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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스파르타에 공세

Buddhastudy 2023. 9. 6. 19:39

 

 

 

기원전 492년부터 약 50년간 이어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마주한 그리스 세계에서는

외부의 침입 기간 동안에는

폴리스들 간에 서로 견제를 멈추었습니다.

 

거대 제국 페르시아를 맞아

민족 단결의 힘을 보여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살라미스 해전 등을 통해

그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를 지킨 결과는

전쟁에서 일등 활약을 보였던

아테네가 군림하는 형태의 제국화

그리고 이에 대항한 그리스 최강의 육군

스파르타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쪽 진영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미텔레네를 압박하고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의 플라타이아이를 압박하는 등

상대 진영의 소국들을 점령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며 전쟁은 격화되고

잔인한 보복과 포로 학살도 점점 일반화 되어갔죠.

 

기원전 431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를

주기적으로 공략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아테네 성벽 안에서

스파르타의 공격을 무난하게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좁은 시내로 갑자기 많은 인구가 몰리게 되자

공중위생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비위생적인 환경과 영양부족은 아테네 역병을 유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430년부터 아테네 역병은 수차례 번졌고

이로 인해 아테네는 주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7~8만 명이 사망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전 429년에는

오랫동안 아테네를 이끌었던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역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테네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지도자마저 잃은데다가

스파르타의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우회적으로 함대를 운용하며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소모전을 펼치다보니

재정 상황도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아테네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은 강경파 클레온으로

그는 기원전 427년부터 그동안의 수비적 형태에서 벗어나

공격적으로 행동하자고 주장합니다.

물론, 대규모 함대를 운용하기에는

돈도 사람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소규모 함대로 작전 지역의 토착민들을

아테네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아테네는 소규모 함대를 펠로폰네소스반도 서쪽으로 보내

스파르타 동맹국들에게 타격을 가하며

동시에 아테네 동맹국들을 지원했습니다.

멜로스나 보이오티아에 대한 타격은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그 일대의 주요 스파르타 동맹국들에게 타격을 입혀

스파르타의 힘을 어느 정도 빼는데 성공합니다.

 

아테네의 공세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기원전 425.

아테네 함대는 시칠리아로 보낼 지원군을 싣고

항해하다가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에, 아테네 함대는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폭풍을 피해 스파르타 인근에 있는 필로스라는 곶에 도달합니다.

 

이 함대에는 데모스테네스라는 장군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필로스에 잠시 배가 정박하는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병사들을 불러 모아

곶의 입구에 방어 성벽을 쌓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공사를 끝내 요새가 만들어졌는데

필로스 요새는 이후 생각지 못한 신의 한수가 되었습니다.

필로스는 이 주변의 해역을 제압하기에도 적절했고

스파르타의 후방을 견제하기도 좋아서

데모스테네스는 아예 원래의 작전에서 빠져나와

갤리선 5척의 규모로 이 기지에 주둔을 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턱 밑까지

아테네 군대가 왔다는 사실에 놀라

아테네 원정을 멈추고 필로스를 공격했지만

이미 요새를 구축했던 데모스테네스는

이를 하루 동안 적절하게 잘 막아냅니다.

 

다음날, 대규모 아테네 해군이 도착해서

스파르타 함대를 쫓아냈고

이때에 필로스 공격 대기상태였던 440명의 스파르타군을

스팍테리아 섬에 가두는데 성공합니다.

 

스파르타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지배민족이 아닌

정규 시민의 숫자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440명의 스파르타군은

스파르타에게 있어 상당히 타격이 큰 숫자였습니다.

 

이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평화협정을 제안했지만

아테네의 지도자는 강경파

클레온의 반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테네가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는 당장이라도 스팍테리아 섬으로 쳐들어가

스파르타군을 상대하고 싶었지만

육지에서 최강인 스파르타군을 상대하기에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식량 공급만 겨우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가장 낮은 신분 계급인

헤일로타이들에게 자유와 상금을 주는 대가로

스팍테리아 섬에 보낼 식량지원자를 모집했습니다.

헤일로타이들은 식량을 챙겨 출항하고서는

아테네 함대를 따돌리며

목숨을 걸고 스파르타군에게 식량을 보급하였습니다.

스파르타군에서는 어떻게든 식량보급이 이루어지는 동안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아테네 함대는

식수 공급 문제가 막히면서

이제 더 이상 아테네 해군이 포위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성질이 불같았던 강경파 클레온은

이렇게 우리가 유리한 상황인데도

시간을 끄는 건 전부 온건파 탓이 아니냐며

온건파에게 정치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휘하면 20일 내로 다 휩쓸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죠.

