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28. 불교와 힌두교의 깨달음 비교. 마하리쉬와 싯타르타의 깨달음

Buddhastudy 2023. 6. 28. 20:19

 

 

 

, 이 시점에 앞서 필자가 내놓았던 화두를 점검해 보자.

라마나 마하르쉬와 세존의 깨달음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만일 같다면 힌두교와 불교는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제자들은 과거불 못지않게 현세불인 라마나 마하르쉬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그의 가르침을 뼈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불제자 입장에선 답이 다르다는 쪽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라마나 마하르쉬를 비롯해서 수많은 힌두교의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놀랍도록 분명하고 간결하고 정확하여 감탄을 금하기 어렵다.

그들의 수많은 가르침 중에 깨달음에 관한 대목만 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참된 깨달음이란

나라는 자성이 없이 무아이지만

그렇다고 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본성이 있어 진아이지만

그렇다고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와 너가 불이이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체의 머무름이 없지만

그렇다고 머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법과 리가 통하면서도

일체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참된 자아, 즉 본성(진아)의 경지이다...

 

이상은 힌두교의 깨달음에 대한 정리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이것과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무상정등각과 무엇이 다른가?

 

혹자는 앞서 강조한 [그냥 깨달으라]는 대목을 근거로 뭔가 그럴싸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아마 세존의 깨달음은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성취한 무상정등각은

원인 없이 그냥 존재하며

이유 없이 그냥 창조하며

분별 없이 그냥 감상하는 참된 존재

그 자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과

앞서 언급한 힌두교의 깨달음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단어의 선택과 배열에 구분이 있을 뿐이지

내용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이 그 차이를 안다면 깨달음이 열린다.

행여 깨달음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여도 깨달음의 문고리만은 확실히 쥐게 된다.

 

힌두교의 깨달음과 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이것이 뭇 화두의 백미이다.

이것을 확실히 풀려면 당신은 5차원 의식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5차원 의식의 한 갈래라도 잡아야 한다.

이 화두에 필적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다음의 사지선다에서 답을 찾고 그것을 증명해 보는 화두이다.

 

1) 소승불교, -연기에 의한 무아론-, 만물은 연기에 의해 변화하고 실체가 없어 무아이다.

2) 힌두교, -몽환에 의한 진아론-, 만물은 실존(브라만)의 꿈이며 실재하는 건 참된 자아뿐이다.

3) 대승불교, -연기에 의한 진아론-, 만물은 연기에 의해 변화하고 실체가 없지만 그 바탕에 있는 심(불성)만이 상주불변한다.

4) 과학, -물리법칙에 의한 유물론-, 심이나 신, 진아 같은 것은

인간이 영존하고 싶은 욕구에서 꾸며낸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밖에 없다.

 

무엇이 정답일까?

 

 

인류의 수행사는 결국 이상의 사지선다형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

이 화두 역시 5차원 의식에서 보지 않으면 답을 풀 수 없다.

낮은 차원에선 보는 가도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수천 년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논쟁 속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의 두 화두를 풀지 못하면 세존의 법통을 이은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의 수준에 맞는 깨달음으로 자족하며 살다 가는 것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 다시 말해 힌두교의 깨달음과 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여기에 경천동지할 성불의 열쇠가 숨어 있다.

(기존의 불교 수행으로서는 힌두교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름만 다를뿐 모든 것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을 설명할 때, 대개 힌두교의 깨달음에 더해 육바라밀의 닦음을 덧붙인다.

현상계에서의 도덕성과 활동성을 강조해서 차별을 두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바닷물에 겨자씨 하나를 떨어뜨리고 다른 바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이것을 풀려고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생각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과연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가?

행여 당신의 지혜가 매우 출중하여 그 답을 찾는다고 해도 답이 아니게 된다.

 

왜냐, 생각으로써 답을 내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한바탕 거세게 해 보고 틈틈이 쉬는 것이 필요하다.

개시허망을 가슴 절절히 느끼면서 모든 의지처를 잃고 그냥 쉬는 것이다.

생각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지만 쉬면서 그냥 있게 되면 열쇠를 쥘 수 있다.

 

 

정답은 아니지만 그것의 그림자 정도는 3차원의 평이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꿈속이 비유를 들어 보겠다.

당신이 귀신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있다고 가정하자.

심한 공포심에 의해 괴로운 상태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꿈이 사라졌다.

꿈이 없는 상태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다시 귀신의 꿈이 이어진다.

이때 당신이 꿈이 없는 상태를 떠올려 귀신의 꿈을 희석시키면

공포심이 잦아들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귀신의 꿈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알아졌다.

자각몽의 상태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꿈에 대한 집착이 거의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이어 꿈속의 모든 것들이 자신과 물이라는 사실도 알아진다.

모든 것이 냐가 아닌 것이 없다.

그냐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이렇게 되니 어떤 꿈에도 매여 있지 않고

그렇다고 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도 모무르는 바가 없다.

 

 

당신이 꿈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면서 무아를 보았고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진아를 찾았다.

그리고 꿈이 곧 나라는 사실을 알면서 불이의 절대가 되었고

꿈과 꿈이 아닌 것에 머무름이 없게 되면서 해탈을 이루었다.

당신은 정녕 깨달은 것인가?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은 안 것과 꿈에서 깨어 현실이 된 것은 어둠과 빛처럼 확연히 다르다.

누군가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듯 깨달음에 연연하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꿈속에서 깨달으면 성인이나 붓다가 되어 거룩하게 빛나지만

꿈에서 실제로 깨어 현실로 돌아오면 그냥 기지개를 켜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

왜냐, 꿈에서 깨면 현실이란 것이 너무 당연하여 그것에 대한 어떤 머무름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전히 깨닫게 되면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 무엇보다 평범해진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따면 꿈을 꾸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해 하는 정도랄까.

 

 

꿈 안의 깨달음과 꿈 밖의 깨달음,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깨달음과 불교의 깨달음의 차이이다.

전자는 특출나고 위대하고 거룩하지만 후자는 평범하고 무난하고 담백하다.

 

세존은 무상정등각을 얻기 바로 전에 위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돌이켜보면 이 생각이 그가 중생으로 있으면서 일으킨 마지막 생각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수행의 발자취를 상기한 뒤

일체의 의지처를 잃고 그냥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일찍이 없었던 대각을 이루고는 수행자로서의 독특한 모습을 잃고 보통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의 세존은 어느 누구보다 평범했다.

다섯 명의 비구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가감없이 얘끼해 주었고

이후에 인연 닿아 찾아오는 수행자들에게 각자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전했따.

그러다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게 되니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불교를 만들어 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방편도 설하고

틈틈이 지역 유지나 권력자와의 친분도 다졌다.

이렇게 평범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한평생 살다가 말년에 위염으로 고생 좀 하다 죽었다.

 

이랬던 세존이 죽은 다음부터 한량없이 존귀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로 거듭났다.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꿈속의 제왕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가끔씩 떠올려 보지만 한편으론 재밌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다.

 

 

불경에 나오는 깨달음이나 옛 조사들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

그런 것들은 죄다 힌두교의 깨달음으로 치장되어 있다.

다시 말해 꿈속의 깨달음이다.

따라서 그런 몽중각에 미련이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를 풀 수 없을뿐더러 깨달음을 기약할 수 없다.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

 

그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깨달음의 범부를 크게 넘어서 있다.

무나 모름의 화두를 통해 멍때리는 정도의 체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위빠사나의 알아차림과 삼매의 멸진처, 참선의 열반과 무주의 해탈로도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경지이다.

높고 높기에 한없이 낮아 그냥 깨달으면 되는 평범한 자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