘을 써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이 법에 대해서 세 가지 측면을 말씀을 해주시더라구요

저에게 조언을 해주시는데 뭐냐면

 

첫 번째, 세간의 유루의 인연법을 설해야 한다

(유루: 삼계의 번뇌인 삼루의 번뇌에 얽매여 깨달음을 얻지 못함)

무조건 출세간에 막 그냥 근본법만이 옳다고 막 그럴 것도 아니란 말이죠.

세간의 유로의 왜냐하면 일체 중생들은

유로의 인연법을 쓰고 사니까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

현실의 인연법도 설해 한다는 거죠.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현실의 인연법에 대해서 첫째 설해야 하고.

 

이것만을 설해서는 안 된다.

너무 현실 공부하는 그 스님이라면

부처님 법상 앞에 딱 앉았을 때 너무 세속적인 얘기, 이것도 좋지만

그것만을 해서 또 안 된다.

 

두 번째, 출세간에 무루의 근본법을 설해야 한다.

(무루: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

 

이 두 가지가 아울러 소리 한다는 거죠.

세간의 유루인 인연법과

또 출세간의 무루인 근본법 이것을 아울러 서려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세간 유루 인연법과 출세간 무루의 근본법만 설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불가설 부사의의 미묘법을 설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불가설 부사의의 미묘법이라는 게 이게 참 또 중요한 것인데

제 좁은 안목으로 큰스님의 말씀을 좀 번역해 본다면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세간의 유루의 인연법은 현실의 법이죠,

사법계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현실 세간의 법계에.

근데 출세간, 무루의 근본법은 이치의 세계, 이법계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근데 이 불가설 부사의한 미묘법이라는 것은

이게 바로 중도법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이사가 무애한 법계, 사사가 무애한 법계에 어떤 중도실상

이게 바로 반야지혜를 드러내는 것이고

불이 중도를 드러내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이라는 지혜인 것이죠.

 

이 법은 불가설, 말로 설할 수 없단 말이에요.

또 부사의, 사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단 말이에요, 이 법은.

 

왜냐하면 차라리 인연법만 설하거나 출세간법만 설한다면 모르겠는데

이건 중도로 설하잖아요.

하되 함이 없이 해라하고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는데

유무중도

뭐 영원하면 영원하고 단멸이면 단멸이라고 해야 되는데

영원한 것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다.

팔불중도 같은 것을 설한단 말이죠.

중도에서는 있다거나 없다라는 한쪽에 치우쳐서 설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세간법이나 출세간법 어떤 하나에만 딱 치우쳐서 설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걸 미묘법이라 그래요.

 

왜 미묘해요?

미묘가 무슨 말이냐면

우리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한 것이죠.

중도의 법문은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요.

? 이렇게 방편을 이렇게 설했다가 또 저렇게 살았단 말이에요.

? 여기 치우친 사람은 이걸 깨주고

저기 치우친 사람은 그걸 깨주니까.

유에 치우친 사람은 무를, 무에 치우친 사람은 유를 법문해 준단 말이죠.

 

그러니까 듣는 사람 처지에서는 이게 미묘하단 말이에요.

알 수 없단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씀하시는가.

 

그리고 이 법이라는 거 자체가 우리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거다 보니까

이 중도의 실상은.

그래서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 실상을 여실히 아는 지혜

이 실상의 지혜는

우리가 말로 헤아릴 수 없고

이해로 사의로 불가사의해서 이해해야 함으로써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보통 뭐 진공묘유 이렇게 하듯이

진공이지만 묘하게 있다.

없으면 없다고 하든지

있으면 있다고 해야 하는데

진공묘유란 말이에요.

진공의 측면이 있고 묘유의 측면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 분별은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해야지 이해를 해요.

그러나 부사의, 불가설의 미묘법이란 말이에요, 이 공부는.

 

그래서 은사스님의 말씀처럼

여러분이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법을 설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 이것은 세간에 유루의 인연법을 설하는 법문이구나

그러면 인연법에서는 아주 쉽게 인과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복을 짓는 얘기도 할 수 있고

윤리 도덕적인 얘기도 하고 그렇게 방편을 쓸 수 있겠죠, 그죠?

 

그러나 거기서만 멈춰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출세간 무루의 근본법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생사에서 완전히 해탈하는

사성제의 법문까지 나아가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항상 중도의 안목

불가설 부사의한 미묘법이라는

중도, 반야바라밀, 불이, 중도라는 이 바른 법문의 안목을 통해서

이 어떤 세간에만 혹은 출세간에만

어느 하나에만 치우쳐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 어떤 중도실상

이것이 바로 진정한 반야지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이 반야를 설명하는 이 첫 시간에는

이렇게 저희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그런 것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마치도록

이렇게 하겠습니다.

들어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