 

이에 온건파의 수장이었던 니키아스는

클레온의 공격성 발언을 들으며

그럼, 클레온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면 되겠다고 여론을 형성합니다.

 

여론은 클레온 출장을 부추겼고

클레온은 갑자기 이런 상황을 마주쳐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클레온은 말로만 거칠었을 뿐

실제 전쟁 경험은 한 번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결국, 클레온은 전쟁터로 떠났고

일이 어떻게 될지 두려웠지만

마침 전장에 도착하니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지게도

데모스테네스가 스팍테리아 섬에 대한 공략을 세워둔 상태였습니다.

 

스팍테리아 섬에 대한 정찰을 마쳤던 데모스테네스는

야간 상륙에 성공하여 스파르타군을 압도하며 제압했고

스파르타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292명의 포로를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필로스 지역에서의 아테네 승리로 인해 전황은

전반적으로 아테네가 승기를 잡게 됩니다.

필로스 요새에 주둔한 아테네군은

스파르타로서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스파르타로부터 탈주했던

국유노예 헤일로타이들도 아테네에 붙으며

스파르타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스파르타의 경제적 기반은

노예제로 부양되던 헤일로타이가 있어서 가능했는데

이들이 스파르타로부터 탈주함으로써

스파르타의 재정적인 문제가 악화되었습니다.

 

거기다 필로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시민들이 인질로 잡혀있어서

함부로 아테네 근방에서 기웃거리기도 어려웠습니다.

또한, 그동안 그리스 세계에서 쌓아왔던

스파르타의 용맹한 이미지가 실추되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시절만하더라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기 전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는

용맹한 스파르타군이 아테네에게 항복해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다른 도시 국가들도 스파르타가 그리 무섭지 않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1년이 지난, 기원전 424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테베를 굴복시키고자 델리온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아티카 지방의 아테네와

보이오티아 지방의 테베를 중심으로 한 보이오티아 연맹은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장군은 아폴론의 사원

델리온에서 방어하기로 마음먹고

군사들을 이끌고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때의 히포크라테스 장군과

의학의 선구자 히포크라테스는

동명이인으로 다른 인물입니다.

 

아테네 군사들은 델리온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보이오티아군의 기습으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보병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밀집대형을 이룬 군사들끼리의 대결 특징은

약한 전력을 좌측에 강한 전력을 우측에 배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강한 전력의 우측 군사들은 서로 상대의 좌군을 먼저 깨뜨리며

중군, 우군을 격파하는 방식으로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서로를 휘감는 모습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우군이 펠로폰네소스 좌군을 깨뜨리고서

다음으로는 실수로 자신들의 중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렇게 아테네군은 자신들의 군대끼리

서로를 죽이는 싸움을 벌였고

이는 기록상 최초의 아군을 죽인 전쟁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혼란이 거듭되다 사태가 수습되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보이오티아 연합군이

아테네의 군대를 쓸어버리면서

아테네군은 델로스 전투에서 패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아테네의 중장보병 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아테네군이 패배할 때 소크라테스는

장군으로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잘 수습하여 전열을 유지하였고

보이오티아군이 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잘 정비된 소크라테스의 병사를 쉽게 건드릴 수 없어서

패잔병은 무사히 퇴각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테네 청년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의 명성이 높아지며 인기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편, 아테네가 헤매고 있는 동안

스파르타는 브라시다스가 이끄는 동맹군으로 인해

트라케 일대를 침투하여

암피폴리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암피폴리스는 아테네에게 있어

중요한 은광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스파르타가 전쟁의 불리한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트라케 지역의 아테네 사령관 투키디데스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고

추방당한 후에는 역사저술가가 되어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년 후 기원전 422. 아테네의 수장 클레온이

다시 트라케 지방을 되찾고자 출병하였지만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며 목숨을 잃게 되었고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도 전투에서 죽게 되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강경파가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양측의 강경파가 죽고 나자,

1년 후인 기원전 421년에는

아테네의 온건파 정치인인 니키아스의 주도로

50년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됩니다.

 

이 평화협상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스팍테리아 섬의 인질을 돌려주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암피폴리스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강대국은 서로 동맹이 되기로 했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세계사에 있는

포로 문제와 아테네의 역병에 이어

아테네 스파르타 공세편을 다루어보았습니다.

 

다음 영상에서는 니키아스 협정 이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5번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